‘분노에 날뛰거라. 이글거리는 눈빛 그대로 목을 잘라주마.’
마을 가장 뒤쪽, 참호 안에 몸을 숨긴 퍼거슨은 빼앗은 리볼버에 총알을 넣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
- ...... 놈들이 참호를 파두어 마을에 다가갈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눈물을 떨군 터커를 보며 막스는 말없이 어깨를 두드렸다.
- 네가 죄송할 일이 아니다, 터커.
테네시주의 작은 마을에서 적들이 참호를 파고 기다릴 거라 예상이나 했겠는가.
‘안타깝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었을 일이었다.’
이 말을 삼킨 막스는 머리를 비우고 복수와 보복, 응징으로 채워 넣었다.
‘SFBC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 표본을 만들어주마.’
“여기까지.”
막스가 손을 들자 대원들은 일제히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가라앉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주변은 봄을 머금은 초록 풀들이 무릎까지 자라 있었다.
“작전은 분대 단위다.”
매복한 적들을 상대로 덤벼들어 봐야 또 다른 희생자만 늘어날 뿐.
‘며칠이 걸려도 상관없다.’
적진에 틀어박힌 놈들을 나오게 하는 방법으로 막스는 심리전을 택했다. 이는 적을 몰살시키는 방법으로도 적당했다.
막스는 열두 명의 분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대원들은 말을 탄 채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막스의 분대 저격수는 피치.
상황에 따라 포지션이 바뀌는 막스는 말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그런 다음 대원들과 풀숲으로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기고 길리 슈트를 장착했다.
“가자.”
특수부대원은 헌터스 빌 마을을 열두 방향에서 포위했다. 그런 다음 풀숲을 꿈틀거리며 포복으로서 거리를 좁혀 나갔다.
같은 시각.
테네시 게릴라 진영.
“놈들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를 포위할 생각인가 봅니다.”
“고작 그 인원으로?”
퍼거슨이 코웃음 쳤다.
지금껏 서부 사령관을 연구한 결과 그 의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서 마을을 쬐고 있을 테니까. 괜히 대가리 내밀다 뒈지지 말고, 저격수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해. 우리 저격수들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위치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네놈들만 저격수가 있는 게 아니라 이거야.’
마을을 점령한 이상 식량도 넉넉하겠다.
퍼거슨은 급할 게 전혀 없었다.
그는 낄낄거리며 참호에 등을 기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도 없이 화창하다.
‘당분간 비가 쏟아질 일은 없겠구만.’
콜로라도에서 폭우가 쏟아지던 때.
얼 반 돈 사령관이 진격을 지시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터.
퍼커슨은 참호의 약점도 간파하고 있었다.
평원에 석양이 걸쳐진다.
바람이 살랑이며 풀들이 춤을 추고. 그 속에 있던 막스가 손을 들자 길고 긴 포복도 휴식에 들어갔다.
마을과의 거리는 대략 5백 미터.
막스와 피치는 대원들보다 앞쪽이었다.
둘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파츠를 꺼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스코프와 소음기를 장착하고 휴대용 삼각대에 총구를 올려두었다.
“이건 심리전이야. 밤이든 낮이든, 시간은 상관없어. 며칠이 걸리더라도 몰살시키는 게 목적이니까.”
“응.”
막스와 피치는 스코프로 마을을 훑어봤다.
저녁이지만 전부 불이 꺼져있는 모습은 폐광촌의 고스트 타운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 고목 나무에 매달려있는 두 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신체 일부가 절단된 던킨과 에버튼의 처참한 모습. 피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총구마저 흔들거린다.
입술을 깨문 피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절대 쉽게 안 죽일 거야.”
열두 방향에서 마을을 쬐던 대원들도 분노에 몸을 부들거렸다. 이때 분대장의 말이 귀를 파고들며 대원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옆에 있던 가족이 죽어도 냉정과 침착을 잃지 않는다. 분노는 복수가 끝났을 때 터트려라. 다들 기억하지?”
