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너가 왜 여기에 있어?”
막스를 발견한 고든과 노예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대원 한 명이 날카롭게 쏘아봤다.
“누가 말하라 그랬어. 닥치고 따라오랬지?”
“죄, 죄송합니다.”
고든과 탈주 노예들은 입을 닫은 채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캠프에서 벗어나자 긴장하는 분위기가 풀어졌다.
대원들이 잡담을 나누고 포로들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눈치를 살피던 고든이 막스를 쳐다보며 속삭이듯 입을 뗐다. 그런데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
“블랙 조. 너 북군 첩자지?”
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얼굴을 가까이하며 고든이 속삭였다.
“갑자기 장교들 숙소를 청소하겠다고 한 거. 그 직후에 지휘소에 폭발이 일어난 거. 이게 우연이야?”
“너 의외로 머리 좋구나.”
“내가 눈치 빠르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거든. 대장이 그냥 된 게 아니라고.”
고든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폭발 말야. 북군에서 배운 거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어?”
“알아서 뭐 하게?”
“나도 군인이 되고 싶거든. 북군으로!”
고든의 말에 다른 노예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로망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북군이 되어 남군을 향해 총을 쏜다.
그동안 맺힌 한을 풀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알프레도가 무기를 만들 때, 희열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북군이 되고 싶다 이거지?”
“어. 네 상관한테 말 좀 해줄 수 있어?”
“말이야 해줄 수 있지. 근데 시간은 좀 걸릴 거야.”
“가능은 하다는 거지?”
정확히 이야기하면, 연방은 아직 흑인 군대를 만들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의회가 반대하고 다수의 국민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흑인 부대는 만들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병력을 모으는데 한계가 있을 테니까.
‘어쩌면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바뀔 수도 있겠군.’
막스가 이런저런 생각하는 때, 고든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블랙 조, 너 혹시 서부 사령관 봤어?”
“왜?”
“캠프에서 들었거든. 동양인이라고.”
“그게 왜.”
“동양인도 하는 걸 왜 흑인은 못 할까 싶어서.”
순간 주변의 시선이 고든에게 쏠렸다.
자신들 빼고 전부 북군이라는 걸 깨달은 고든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눈치 빠르긴 개뿔. 일도 없구만.”
대원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막스는 담담하게 발길을 옮겼다.
북군의 캠프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정찰대가 나머지 특수부대원과 조우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북군의 병력도 함께였다.
그런데 그 선두에는 놀랍게도 율리시스 그랜트가 서 있었다.
“고생들 했습니다.”
“그랜트 장군님?!”
벅찬 감격과 무사 귀환했다는 안도감이 뒤섞이며 포로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일부는 율리시스 그랜트를 외치며 환호했다.
흑인 노예들은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율리시스 그랜트. 남군 병사들이 서부 사령관 다음으로 증오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랜트 장군이 인파를 뚫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왜 오는 거지?!'
강제로 남군에서 노역한 것도 죄라면 죄였으니. 고든과 노예들은 다가오는 그랜트 장군의 위압감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고생하셨습니다. 사령관님.”
‘!’
노예들과 포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집중되었다.
피치 옆에서 알코올이 잔뜩 묻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지우고 있던 막스.
서부 사령관이 율리시스 그랜트의 손을 잡고 있었다.
< 그럼 뭐가 필요한 건데 >
“뭘, 여기까지 마중 나오셨습니까.”
“사령관께서 오시는 데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악수를 끝내고 막스는 여전히 얼굴을 닦으며 말을 건넸다.
“다행히 승기는 잡은 것 같더군요.”
“사령관님 덕분에 셔먼과 프렌티스 장군이 협곡을 장악했습니다.”
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율리시스 뒤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뷰엘 장군은 어디까지 왔습니까?”
“절반은 테네시강을 넘어와 캠프로 합류했습니다.”
“흠. 그럼 뷰엘 장군한테 가 볼까요.”
둘만 있을 때와 달리 율리시스의 말은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했고 겸손의 미덕도 갖추고 있었다.
얼굴과 목까지 위장크림을 지운 막스는 율리시스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자가 서부 사령관이었다니.’
고든은 블랙 조의 임무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정보를 건네주고 결정적인 임무는 백인들이 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서부 사령관이나 되는 인물이 흑인으로 위장하고 적진에 침투해 적들을 죽인다?
‘어메이징하구만.’
고든과 노예들은 눈만 껌뻑거린 채 블랙 조, 아니 서부 사령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피츠버그 랜딩에 세워진 북군 캠프.
막스와 율리시스가 도착하자마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스를 본 눈빛은 꽤 복잡했다.
돈 카를로스 뷰엘.
북군 총사령관 맥클레런의 친구이자 내슈빌을 점령하고 4만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 지휘관.
거북이보다 느린 행군으로 마침내 율리시스 부대와 합류한 것이다.
