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다.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우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터. 그걸 알기에, 직책이 바뀌어도 율리시스와 막스의 관계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날 저녁.
막스는 지휘소에서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소장만 다섯, 준장이 여섯이다.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막스는 율리시스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서부 사령부를 테네시의 멤피스로 이전하세요. 여기서부터 그랜트 장군께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미주리주를 시작으로 막스는 텍사스, 켄터키에 이어 테네시까지 손에 넣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이제는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와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만들어갈 차례였다.
회의가 끝나고 막사로 돌아오자 특수부대원들이 막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치가 무슨 말을 했는지, 불만 대신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백악관 입성을 축하드립니다, 보스!”
“가서 눈빛으로 조져주고 와요!”
“신문사 새끼들도 좀 족치고!”
다들 대통령의 초청을 커다란 보상으로 여기는 듯했다.
실제론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뭐, 상관있나.’
대원들이 기뻐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모든 걸 아는 피치도 그런 의도로 소문을 냈을 테니까.
이날 밤.
모닥불에 둘러앉아 나름의 파티를 벌였다.
아직 노예티를 벗지 못한 흑인들은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었고, 대화는 대원들이 주도해갔다.
“근데 보스. 워싱턴에 간 적 있어요?”
“있겠냐? 동부는 한 번도 안 갔을걸?”
피치 말에 대원들이 맞장구를 쳤다.
“뭐야. 캔자스 촌놈이었어?”
“보스한테 촌놈이라니. 시골뜨기라고 하자.”
막스는 지랄하지 말라며 소리를 높였다.
“내가 살던 곳은 초고층 건물에 100층 넘는 빌딩도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전쟁터에서 어째 뻥만 늘었어.”
“모르지, 조선에는 있을지.”
“아, 그 죽어야만 가는 조선 헤븐?”
낮의 일 때문인가. 또다시 피치가 빈정거렸다.
“난 조선이라는 말 안 했는데? 조선에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갑자기 왜 이래? 세계 최강 테크놀로지 국가라면서?”
“내가 언제.”
‘그동안 조선을 너무 팔아먹었구나.’
막스의 목소리가 작아질수록 대원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놀려댔다.
그리고 그 줄이 끊어질 즈음.
막스의 눈빛에 살기가 감도는 때, 막내 코디가 끼어들어 화제를 전환했다.
“보스, 이번 워싱턴엔 누구랑 같이 갈 거예요?”
- 후, 좆될 뻔.
- 코디가 눈치는 빨라.
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막스가 피치에게 속삭였다.
“뉴욕이 워싱턴하고 가깝던가?”
‘뉴욕?’
갑자기 자신의 고향이 튀어나오자, 피치가 막스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 속삭이듯 말했다.
“하루면 충분하지. 뜬금없이 뉴욕은 왜?”
“왜긴.”
‘허락 맡으러 가야지.’
막스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진 않았다.
딱히 허락이 필요할까 싶지만.
한 번쯤은 피치가 살던 곳이 궁금하긴 했다.
그곳이 악명 높은 뉴욕의 빈민가 파이브포인츠라면 더더욱.
“왜 혼자 웃는 건데?”
“그냥.”
귓속말이 아니꼬운 대원들이 비난을 퍼부었다.
“뭐야, 대장 표정 왜 저래?”
“둘이 귓속말하기 없기!”
“SFBC 연애 금지 아냐? 커플은 총살이라며!”
다음 날.
막스와 피치는 대원들의 배웅 속에 워싱턴으로 향했다.
< 워싱턴으로 가는 길 >
코린스는 소장으로 진급한 셔먼이 주둔하고, 율리시스는 서부 사령부를 세우기 위해 멤피스로 이동했다.
막스와 피치는 코린스 역에서 일리노이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테네시 멤피스를 시작으로 그랜드 정션과 코린스를 거쳐 일리노이로 향하는 길은 꽤 험난한 여정이었다.
테네시와 켄터키가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남부 연합이었고 코린스 역시 미시시피주기 때문에 게릴라 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기차에 군인들이 꽤 많네.”
“내가 얼마 전에 지시했거든.”
테네시주와 켄터키를 점령한 막스는 빠르게 남부의 그림자를 제거하고 북군으로 채워 넣었다. 기차의 경우 물자 수송과 승객 보호를 위해 스무 명의 북군이 탑승한 상태였다.
물론 그들은 서부 사령관이 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느리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광. 이를 만끽하던 피치가 주섬주섬 뭔가를 뒤적거렸다.
“출출하지? 이럴 땐 이걸 먹어줘야 해.”
역시나 감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껍질까지 벗겨서 막스에게 건네줬다.
