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북군 새끼들이 도망갔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죠.”
“크. 그걸 내가 봤어야 했는데.”
병사는 막스의 어깨를 총구 끝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그나저나, 노예 새끼가 어딜 겁대가리 없이 총 들고 돌아다니고 있어. 여긴 우리 3중대 소관이니까 넘어오지 마, 새끼야.”
“조심하겠습니다.”
막스는 허리를 꾸벅 숙이곤 발걸음을 되돌렸다.
동양인보다야 낫겠지만.
‘흑인은 확실히 리스크가 있어.’
남부 연합은 노예병으로서 자원한 흑인들을 전선에 데리고 다녔는데. 총까지 내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이곳 캠프에 흑인이 있다 한들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간호하거나 취사병 혹은 장교들의 뒤치다꺼리가 맡겨진 임무였다.
전투병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라 남부 연합 입장에선 적극적으로 노예를 활용할 생각이었으나. 전쟁이 거듭될수록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전쟁에 밀려 퇴각하는 경우 노예들의 탈주가 골칫거리였고, 이는 곧 주인들의 막대한 재산 손실로 이어졌다. 주인들이 노예들을 제공하는 데 소극적인 이유였다.
동이 틀 무렵.
병사들의 아침을 위해 누군가 모닥불을 피웠다. 그곳은 흑인들이 있는 천막 앞이었다.
막스는 총 들고 다니는 전투병보다 비 전투력 노예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해서 그들 사이로 침투를 시도했다.
식량 배급과 조리를 담당하는 흑인 노예들. 그중 막스와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테네시 제2보병연대에 있었거든. 보다시피 간밤에 부상당해서 싸울 수가 없어서 말야.”
모닥불에 비친 막스의 군복은 군데군데 피가 묻고 찢겨있었다. 원래 주인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속에 묻혔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막스와 대원들 뿐이었다.
“다친 곳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어.”
“팔은 쓸 수 있다는 소리네. 루이지애나 멜빌에서 온 고든이다.”
고든이 손을 내밀고 막스는 짧은 궁리 끝에.
“난··· 블랙 조.”
“뭐? 이름 참 좆같이 지었네. 흑인이라는 거 모를까 봐 블랙이라고 지었냐? 시발, 아무튼 어울리지 않는 군복은 벗고 이것으로 갈아입어.”
고든은 누가 입던 건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옷을 건네줬다. 막스가 상의를 벗자 힐끔거리던 고든이 입을 삐죽거렸다.
“완전 계집애 같은 피부네. 너 주인 잘 만났구나.”
‘살다 살다 피부 좋다는 소리를 다 듣네.’
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선의 노비 이막산의 등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제법 많았다. 절대 여자와 비교할 수 없는 등판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막스에게 고든은 마차를 가리키며 양동이를 내밀었다.
“가서 옥수수부터 가득 담아와.”
남부 연합의 사정이 아직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옥수수뿐 아니라 다른 마차에는 밀가루와 채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보기에만 그렇지 4만에 달하는 병력을 생각하면 하루에 끝날 양이었다.
막스는 사소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내가 어지간하면 욕은 안 하는데.’
막스는 시발거리며 입을 씰룩거렸다.
체험 삶의 현장이랄까. 흑인 노예의 아침은 혹한기 훈련에 비견될 만큼 힘들었다.
옥수수수프를 가득 담은 냄비를 들고 이동하는 막스의 얼굴이 땀으로 흥건했다.
콜로라도에서 위장크림을 개선한 탓에 이 정도로는 흘러내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리는 총 맞은 것처럼 절뚝거리며 막스는 옥수수수프 다섯 통을 실어 날랐다.
함께 일한 흑인들은 힘이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뜩이나 손이 부족했는데 다행이네. 너도 솔직히 총 들고 싸우는 것보단 낫잖아?”
‘아니, 그게 훨씬 나아 새끼들아.’
속마음을 감추며 막스는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때.
뿌우우우우.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캠프가 들썩거렸다.
주섬주섬 옷을 대충 걸친 병사들이 천막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거듭된 행군과 어제의 전투로 피곤함에 찌든 얼굴들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게으른 북군 새끼들처럼 느려터진 새끼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장교들은 부대를 소집하고 인원을 파악하는 등 나름의 아침 점호를 실시했다.
언뜻 체계적인 듯 보이지만 워낙 병사가 많아 도떼기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기습하면 한 번에 무너지겠구만.’