“너무 빨리 오느라 식사는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막스의 말에 뷰엘의 뺨이 타오른 것처럼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굴엔 철판을 깔고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사령관이 그런 사소한 것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율리시스 장군께서 고생이 많았군요. 무리하게 작전을 펼치긴 했지만, 뭐 결과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뷰엘은 사령관을 무시하고 율리시스의 공을 추켜세웠다. 동시에 자신을 기다리지 않은 것을 은근슬쩍 탓하고 있었다.
할 말이 많은 율리시스는 막스를 힐끔 쳐다봤다. 사령관의 반응에 따라, 나설 생각이었다. 다행히 막스도 심기가 불편한 듯 뷰엘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전쟁은 결과가 중요하지요. 다만, 협곡에서 남군을 밀어냈다고 전쟁이 끝난 건 아닙니다.”
막스가 여전히 뷰엘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퇴각하는 남군이 갈 곳은 뻔합니다. 미시시피주의 코린스로 가겠죠. 뷰엘 장군은 당장 병력을 이끌고 셔먼 장군과 합류하세요.”
“...... 가는 길이 협곡과 늪지대라 쉽지 않을 텐데요.”
“그건 적들도 마찬가집니다. 남군이 코린스에서 군을 정비하기 전에 점령하는 게 이번 작전의 마지막입니다.”
굳게 다문 뷰엘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동양인 애송이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다 끝난 전쟁의 뒤치다꺼리나 하라니.
게다가 코린스로 가는 길이 좀 험난한가.
반발심이 가슴 밑바닥부터 꿈틀거렸다.
그런데 이때, 막스가 한발 다가와 자신을 노려봤다.
“내 지시를 따르지 못하겠거든, 다시 내슈빌로 복귀하세요. 지금까지 관광하고 즐겼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과, 관광이라니!”
“4만 대군을 이끌고 아무것도 안 했으면 그걸 관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아니면 소풍이라고 불러드릴까?”
“이이···!”
뷰엘이 주먹을 움켜쥐며 눈을 부라린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막스는 보기 싫은 듯 고개를 돌려 율리시스로 쳐다봤다.
“북군의 다음 캠프는 코린스가 될 겁니다. 전군을 이끌고 당장 남하하도록 하죠, 율리시스 장군.”
“알겠습니다.”
원 역사에서 서부 사령관 할렉은 샤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율리시스 그랜트를 임무에서 배제했다.
또한 코린스를 공격하긴 하지만 너무나 신중한 나머지 협곡에 길을 내고 곳곳에 진지를 세워 시간을 지체했다. 뷰엘도 이에 동조해 열흘이면 갈 거리를 무려 한 달이나 소비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절대 그 꼴은 못 보지.’
율리시스, 셔먼이 막스의 작전을 전적으로 따르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승기를 잡았으면 힘이 다할 때까지 밀어붙인다.
북군의 장군들이 고민하고 신중하게 소심하게 행동 때, 막스는 과감하게 행동하여 결과 역시 만들어냈다. 율리시스와 셔먼의 생각과도 일치했다.
돈 카를로서 뷰엘은 서부 사령관과 율리시스를 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곱씹어봤다.
여러모로 불리했다.
‘여기서 안 움직이면 승리해도 비난을 피할 수 없겠구나.’
아니꼽고 더러워도 동양인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결론 내린 뷰엘은 슬쩍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령관의 뜻은 알겠소. 강을 건너는 병력이 집결하는 대로 코린스로 향하···.”
기다렸다는 듯 막스가 뷰엘의 말을 잘랐다.
“가려거든, 지금 있는 병력만이라도 끌고 가셔야지요.”
나머지는 강을 건너는 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뷰엘이 이끄는 3개의 군단. 그 군단장들이 알아서 잘 지휘할 테니까.
“..... 뭐든 서두르는군. 전쟁은 그런 식으로 급하게 해서 될 게 아닙니다.”
“가르침은 한가할 때 하고. 적어도 지금은 급하게 할 때지요. 솔직히 이렇게 대화하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바로 움직이세요.”
더는 말하기 싫다며 막스는 뷰엘에게서 등을 돌렸다. 율리시스는 뷰엘을 슬쩍 쳐다보곤 어깨를 으쓱하며 막스를 따라갔다.
‘망할 동양인 새끼. 그 자리를 빼앗아주마.’
북군 총사령관 맥클레런이 자신을 서부 사령관에 앉혀주길 기대하며. 뷰엘은 휘하의 지휘관들을 소집해 진군을 명령했다.
“코린스까지 진격하라!”
*
5만에 달하는 뷰엘과 율리시스의 부대가 협곡을 따라 남하했다.
뷰엘을 채근하던 것과 달리 막스와 특수부대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들은 한 개 여단과 피츠버그 랜딩에 남아 천막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타닥, 타닥.
특수부대원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느긋하게 저녁을 먹었다.