“...... 물은 있는 거지?”
“감자 먹다 죽으면 큰일 나지. 다 챙겨왔어, 걱정하지 마.”
전쟁터를 벗어난 둘만의 오붓한 여행.
그래서인지 피치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막스가 스카프를 내려 감자를 먹을 때, 건너편에 있던 꼬마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동글동글한 눈과 작은 입이 커지더니 이내 같이 있던 아빠를 쳐다본다.
“우리랑 얼굴이 달라.”
“음?”
아빠의 시선이 아이를 따라 막스를 향했다.
동양인을 발견한 그는 코끝을 찡그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딸 아이에게 속삭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대충 동양인에 대해 설명하는 듯했다.
중요한 건 듣고 있는 아이가 덩달아 인상을 찡그렸다는 거. 딱히 좋은 말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과일과 땅콩, 샌드위치 있어요! 이틀 전에 나온 따끈따끈한 멤피스 트리뷴 신문도 있습니다!”
소년 열차 판매원이 좁은 객실 통로를 오가며 물건을 팔았다. 바퀴 달린 수레가 지나갈 즈음, 감자를 먹던 막스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채 물건을 주문했다.
“땅콩하고 따끈따끈한 신문 좀 줄래?”
“45센트입니다!”
“1달러 채우게 샌드위치랑 달걀도 줘.”
“감사합니다, 손님!”
“내가 싸 온 감자가 마음에 안 들었냐?”
피치의 눈초리를 피해 막스는 먹거리와 신문을 건네받았다.
“신문이 식었군.”
“......네?”
“농담이야.”
아재 개그를 이해 못 한 소년 판매원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금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피치는 막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애들 상대로 농담하고 싶냐?”
“이틀 전 나온 신문이 따끈따끈하다잖아. 나를 우롱한 거라고.”
“아무튼, 달걀 좀 줘 봐.”
“솔직히 너도 감자는 물리지?”
“전혀.”
막스는 피식 웃으며 삶은 달걀을 들었다.
그러다 또 한 번 꼬마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먹고 싶은지 눈을 똥그랗게 떠서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먹고 싶구나?’
아빠한테 사달라고 하렴. 어차피 동양인의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텐데.
막스는 보란 듯이 달걀을 한입에 쏙 집어넣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아이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 피치가 어이없다며 혀를 찼다.
“너도 엔간하다.”
피치는 아이를 달래려 달걀을 손에 쥐어 줬다.
아름다운 백인 미녀 피치가 상냥한 미소까지 지어주자 아이는 금방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는 아빠를 쳐다봤다.
잠시 고민한 남자는 피치에게 고맙다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막스를 힐끔 쳐다보는 게 왜 둘이 같이 있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백인 미녀를 납치한 동양인쯤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킹콩의 기분을 알겠군.’
막스는 입으로는 땅콩을 오물거리고, 눈으로는 신문을 훑어갔다.
신문의 논조는 중립을 유지하려는 듯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남부 연합을 옹호했다.
신문 일 면에는 남부의 여느 신문처럼 동양인 서부 사령관과 존 브라운 대통령의 비난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신문 보면 우울하지 않아? 여행은 즐거워야지.”
딱히 우울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다. 막스가 신문을 넘기자 얼마 전 벌어졌던 해전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주요 항구를 빼앗긴 남부 연합, 해상 물류 수송 길도 막혔다!]
피츠버그 랜딩에 이목이 쏠려 있을 때, 막스는 해군과 육군을 활용해 이중 작전을 펼쳤다.
목표는 루이지애나주 미시시피강 하구의 뉴올리언스.
남부 연합의 가장 큰 도시이자 미국에서 손꼽히는 항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해군은 뉴올리언스로 향하는 관문 두 개를 공격하고, 육군 1만 8천 명의 병력이 이를 지원하며 전쟁을 벌였다.
그렇게 보름이 넘는 교전 끝에 북군은 뉴올리언스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결과로 남부 연합은 해상으로 들어오는 물자 수송이 끊기고, 국제적으로 고립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야 아나콘다 작전의 틀이 갖춰지는군.’
해상과 육상을 봉쇄하여 남부 연합을 아사시키는 전략. 이는 퇴역한 북군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이 제안한 ‘아나콘다 작전’의 주요한 계획 중 하나였다.
해가 진 저녁.
테네시의 내슈빌을 지나 녹스빌 역에 도착할 즈음. 객실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수의 군인이 진입했다.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통로를 지나쳐 앞칸을 향해 나아갔다.
