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아닌 이상 그림만으로 잡기는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막스는 눈알을 굴려 고든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이 묘했다. 마치 보급 장교를 향해 ‘이 새끼 또 지랄하네’라는 얼굴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막스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캔자스는 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무슨 일!?”
보급 장교는 입을 떼려다 악몽이라도 떠올랐는지 갑자기 손을 쳐들었다.
‘...... 설마.’
피할까 반격할까를 고민하는 찰나의 사이.
짜악.
찰진 소리와 함께 뺨에 얼얼한 감각이 전해졌다.
‘..... 이 새끼 가만 안 놔둔다.’
막스는 살기를 숨긴 채 노예처럼 굽신거리며 보급 장교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으로 봐선 범인이라는 확신보단 분풀이에 가까웠다.
“개새끼. 너, 정확한 소속이 뭐라고 했지?”
보급 장교가 날카롭게 막스를 쏘아봤다.
“... 테네시 제3보병연대 2대대 2중대입니다.”
“멀린 중대장이로군. 가서 들어보면 알겠지. 넌 각오해 새끼야.”
낮게 으르렁거린 보급 장교가 훽하니 몸을 돌렸다. 졸지에 뺨을 맞은 막스는 어이없는 얼굴로 고든을 쳐다봤다.
“..... 신경 쓰지 마. 처음 보는 흑인들한테는 항상 저랬으니까. 나한테도 그랬거든.”
“원한이 많은 모양이네.”
“술집 사장이었는데 웬 흑인이 수리만 해놓으면 와서 부숴놨데.”
“!”
‘술집 이름이···.’
랩튼 바였나. 재수 없게도 그곳 사장이 보급 장교가 되어 막스 앞에 나타났다.
미친 우연 같지만, 캔자스 레콤프턴의 상황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두 개의 주도를 놓고 노예제 옹호론자와 폐지론자가 다투던 캔자스. 그중 노예제 옹호론자들이 주도로 밀었던 레콤프턴은 토피카에게 자리를 내준 뒤 고스트 타운 수준으로 몰락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빚만 잔뜩 진 랩튼 바 사장이 남부 연합에 자원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블랙 조, 너는 아니잖아?”
“...... 당연하지.”
“그럼 걱정하지 마. 네 중대장님한테 확인 끝나면 더는 안 건드릴 테니까.”
‘확인하는 게 문제다, 인마.’
다행히 2중대는 매복을 위해 캠프를 비운 상태다. 북군과 교전하지 않는 이상 빨리 돌아온다 해도 내일 밤이다.
‘그때까진 일을 끝내야겠군.’
“고든, 오늘따라 다리가 너무 아프네.”
“..... 아프면 서서 하는 일로 바꿔줄까?”
‘시발, 어제 발로 졸라 때리더니. 쌤통이다.’
고든은 꽉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순간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하는 일 말고. 장교들 숙소 관리하는 자들하고 일을 바꾸고 싶은데? 며칠간 만.”
“그래?”
굴러온 돌이 알아서 빠져나가겠단다.
고든은 기쁨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들의 보직은 유동적이라 수시로 바뀐다.
특히 잡일만 하는 경우, 부르면 그게 곧 보직이 되었다.
고든은 장교에게 보고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바로 갔다 올게!”
고든이 말하러 간 사이, 한 병사가 장내를 향해 큰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존스턴 서부 사령관께서 오늘 전투를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적진을 1마일(1.6km) 밀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와아아!”
함성이 협곡에 울려 퍼지고 다소 처져있던 병사들의 사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막스는 이를 보면서도 낙담하지 않았다.
비록 몸은 여기 있으나 전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율리시스의 병력이 3만 5천. 존스턴 장군이 이끄는 남군이 5만.’
여기에 더해 후방에서 코린스의 병력이 속속들이 합류하고 있으니.
분명 남군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존스턴은 자신들의 병력 우위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내슈빌에서 남하하고 있는 뷰엘의 군대가 율리시스와 합류하는 순간. 병력의 우세는 열세로 뒤바뀔 테니까.
‘내가 존스턴이라면 뷰엘이 도착하기 전 비좁은 협곡을 벗어나 평원으로 나가고 싶어 하겠지.’
그런 다음 평원에서 율리시스 부대를 포위.
전멸시키려 할 것이다.
문제는 예상 밖으로 셔먼과 프렌티스 장군이 잘 버티고 있다는 거. 이를 좀처럼 뚫지 못하는 존스턴 입장에선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승리로 1마일을 진격했다?
