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360)

잠시 후.

작업을 끝낸 막스는 밖에서 망을 보던 필드에게 미리 작성한 쪽지를 전했다.

내용은. 

[사령관이 캠프에 도착하면 보급 장교 조지 모건을 지휘소 안으로 오게 만들어.]

그날 오후 늦게 전투 병력이 캠프로 복귀했다.

이와 동시에 토마스 필드는 보급 장교, 아니 랩튼바 사장을 찾아갔다.

“사령관께서 나를?”

“보급에 관해 여쭤보실 게 있다고, 지휘소 안에서 대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발, 내가 보급품 빼돌린 걸 눈치챘나?!’

많지는 않다. 

하지만 걸리면 문제가 될 양이긴 하다. 

랩튼바 사장의 직급은 대위.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지휘소 천막으로 들어섰다.

‘대기하라고 했지.’

멀뚱멀뚱 서서는 눈알만 굴려 내부를 살폈다.

테이블과 의자를 보니 문득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흑인 새끼가 부쉈던 의자가 이거였지.’

전쟁터에서 옛 추억과 조우한 랩튼바 사장.

홀린 듯 다가가 사령관의 의자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때.

천막을 젖히며 3군단장 윌리엄 하디 준장이 나타났다.

“넌 뭐야? 뭐 하는 새낀데 여기에 있어?”

“그, 그게 사령관께서 보급에 관해 할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요!”

“지금 회의가 급한데 보급은 뭔. 회의 끝나거든 들어와.”

“알겠습니다!”

랩튼바 사장이 나가려 할 때 다른 장군들도 줄줄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뭐야 이 새끼는’ 하는 눈빛으로 흘겨봤다.

머쓱한 얼굴로 천막을 빠져나오자 대령급 지휘관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역시나 ‘네가 뭔데 지휘소에서 나오냐’는 눈빛으로 물었다.

‘시발,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

랩튼바 사장은 상관들의 시선을 피해 조금을 떨어진 곳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었다.

‘억울해서라도 진급해야지 썅.’

치익.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내뱉을 즈음.

서부 사령관 존스턴이 지휘소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천막 안 등잔불에 일그러진 지휘관들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의자에 앉기도 전부터 존스턴의 회의는 시작되었다.

“내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츠버그 랜딩에서 샤일로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일단 협곡을 벗어나 평원에서 군단을 세 개로 쪼갤 생각인데.”

상석으로 향한 존스턴. 

앉기 위해 테이블 안에 들어간 의자를 뺀 순간. 의자 다리에 묶인 세 가닥의 실이 테이블 하판에 붙어있던 핀을 잡아당겼다.

팅. 팅. 팅.

핀 뽑히는 경쾌한 소리가 천막 안에 울려 퍼지고.

“방금 뭔 소리야?”

미간을 찡그린 존스턴이 의자에 앉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이어.

콰아아아앙.

천막 안에 느닷없이 폭발이 일어났다.

서부 사령관, 1군단장, 3군단장 등.

막스는 도합 12개의 별을 하늘로 날려버렸다.

툭.

랩튼바 사장의 입에 물린 담배가 땅에 떨어지고. 

먹먹해진 청각과 정신이 되돌아올 즈음엔 장교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천막 안에다 무슨 짓을 해둔 거야!”

< 고생하셨습니다 >

콰아아앙.

해가 진 늦은 저녁. 

남군 캠프에서 일어난 폭발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최전선을 지키고 있던 일만의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캠프에 무슨 일이지!?’

지휘관들조차 불안한 시선으로 캠프를 응시했다.

그런데 잠시 후.

“적들의 암살입니다! 사령관, 군단장들께서 당하셨습니다!”

“!”

캠프에서 달려온 연락병의 외침이 전방을 뒤흔들었다.

소식이 너무 빨리 전달되었으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곧이어 연락병은 경악하는 장교들에게 당황스러운 명령을 전했다.

“지휘관들은 서둘러 캠프로 전선을 물리라는 명령입니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단 말이냐!”

“제2여단장 샘우드 장군님입니다!”