혹한기 훈련 때 지겹도록 듣던 말이다.
잊은 건 죽은 던킨과 에버튼뿐일 것이다.
저격수를 제외하고 대원들은 다시금 포복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한 통나무집.
밤이 되고 지루함을 느낀 게릴라들이 슬슬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주변에 있긴 한 거야?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지?”
“우리처럼 훈련이 잘된 놈들이라잖아. 어느 방향에 몇 명이 있는지 파악도 안 되는 걸 보면, 보통 놈들이 아닌 거지.”
“시발, 똥 마려워 죽겠는데. 밤이라 안 보이겠지?”
집 안에 화장실이 있을 리도 없고 방에 싸자니 그것도 못 할 짓이다.
결국, 창문을 넘어 으슥한 곳에서 볼일을 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게릴라들은 집과 참호를 들락거리며 생리현상을 해결했다.
아침 햇살을 맞으며 잠에서 깬 막스는 조금 떨어져 있는 피치에게 말을 건넸다.
“고생했어. 이제 눈 좀 붙여.”
“응.”
두 시간을 엎드려있던 피치는 이내 몸을 뒤집어 하늘을 응시했다. 자리는 불편하지만, 눈을 감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댄 막스는 입으로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댔다.
나름의 아침 식사였다.
막스는 먼저 대원들의 위치를 살펴봤다.
‘시간상 적들의 참호 가까이 갔겠지.’
뒤에서도 보이질 않으니 그저 추측할 뿐.
포복만큼은 가히 세상 최고였다.
이번엔 스코프를 움직여 적들의 저격수를 확인했다.
‘그나마 스코프가 없어 다행이군.’
참호와 저격수 배치까지 한 걸 보면 혀를 찰 노릇이다. 상대에 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두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적들의 리더가 시대를 앞서간 놈이거나,
혹은 자신의 전술을 카피했거나.
섣불리 돌격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육포와 분노를 씹어대며 막스는 스코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침 9시가 됐을 무렵.
참호 밖으로 머리가 하나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발, 대체 밥은 언제 주는 거냐?”
“몇 시간째 아무것도 못 먹었다! 이러다 굶어 뒤지겠다고!”
“허리 숙이고 빵 좀 던져, 새끼들아!”
집 안에 있던 자들은 배가 든든하고,
참호에 있던 병력은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처음 참호를 팔 때 이렇게 장시간 대치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다가오는 북군을 매복과 기습으로 죽일 생각만 했지, 이렇듯 상대가 반응 없이 시간만 보낼 줄은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다.
적의 위치도 모르고 언제 저격수가 총을 쏠지 모르는 갑갑한 시간이 이어졌다.
정오가 지나고 오후가 될 즈음.
참호에서 허기를 느낀 퍼거슨은 궁리 끝에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냈다.
‘서부 사령관이라면 여기서 미끼를 던지겠지.’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너, 가서 먹을 것 좀 가져 와.”
퍼거슨이 부하 한 명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짓지만 살기 짙은 리더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총알이라도 맞을까, 냅다 집으로 달려갔다. 주변의 참호에서도 이를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가져왔습니다!”
“......”
‘시발, 왜 안 쏘지?’
퍼거슨은 얼굴을 구기며 빵을 오물거렸다.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른 참호에서도 하나둘 튀어나오더니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설마 이걸 노린 건가!’
그러나 이번에도 퍼거슨의 예상은 빗나갔다.
다들 무사히 빵을 들고 참호로 돌아갔다.
점점 머리는 복잡해져만 갔다.
다음 날 아침.
이틀이나 계속된 대치 속에 게릴라들이 먼저 지쳐갔다.
밤새 똥도 싸고 음식을 실어 날라도 적은 총알 한번 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적들이 주변에 있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게다가.
“저 새끼들. 분명히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니까.”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처음 나온 말은 아니지만, 이 시점에선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죽인 놈들이 특수부대원이었나?”