필시 무리한 공격으로 만들어낸 결과일 테고, 승전보는 희생보다 승리를 부각하기 위해 미리 약을 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막스가 전황을 골몰히 생각할 때, 고든이 돌아왔다. 앓던 이가 빠진 듯 그의 얼굴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조, 내가 말해뒀어. 가면 일거리를 줄 거야.”
“고맙다.”
막스는 발걸음을 옮겨 캠프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들의 숙소로 향했다.
*
- 지휘관들의 막사를 담당하고 싶다고?! 나야 환영이지!
30대로 보이는 흑인 노예는 쌍수를 들며 반겨했다. 간단한 청소만으로도 신경쇠약에 걸릴 만큼 장교들은 까다로웠으니 말이다.
전쟁터에서 장교들의 말은 곧 법이었다. 노예들의 운명을 움켜쥔 주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블랙 조가 그 일을 자처하고 나섰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당장 알려줄 테니까, 따라와!
전쟁터로 나가는 바람에 막사는 비어있었다.
막스는 남자를 따라 일을 배웠다.
간단할 줄 알았던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등잔 기름은 반쯤 달았을 때 무조건 채워 놔. 기름은 아까 숙소 우측에 있는 드럼통에 있어.”
“클레번 장군님이 복귀하거든 재빨리 물을 가져다드려. 위생에 엄청 신경 쓰시니까 양동이 두 개는 가져다 놔야 해.”
‘어서 계획을 서둘러야겠군.’
“여기가 사령관님 숙소야. 뭐든지 반듯한 걸 좋아하시니까 담요도 가지런히 접어둬야 해. 한번 해 봐.”
막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담요를 정리했다.
이를 본 남자의 눈이 커졌다.
“좆나 칼각인데? 너 이거 어디서 배웠어?”
“...... 그냥.”
“타고났네, 타고났어.”
‘드디어 이걸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구나.’
전생의 특전사 시절 모포 칼각하면 조유강.
뭐든 각 잡는 걸 미덕으로 여겼기에 별명도 조유각이었다.
뿌듯한 표정을 지은 막스는 사령관의 숙소를 벗어나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여기가 지휘관들께서 회의하는 막사야. 여길 들어오는 사람은 장군들하고 나 뿐이었어.”
남자는 자부심 깃든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여긴 진짜 잘 관리해야 해. 만년필하고 종이는 넉넉하게 준비해두고, 지도는 여기 회의 테이블 끝에 돌돌 말아둬. 아, 맞다. 사령관님 의자가 삐걱거려서 오늘 고치려고 했는데. 네가 할 수 있지?”
남부 연합의 서부 사령관은 의자도 다른 모양이다.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게 등받이도 있고 나름 고급스러웠다.
“망치랑 못만 박으면 되겠네.”
“그래, 별거 없지. 서둘러. 복귀하시면 곧바로 회의하실 테니까.”
‘오케이, 이곳으로 정했다.’
눈을 반짝이며 막사 내부를 훑어본 막스는 남자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웬만한 건 다 알려줬어.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알았지?”
“어.”
이 시간부터 서로 보직을 바꿔 남자는 막스가 하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막스는 망치와 못을 챙겨 다시금 지휘소로 향했다. 하지만 고치는 대신 의자와 테이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좋아, 이거로 가자.’
암살 방법을 정한 막스는 밖으로 나가 천막 기둥 꼭대기에 검은색 천을 걸어 두었다.
잠시 후.
신호를 본 특수부대원들이 어기적어기적 모여들었다.
- 독수리는 내일 잡는다.
막스는 스치듯 지나치며 작전을 지시했다.
구체적인 시간은 모르나, 그 징후를 말해주었다.
- 그나저나, 잘 처먹더라? 나는 배고파···?
망할. 대원들이 대꾸도 없이 사라졌다.
‘올해는 반드시 혹한기 훈련 간다.’
막스는 작금의 감정을 가슴에 새기며 노예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간부들의 숙소 정리 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부상당한 병사들의 천막에서 간호사들의 보조도 그중 하나였다.
전쟁터의 야전병원.
백인 의사들과 흑인 노예들이 뒤섞여 병사들을 돌봤다.
“아무래도 절단해야겠군. 톱 가져와.”
“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없어. 일단 술 한잔 마시고, 아프더라도 좀 참아.”
곧이어 드륵드륵 톱으로 절단하는 소리와 비명이 어울려 천막 안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물론 막스만 머리카락이 곤두설 뿐, 익숙한 의사와 간호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서 묻어.”
팔꿈치 아래로 잘린 오른팔을 양동이에 담아 천막 밖으로 나갔다. 막스가 땅을 대충 파고 묻으려 할 때, 전투를 끝낸 병사들이 복귀하기 시작했다.
캠프의 비전투병력들이 환호로 맞이했다.