협소한 지역에 급조된 캠프는 기습에 취약했다.
물론 부분적인 모습일 뿐. 남군의 앞쪽 진영은 방어선과 공격을 위한 진지를 촘촘하게 만들어 두었다.
그걸 뚫지 않는 이상 승리는 요원했다.
막스가 한쪽에 빵을 수북이 쌓아둘 때, 고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백인 장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막스에게 다가온 고든은 눈을 가늘게 떠 물었다.
“보급 장교가 네 중대장한테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던데?”
뭔가 의심하는 눈초리지만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장교가 직접 와서 추궁했을 테니까.
막스는 당당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대신 말해줬어. 가뜩이나 인원이 부족했는데 잘 됐다고 하더라. 그나저나.”
고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좀 건방지다? 내 밑으로 들어왔으면 태도도 바뀌어야지?”
‘노예끼리 갑질은. 그냥 조져?’
빵을 옮기던 막스가 허리를 쭈욱 폈다.
그리고는 고든에게 바짝 다가갔다.
움찔한 고든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서로의 시선이 잠시 엉키며 긴장감이 생겨났다.
막스 위에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음은 무슨 일을 할까.”
“...... 가서 장작 가져와.”
“오케이!”
막스는 입술을 씰룩거리는 고든을 뒤로하고 다리를 쩔뚝거리며 숲으로 방향을 틀었다.
노예 셋과 함께 도끼로 나뭇가지를 자르고 장작을 만들어 수레에 실었다. 다시 캠프로 돌아왔을 땐 식량 배급이 한창이었다.
흑인 노예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배급은 백인 병사들이 담당했다. 막스의 임무는 생각보다 막중했다. 수프나 빵이 떨어지면 재빨리 채워야 했다.
‘아침밥은 주겠지?’
배를 쫄쫄 굶으며 일하고 있을 때.
한 병사가 의미심장한 눈빛과 함께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막스와 함께 잠입한 특수부대원 토마스 필드였다.
‘이 자식이 웃어?’
보스가 개고생하는 데 부하가 실실 쪼개고 있다니.
막스의 살벌한 눈빛이 필드의 얼굴에서 이내 손에 들린 빵과 스프를 향했다.
아차 싶었는지 필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한기 때 훈련이라는 핑계로 부하들의 식량을 빼앗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필드는 본능적으로 빵을 수프에 찍어 냅다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짙은 미소를 남기며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두고 보자, 저 자식.’
화가 가라앉을 즈음엔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 닮아서 아침은 꼬박꼬박 챙겨 먹는구나.’
막스를 본 뒤의 반응은 필드와 비슷했다.
그중 한 놈은 두 번이나 배급을 타다가 걸리기도 했다. 장교에게 욕을 먹는 모습에는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깡도 그런 깡이 없었다.
‘그냥 무식한 건가.’
병사들의 식사가 끝나고 마침내 막스도 아침이라는 걸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뭐긴 뭐야. 네 몫이지.”
고든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늘어 붙은 수프를 긁어 막스에게 건네줬다.
빵은 형태가 사라진 밀가루 본연의 가루뿐이었다.
“내가 먹는 거에 진짜 민감하거든?”
“그래서 뭘 어쩌라고, 병신아.”
고든은 먹기 싫으면 관두라며 음식을 가져가려 했다. 막스가 빼앗으려 하자 어느덧 고든의 똘마니 흑인 넷이 막스를 둘러쌌다.
백인들의 식사가 끝난 뒤 찾아온 흑인 노예들만의 시간. 이들의 텃세가 시작되었다.
“따라 와, 이 건방진 새끼야.”
막스는 고든과 똘마니들에게 둘러싸여 노예들의 숙소인 천막으로 끌러 들어갔다.
고든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막스를 노려봤다.
“무릎 꿇어.”
“...... 다리에 총 맞아서 힘들다.”
“그, 그럼 두 손이라도 들어 새끼야!”
“손을?”
“너, 총 좀 만져봤다고 상황 파악이 안 되지? 여긴 군대야, 전쟁터고! 내 밑에 들어온 이상 너도 내 부하라···!”
막스의 손이 고든의 눈앞에서 번쩍이고.
짝! 소리와 함께 뺨이 화끈거렸다.
곧이어선 배에 더 큰 고통이 느껴지며 허리가 저절로 꺾여졌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뽑혀 나갈 것 같은 통증.