혼란스러운 지휘관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일이면 이 협곡을 벗어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여기까지 오는 데 희생된 아군이 몇 명인데요!”

“설사 사령관과 군단장들이 죽었다 해도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사령관은 임시로 세우면된다. 

그런데 철수하라고?

지휘관들은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거부했다.

‘역시 쉽게 넘어오질 않네.’

적들을 교란하기 위해 연락병으로 위장한 특수부대원 토마스 필드. 장교들이 꿈쩍도 안 하자 두 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장군들께선 율리시스와 뷰엘의 부대가 이미 합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타이밍에 총공세가 이루어진다면 북군의 대군을 막기는 역부족이라는 게 상부의 판단입니다.”

“해서 전선을 뒤로 미루겠다는 건가? 그동안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저는 그저 장군님의 지시만 전달한 것뿐입니다.”

지휘관들은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 끝에. 

“아무래도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전선을 물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남군의 장교가 북군보다 낫다더니.’

말로 해서는 좀처럼 교란이 먹혀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휘관이 말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

피유우웅. 

남군의 캠프 어딘가. 몇십 미터 상공으로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는 곧 펑 소리와 함께 빛을 뿜어냈다.

“저, 저게 뭐지!?”

장교들과 병사들의 시선이 하늘을 응시할 때, 필드가 소리쳤다.

“암살에 성공했다는 첩자들의 신호가 분명합니다. 곧 북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겁니다!”

필드는 캠프로 복귀하겠다며 말에 올라탔다.

"전 분명 장군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그럼 이만."

지휘관들은 갈등에 휩싸였다. 

캠프로 가서 직접 확인하겠다던 지휘관도 머뭇거렸다. 

상부의 지시를 확인하고 대처하기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때 이들의 결정에 쐐기를 박는 일이 벌어졌다.

뿌우우우.

북군에서 들려온 나팔 소리. 병사들이 기겁하며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쾅 소리와 함께 포탄이 날아왔다.

“젠장, 우리가 시간만 잡아먹었구려!”

“어서 병사들을 뒤로 물립시다!”

“늦었습니다. 차라리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적들의 병력을 따져보세요! 무슨 수로 여길 지킨단 말입니까!”

이들을 지휘할 사령관의 부재는 극심한 혼란을 초래했다.

결국 장교들은 퇴각을 명령했다. 

참호에 있던 병사들이 튀어나오고 포병들은 대포를 이끌고 캠프로 향했다.

암살이 일어나고 고작 1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 폭발 직후 남군의 수뇌부를 잃은 캠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놈을 데려가서 심문해! 북군의 첩자들을 모조리 색출해야 한다!”

졸지에 용의자로 지목된 랩튼바 사장. 조지 모건은 결백을 호소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발길질에 채이고 머리채를 잡힌 채로 끌려갔다.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장군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동요하지 말라! 우리의 병력은 여전히 적들의 우위에 있다!”

“이럴수록 전방의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 전방의 장교들에게 절대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전하라!”

명령을 하달받은 연락병은 즉시 말에 올라 전방으로 달려갔다.

장군들은 시체와 파편으로 박살 난 지휘소를 벗어나 새로운 막사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이때, 캠프 상공에서 붉은빛이 떠오르자 또 한 번의 혼란을 불러왔다.

이 불빛이 북군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병사들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장군들은 회의를 서둘렀다.

“신호를 보냈다 해도 당장 놈들이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암살에 성공했다는 신호라고 봐야죠. 어차피 최전선의 진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놈들이 기습한다 해도 아군의 진영을 뚫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압니까. 일단 최전선에 병력을 더 집중시키도록 하죠.”

샘우드 준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은 밖에서 대기하는 부관들에게 시시각각 전달되었다.

“일단 가장 시급한 건, 존스턴 사령관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겁니다.”

“사령관부터 정하고 군단장을 정하도록 하죠. 그럼 누구를···.”

이때 막사 입구가 젖혀지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들어와 소리쳤다.

“최전선의 병력이 캠프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쾅!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단 말이냐!”

장군들이 테이블을 치며 일어나자 흠칫한 대위가 반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시선을 샘우드 장군에게로 향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명령을 내려?!”