“서부 사령관 직속 부대···지.”
말 한마디에 몇만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꽤 높은 위치.
그런데 게릴라 2백 명이 맞선다?
‘우리가 잘 못 건드렸어.’
추측들은 확신으로 굳어지며 동요를 일으켰다.
일부 대담한 놈들이 참호에서 뛰쳐나와 퍼거슨에게 달려갔다.
“적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게 빤히 보이는데.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겁니까?”
이틀 동안 머리를 너무 쓴 탓인지.
퍼거슨의 머리는 그야말로 백지상태였다.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이것들이 미쳤나.’
큰소리로 불만을 터트리는 놈에겐 총이라도 쏘고 싶다. 그런데 이때.
“차라리 한쪽을 뚫어서 벗어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적들이 사방에 퍼져있으면, 오히려 우리에겐 기회죠!”
“송곳처럼?”
“바로 그거죠!”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퍼거슨의 마음이 급격히 탈출로 쏠린다.
피곤한데다 잔뜩 불만을 품은 부하들도 신경 쓰였다. 장장 한 시간의 고민 끝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당장 마을 중심으로 집결시켜. 말을 탄 놈들이 앞서서 6시 방향으로 적진을 뚫고 간다!”
퍼거슨이 지시를 내리자 부하들은 신속하게 참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다른 참호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집에 처박혔던 게릴라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막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사흘도 못 버티는 쓰레기들.’
막스가 먼저 방아쇠를 당겨 개시를 알렸다.
뚜쿵.
곧이어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동료들이 쓰러지자 게릴라들의 움직임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라! 놈들이 제법 멀리 있다! 저격수들은 무시하고 한 곳만 뚫으면 된다!”
퍼거슨의 외침에 게릴라들이 말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말이 없는 자들은 모이는 즉시 남쪽으로 달렸다.
“적들의 포위망을 뚫어라!”
퍼거슨은 게릴라를 군 조직처럼 운용했다.
선두의 기병들을 앞세우고 보병들이 뒤따랐다.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 자신들이 파놓은 참호를 지나칠 때.
팅.
풀숲에 엎드려있던 SFBC 대원이 수류탄의 핀을 뽑았다.
쇄도하는 적들을 향해 내던졌다.
시간 차이를 두고 옆에 있던 대원들 역시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파편들이 비산한다.
선두를 달리던 무리가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말들과 함께 튕겨 나갔다.
퍼거슨 바로 앞에서 달리던 부하 역시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몸에 생긴 구멍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이게 무슨!’
퍼거슨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 때.
저격이 아닌 생생한 총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다.
말 머리를 틀어보지만 마을을 뚫고 달려오는 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퍼거슨은 적들이 생각보다 참호 가까이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지원군은 애초에 생각도 없었다!’
대치만으로 수만 가지 고민을 안겨주고, 급기야는 스스로 방어를 포기하게 만든 전술.
‘놈이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쾅! 쾅!
폭탄이 터지는 상황에도. 이성을 잃은 부하들은 사방으로 조여오는 적을 피해 한쪽만을 고집했다. 그 결과, 서 있는 부하들이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미련한 새끼들.’
그리고 곧 퍼거슨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타앙.
총알이 퍼거슨의 어깨를 관통하고, 팔과 다리에도 박혔다.
잠시 후.
총성이 멈추고 커다란 목소리가 평원에 울려 퍼졌다.
“리더를 데려오는 놈에겐 확실한 보상을 해주 마!”
이 상황에 보상은 목숨일 터. 열 명 남짓 서 있는 게릴라들의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탕!
한 명이 쓰러지자 아홉의 눈동자가 미친 듯 요동쳤다.
‘악마 같은 새끼들. 나는 기필코 살아남는다.’
퍼거슨은 꿈틀거리며 폭탄에 휩쓸린 시체 더미를 향해 기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부하가 싸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 로디. 차라리 나를 죽여라.”
로디가 행동으로 대답했다. 퍼거슨의 의도와 달리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