무리에 섞인 고든과 흑인 노예들은 눈치 보며 음식을 오물거렸다.
대화는 적진을 침투했던 대원들이 이끌어갔다.
그중 제라드가 입에 침을 튀기며 말했다.
“아침 배식을 두 번이나 받을 때. 시발, 누가 날 빤히 노려보는 느낌이 드는 거야. 그래서 고개를 싹 돌렸더니. 보스가 배고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고.”
“너도 대단하다. 첩자 새끼가 아침을 두 번이나 처먹다니.”
대화를 주도한 제라드는 모닥불에서 자기 몫의 노릇노릇한 고기를 빼더니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괜히 밥을 두 번 먹었겠냐. 남군 새끼들의 식량 계획을 무너트리려고 그랬지. 아무튼, 그때 보스가 내 식판을 보는데 그 눈빛이 장난 아니더라고. 안 주면 총 쏜다, 그 느낌 알지?”
“알지. 그 눈빛. 보스가 먹는 거에 민감하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뭐. 식판 들고 냅다 튀었···!”
대원이 식히려고 들고 있던 고기가 어느새 막스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거 내가 30분 동안 구운 건데···요!?”
“뭐, 어쩌라고. 소금하고 후추는 쳤지?”
막스는 대원 눈앞에서 고기를 맛있게 뜯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대원은 속으로 시발시발거리며 다시금 생고기를 꼬챙이에 끼웠다.
대원들에겐 흔한 풍경이지만 고든과 노예들에겐 기이하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백인이 동양인에게 먹을 걸 뺏겨!?’
물론 저들의 관계가 그것만이 다는 아니겠지만,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고든이 부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 막스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너, 군인이 되고 싶다고 그랬지?”
“옙!”
고든의 대답이 우렁차다. 자기도 모르게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막스는 다른 노예들을 쳐다보며 의사를 물었다. 고든과 같은 생각인지 싶은지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이 반짝거렸다.
북군에 흑인 군인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서부 사령관.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눈빛에 서려 있었다.
“미안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해. 그리고 한 가지 묻자. 혹시 갈 곳이 없어서 군인이 되고 싶은 거야?”
사령관이 정곡을 찔러왔다.
탈주 노예들에게 무슨 목적지가 있겠는가.
이들에겐 당장 먹고 재워줄 곳이 있다면, 더구나 노예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애국심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으로 군인이 되려고 한다면 당장 때려치워. ”
‘그럼 뭐가 필요한 건데?’
흑인 노예들은 사령관을 빤히 쳐다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나 같은 동양인도 하는 걸 너희라고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지? 적어도 그런 마음은 있어야지. 어차피 조만간 흑인 부대가 만들어질 테니까.”
“지, 진짜요?”
“내가 원하는 건 목적 없이 싸우는 노예가 아니라, 나름의 꿈이 있는 군인이다. 군인으로서 전쟁이 끝나면, 뭔가를 이루겠다는 꿈. 그게 있다면 내가 방법을 만들어 줄게.”
‘꿈···.’
지금껏 꿈이 없던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많아 생각이 안 날 지경이다.
자유인이 되어 여행도 가고 싶고, 헤어진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백인들에겐 쉽지만, 노예들은 좀처럼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런데 정작 탈출에 성공했더니 꿈은 두 번째 였다. 당장은 먹고 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군인이 아닌 평범한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그것 또한 구해줄 수 있다. 내일 아침까지 잘 생각해보고 답을 줄 수 있도록.”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면, 굳이 군인이 될 필요가 있을까?’
혹은.
‘노예들을 해방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저 동양인처럼 총을 들고 남군을 죽이고 싶다고.’
이제껏 선택권이 없던 노예들은 스스로 탈출을 결심했고, 이제는 미래까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까지 쥐어졌다.
그 결과가 어떻든.
달콤하고 행복한 경험이 아닌가.
고든과 동료들은 각자 생각에 빠진 채 말이 없었다. 자신의 꿈과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 남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닥불에 둘러앉은 대원들은 그들의 결정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막스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단순한 군인을 넘어 저들 중에서 SFBC 대원을 구하고 있음을.
다음 날.
아침 일찍 고든과 동료들이 막스의 캠프를 찾아왔다. 결심을 끝낸 듯, 눈빛이 비장했다.
“그래서 결심은?”
막스의 질문에 흑인들이 두 분류로 갈라섰다.
군인이 30, 나머지 13명은 평범한 민간인을 택했다. 고든은 군인의 선두에 서 있었다.
막스는 함께 적진에 침투했던 필드와 제라드를 불렀다.
“너희 둘이 이 30명을 맡아 훈련 시켜. 어떻게 할 건지 계획표 작성해서 가져올 수 있도록.”
“옛 썰!”
“나머지 13명은 이번 전투가 끝날 때까지 부대의 허드렛일은 한다. 지금 테네시와 미주리주 어디를 가더라도 개죽음당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