저절로 상대의 손에 이끌려 고개가 들려졌다.
“뒈질려고 내 아침 식사를 뺏어?”
막스는 주먹으로 배를 가격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다른 노예들은 잔뜩 얼어붙은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군대에 끌려온 노예들은 작은 행동도 조심스러워했다.
서로 갈등이 있어도 대부분 참거나 소심하게 괴롭히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식하게 폭행을 한다?
그것도 전시상황에서?
장교들에게 채찍질 당하거나 즉결처형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퍽퍽!
막스는 땅에 엎드려 잔뜩 웅크린 고든을 발로 후려쳤다.
물론 노예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도.
대체 주인이 누구길래 저렇게 막 나갈까.
노예들의 행동과 대우는 주인의 직위에 따라 달라지는 법.
흑인 중 병사로 총을 들 수 있는 노예는 많지 않았으니, 필시 주인을 높은 분이라 생각했다.
이는 고든도 같은 생각이었다.
막스의 발길질이 멈추자 고든은 부들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주인이 누구냐고.
“내 주인? 사령관이다 새끼들아.”
“헉!”
조선인 막스 조.
연방의 서부 사령관 본인이 곧 주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노예들은 벼락 맞은 듯 몸을 떨었다.
눈빛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기선 제압은 일단 성공.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확실히 해둬야겠군.’
옷차림은 곧 위계질서의 상징. 비교적 깨끗한 고든의 옷을 빼앗으려 했다.
막스는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고든에게 내던졌다.
“상의 벗어 새끼야.”
“......?”
막스가 또다시 발을 움직이려하자 고든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재빨리 상의를 벗었다.
그런데, 몸의 상처가 상당했다.
“...... 돌아봐봐.”
“아, 알았어.”
이유도 모른 채 고든이 뒤로 돌아섰다.
‘지독하군.’
주인의 채찍질로 생긴 켈로이드 상처가 거미줄처럼 흉측하게 돋아나 있다.
굵고 깊은 상처를 본 막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등은 왜 그러냐?”
빤한 질문을 왜 했을까 후회되지만 이미 고든의 말은 시작된 후였다.
쓸데없이 자세하고 긴 이야기를 추려보면.
“목화솜 농장의 감독관이 심심해서 때렸다 이거야?”
“응.”
고든은 조금은 비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따르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그 반대면 말 안 해도 알지?”
고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똘마니들도 따라했다.
이로써 막스는 취사병들의 우두머리라는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었다.
‘이번 작전은 밑에서부터 시작한다.’
4만의 병력.
그 정점에 서 있는 남부의 서부 사령관을 북군의 서부 사령관이 노리고 있었다. 그것도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
흑인 노예들과 섞여 지내는 동안 막스는 정보를 수집하는 데 집중했다.
침투한 대원들은 전선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캠프에서 숨바꼭질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렇게 존스터과 주요 지휘관들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접근하는 방법만 궁리하면 되겠군.’
저녁을 준비하던 때, 보급 장교가 불시에 찾아왔다. 고든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던 장교는 이내 막스에게 다가왔다.
“네가 이번에 온 블랙 조라고 했···?!”
갑자기 보급 장교가 눈을 부릅떴다.
부담스럽게 가까이 다가와선 막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까지 했다.
‘이 자식이 왜 이래.’
막스가 이유 없이 불안해할 때.
갑자기 보급 장교가 품속을 뒤적거렸다.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 펼친 뒤엔 막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요동치는 눈빛, 침을 꿀꺽 삼키며 말하길.
“너··· 호, 혹시. 크리스마스이브 때 캔자스 레콤프턴 간 적 있냐? 이년 연속으로?!”
< 샤일로 전투(4) >
‘크리스마스이브의 레콤프턴이라.’
생각나지 않을 수가 있나.
처음은 조지 클라크를 죽이기 위해서였고, 막스는 이때 알프레도를 처음 만났었다.
두 번째는 사무엘 제퍼슨 존슨의 뒤를 이은 보안관을 암살하기 위해서였고.
공교롭게도 둘 다 레콤프턴의 술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설마 술집에 있던 놈인가?’
막스는 뜨끔했지만 일단 발뺌부터 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태어나서 앨라배마주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웃기는 소리! 이렇게 똑같은데 어디서 거짓말을!”
보급 장교는 전단지를 막스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하나도 안 똑같구만.’
피부가 검다는 것 빼고는 막스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로렌스에서 처음 전단지를 봤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