방금까지 전방의 병력을 충원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북부 놈들의 농간에 놀아나다니.’

장군들은 적들의 술수에 빠졌다는 걸 직감했다. 

게다가 이어진 북군의 진격 소식에는 충격과 분노, 허탈감이 회의장을 휩쓸어갔다.

*

“전군은 멈추지 말고 진격하라!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때까지 전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셔먼 장군이 이끄는 5사단이 파죽지세로 남군을 밀어붙였다. 

스스로 방어선을 무너트린 남군은 추격하는 북군을 상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질서정연한 후퇴는 이내 꼬리를 잡힘으로써 전열이 흐트러졌다.

게다가 최전선을 지키던 장교들은 뒤늦게 첩자들의 교란에 빠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분노와 절망, 자신을 책망한 장교들은 결국 퇴각을 멈추고 결사 항전을 택했다.

“이대로는 전멸을 피할 수 없다! 캠프가 철수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자!”

붕괴한 전열을 수습하고 방어선을 구축했을 때, 이들의 위치는 허무하게도 전투가 시작된 첫날 그대로였다.

‘나흘 동안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탄식을 토해낸 남군의 병사들은 곧 셔먼의 북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패배감.

바닥에 떨어진 사기.

남군의 급조된 방어선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투항과 탈주, 장교들이 전사하는 장면들이 속출했다.

같은 시각 남군의 캠프.

그 많던 천막들이 철거되고 짐들이 마차들로 옮겨지는 동안. 매복과 정찰을 위해 흩어진 중대들이 속속들이 캠프로 모여들었다. 

북쪽 숲속에 나타난 일단의 남군 병사들 역시 자연스레 캠프에 스며들었다.

무리의 선두는 어제 캠프에서 이탈했던 특수부대원 제라드. 지리에 익숙한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포로들이 수용된 곳으로 향했다.

“근무교대다. 가서 퇴각 준비해.”

나무로 둘러쳐진 울타리. 주변을 지키던 병력이 총총히 숙소로 돌아갔다.

이를 본 히콕이 혀를 차며 말했다.

“너무 쉬운 거 아냐? 묻고 따지지도 않네.”

“머릿속엔 퇴각 생각뿐일걸.”

제라드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일말의 의심 없이 돌아가는 탓에 특수부대는 손쉽게 포로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대원들은 울타리를 둘러싸는 대신 입구를 열고, 일부는 주변을 경계했다. 

히콕의 시선이 포로들을 향했다.

“우린 북군 특수부대 소속이다. 얼른 집에 돌아가자고.”

‘북군 특수부대? 집?’

“지, 진짭니까?”

앉아있던 자들이 벌떡 일어나고, 죽어가는 눈빛이 희망으로 번져갔다.

“북군 깃발이라도 휘날려 줄까? 입 닥치고 따라올 수 있도록 해.”

포로들이 울타리에서 빠져나올 즈음.

네 개의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달빛이 그들을 비추자 흑인 한 명과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있던 흑인이 흰 이를 보이자 대원들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굳이 말이 필요한가.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대화는 충분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은 예외였다.

막스에게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며 속삭였다.

“얼른 닦아. 얼굴 보고 싶으니까.”

“......”

손수건이 축축한 게 알코올까지 묻힌 모양이다. 막스는 피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고.”

“쳇!”

피치가 입을 삐죽거렸다.

막스는 포로들 틈에 섞이고, 함께 침투했던 대원들은 자연스레 일행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두운 밤.

길이 없는 숲을 헤쳐나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분을 이동할 때, 앞서간 정찰병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남군에서 탈주한 흑인들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혼란한 틈을 타 캠프를 탈출한 흑인 노예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고 어두운 밤이다.

남군이든 북군이든 보이는 즉시 총에 맞을 확률이 높았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 그게 살리는 길이니까.”

막스의 지시를 받은 정찰대는 대원들을 추려 탈주한 흑인들을 추격했다.

그리고 얼마 뒤.

대원들이 일단의 흑인들을 붙잡아왔다.

대략 20명으로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

그리고 그중엔 취사병 고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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