하지만 막스의 예상대로 승리한 것치고 병사들의 얼굴이 음울했다.
전선을 끌어 올린 대신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게 분명했다.
잠시 후엔 백 수십에 달하는 북군 포로가 남군에 끌려 왔다.
“빌어먹을 북군 새끼들!”
“똑바로 안 걸어?”
남군은 붙잡힌 포로들을 나무로 울타리를 세운 곳에 가뒀다. 그리고 주변을 무장한 병사들이 둘러싸 지키고 있었다.
첫날 붙잡힌 병사들은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움과 굶주림으로 눈빛부터 생기를 잃어갔다.
사흘간의 전투에서 북군의 포로만 삼백 명.
그만큼 선두에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막스가 먼발치에서 포로들을 바라볼 즈음.
잠입했던 특수부대원 토마스 필드와 케너 제라드가 캠프를 이탈했다.
한참을 벗어난 어느 지점에 이르러.
필드가 입으로 까마귀처럼 ‘까악까악’ 거렸다.
그렇게 세 번을 외치자 이에 응답하듯 까악까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히콕이 부대원 다섯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들 했다. 보스는?”
“뭐, 흑인 노예 생활을 즐기고 있지.”
“즐겨?”
히콕과 대원들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작전은?”
“내일 시작이야.”
“그래서 보스는 뭐로 처치할 생각이래?”
히콕이 저격 라이플과 작은 가방을 내밀었다.
필드는 그중 가방을 받아 챙겼다.
“그럼 나는 다시 보스한테로 간다.”
“고생해라. 제라드는 옷부터 갈아입고 우리와 함께 갈 거지?”
“어. 가서 그랜트 장군에게 내일 일을 논의해야지.”
필드는 남군의 캠프로 복귀.
제라드는 북군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대원들과 함께 율리시스 부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부터 존스턴은 휘하의 장교들을 이끌고 최전선으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빼앗은 땅만큼 새롭게 진지를 만들고 북군이 파 놓은 참호를 이용해 진영을 보강했다.
“뷰엘의 군대가 이틀이면 도착한다. 오늘 이 협곡을 벗어나지 못하면 기회가 없다는 걸 명심하라!”
이전이라면 존스턴은 선두에서 말을 타고 병사들을 지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격수와 참호, 개틀링 기관총의 빠른 등장으로 적에게 노출되는 상황을 극도로 꺼렸다.
“작전은 어제와 같다! 적 참호를 집중적으로 포격하라!”
펑! 펑!
후방에서 대포가 굉음을 터트리고 나팔 소리가 보병들의 진군을 재촉했다.
북군에서도 곧이어 포탄이 날아오고 땅에 처박히며 무수한 파편들을 만들어냈다.
나흘째로 접어든 샤일로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존스턴 사령관께서 오늘도 북군을 후퇴시켰습니다! 내일이면 협곡에서 벗어나 평원에서 적들을 쓸어버릴 겁니다!”
또다시 남군의 캠프에 희망찬 전쟁 소식이 전해졌다.
막스는 어제와는 달리 미간을 찡그렸다.
‘확실히 내일의 전투는 평원이겠군.’
이틀 연속 전선을 밀었다면 병사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돌격하면 대군을 율리시스 부대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현재 존스턴이 얻은 첩보로는.
북군의 뷰엘 장군이 제멋대로 피츠버그 랜딩을 한 율리시스를 욕하고. 율리시스는 진군이 느린 뷰엘을 탓한다는 것이었다.
적들이 이렇게 분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존스턴은 이 상황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첩보는 반쪽짜리였다.
처음 뷰엘과 율리시는 자신의 부대에서 쌍욕을 날려대며 서로 욕을 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뷰엘의 예상과 달리 율리시스는 남군의 대군을 상대로 사흘을 버텨냈다.
고로 전쟁에서 패하면 비난은 뷰엘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 진군 속도를 높여라! 율리시스 부대가 무너지면 우리도 위험하다!
뒤늦게 정신 차린 뷰엘은 부대를 채근해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뷰엘이 있든 없든 이 전투는 율리시스 부대만으로도 충분하다.’
막스는 전장으로 떠난 장교들의 빈 막사를 정리했다.
전임자가 알려준 것들을 대충 끝내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지휘소 막사.
어제와 마찬가지로 천막 기둥 꼭대기에 검은 천을 걸어 두었다.
- 보스, 여기 있습니다.
토마스 필드는 히콕에게 건네받은 가방을 건네줬다.
- 여기서 망보고 있어.
- 옛썰!
지휘소 천막 안으로 돌아온 막스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 면밀히 확인했다.
그리고는 테이블과 의자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