게릴라들의 열차 습격 사고가 끊이질 않는 시기. 승객들은 군인들의 행동만 보고도 술렁거리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얼마 후. 역에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기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녹스빌에 도착하려면 아직 더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듯 갑자기 멈추는 건 필시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동요하는 승객 중 일부는 앞칸으로 이동하며 상황을 살폈다. 막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딸을 재우며 불안한 듯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덜컥.
상황을 살피러 앞칸에 갔던 승객이 문을 열고 소리쳤다.
“남군의 게릴라들이 녹스빌 역을 습격했답니다!”
“게릴라!?”
객실에 혼란이 찾아왔다.
자칭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으며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군인들이 있으니까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기차를 멈출 이유가 있겠습니까?”
“곧 밤이 될 텐데, 여기서 습격이라도 당하면 어쩌죠? 주변이 허허벌판인데 어디로 도망치겠어요.”
이미 몇 차례 게릴라에게 습격당한 기사를 본 적이 있어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상황을 곱씹던 피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너를 노린 건 아니겠지?”
막스는 주섬주섬 풀어헤친 장비들을 챙기며.
“글쎄. 일단 확인해봐야겠지.”
“같이 가.”
피치도 서둘러 무장 상태를 점검했다.
철컥철컥 소리가 나자 딸을 재우던 남자의 시선이 둘을 향하고.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치가 좌석 귀퉁이에 세워둔 검은 천에 손을 가져다 댈 때였다.
군인 몇 명이 객실로 들어왔다.
“게릴라들이 녹스빌 역을 점령했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군이 놈들을 처치할 때까지 동요하지 마시고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녹스빌에 주둔 중인 북군이 있습니까?”
“테네시 동쪽은 아직 점령하지 못한 걸로 아는데요?!”
실제로 테네시 동쪽은 애팔래치아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북군이 점령하는 데 애를 먹는 지역이었다.
전쟁 중이라 승객들은 신문을 가까이했고, 그 결과 정보에 빠삭했다.
대충 얼버무리려 했던 군인들의 얼굴에 당황과 짜증이 묻어났다.
“방금 한 말 못 들었습니까? 괜한 말로 소란 일으키지 말고,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세요.”
“지시는 무슨! 확실하게 대답을 해줘야, 맘 편하게 있을 거 아뇨!”
“확신은 뭔 확신이야. 그냥 기다리라면 기다릴 것이지.”
총을 꺼내든 군인들은 강제로 승객들을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이때.
태연하게 남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찡그린 군인들은 이내 둘의 무장 상태를 보곤 헛숨을 들이켰다.
보기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지 않은가.
반사적으로 총구를 겨누려 할 때.
막스가 귀찮은 듯 스카프를 풀어 헤쳤다.
“서부 사령관이다.”
“!”
적어도 군인들에겐 막스의 얼굴이 곧 신분증이었다.
“책임자한테 안내해.”
율리시스에게 권한은 넘겼으나, 아직 임명장은 나오지도 않았다. 여전히 막스는 서부 사령관이었다.
승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막스와 피치는 군인들을 따라 앞칸으로 이동했다.
*
“남부 연합의 깃발을 든 게릴라들이 역에 들이닥쳤습니다. 대략 30명 정도 되고요.”
남자는 녹스빌 역의 역무원. 철로를 손보던 중, 게릴라들이 나타나자마자 말을 타고 도망쳤다고 했다.
상황을 들은 막스는 군을 지휘하는 소대장을 쳐다봤다. 계급은 소위, 전투 경험이 전무한 신입 장교다.
“그웬 소위는 당장 연락병을 내슈빌로 보내도록. 거기서 전보를 쳐서 멤피스까지 이 사실을 알려.”
막스가 지시를 내리지만 그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빛은 몽롱하고, 흥분되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사령관이 직접 지시를 내리다니!’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지 고작해야 두 달.
서부 사령관의 전술과 전략으로 가슴이 뜨거워진 사관생도가, 채 식기도 전에 그 주인공을 만난 것이다.
“정신 안 차리나, 그웬 소위.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연락병을 내슈빌로 보낸 그웬은 막스 옆에 찰싹 붙어 따라다녔다.
기관장에게 다음 기차 시간대를 파악하고, 거리와 지형 정보까지 수집.
“내가 알고 싶은 건 녹스빌 다음 역들의 상황이다. 그걸 알려면 방법은 하나. 녹스빌 역의 탈환이다.”
“기, 기다리는 게 아니고요?”
“내슈빌에서 오려면 최소 이틀이야. 그때까지 기차에서 기다리는 건 말이 안 되지.”
막스는 그웬 소위와 기관사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런 다음 피치와 함께 역무원이 타고 온 말에 올라탔다.
“기차도 같이 타고, 말도 같이 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