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브라운이 언급한 두 가지의 공통점은 자본가들의 사업과 관련된 일이다.
그런데 이걸 보류하고 있으니 그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나와 자네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정권을 계속 유지해야 하네. 재선을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하네.
존 브라운이 막스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인 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이제 슬슬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는 행동도 취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여기서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존 브라운의 재선 목적은 궁극적으로 노예 해방을 강력하게 법제화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막스는 여러 가지를 아우르기 위해 자신의 사람으로 워싱턴을 채우려 했다.
대륙횡단철도와 홈스테드 법은 인디언의 영토와 그들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고.
막대한 이권이 개입된 사업. 인디언과의 공존, 사업 이권을 모두 잡으려면 자본가들이 지칠 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들이 적당한 타협을 할 때까지.
윌라드 호텔.
막스는 존 브라운과 나눈 이야기를 여과 없이 피치에게 늘어놓았다.
이를 듣고 있던 피치는 조선의 개항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콜린한테 들었는데, 어우 뭐, 캔자스보다 더 깡촌이라며? 그런 곳에서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이 나올 수가 있는 거야?”
“...... 두 살쩍이었지 아마. 내가 천재라는 걸 깨달은 게.”
“개소리하지 말고.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사는 하이테크놀로지의 지상 낙원이라며. 콜린 말 들어보면 외국인 보면 돌 던지겠다던데. 총도 없어서.”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막스를 빤히 쳐다본 피치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너한테 조선은 뭐야?”
“응?”
“강제 개항 당해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도와야 할 그런 거야?”
“흠.”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막스에게 조선이란?
전생과 현생 통틀어 태어난 곳이자, 뿌리.
그런데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솔직히 지금까지는 미국에서 기반을 닦고 뼈를 묻을 각오로 살아왔기에 조선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만약 이번 일로 인해서 엮이게 된다면?
분명 포지션을 정해야 할 텐데. 애국심으로 움직이기엔 조선은 너무 멀다.
거리도 마음도.
21세기 대한민국을 살던 조유강에게 조선을 향한 애국심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고난 끝에 선진국이 된다는 걸 알기에 뭔가를 해야 할 당위성도 느끼지 못했다.
“피치, 너한테 아일랜드는 뭐야?”
“내 조국이자 아름다운 산과 강이 있는 고향이지. 그리고 잉글랜드에 나라를 빼앗기고, 먹을 게 없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불쌍한 나라기도 하고.”
“그럼 잉글랜드는 어떻게 생각해?”
“망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통합해 작금의 영국을 만들어냈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강력한 영국이 망한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나라가 강력하기 전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일본은 막부 말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과는 오십보백보다.
일종의 강력한 동기부여랄까.
조선을 위해서라기보다 일본을 무너트리는 데 초점을 두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막스가 생각하는 역사에서 일본은 악의 축이었다.
‘이득을 챙기면서 일본을 억누를 방법.’
그걸 찾아야 한다.
막스가 생각을 정리하는 때.
“오후엔 뭐 할 거야?”
“거기 가야지. 프리덤 에코.”
막스가 워싱턴에 만든 신문사.
자기 회사지만 아직 가본 적은 없다.
“오후는 그렇고. 그럼 내일은?”
“내일? 파티한다던데.”
“파티이이이? 무슨 파티?”
피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대통령이 준비한 거야.”
“파티라니···.”
“그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이냐?”
피치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옷 사러 가자!”
“......응?”
“프리덤 에코는 옷 사고 가자!”
“너 파티 좋아했어?”
“당장 나갈 준비나 해.”
그렇게 피치의 손에 이끌려 양장점을 향했다.
그곳에서 정장 치수를 재고 마음에 드는 코트와 슈트, 조끼, 구두까지 구매했다.
“내일 아침까지 꼭 만들어줘야 해요!”
피치는 힘든 일을 끝낸 듯 활짝 기지개를 켰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왜 또? 뭐 더 살 거 있어?”
피치가 막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자기 것만 살라고 그러네. 내 드레스 사러 가야지.”
“!”
막스는 여성 옷을 파는 가게로 끌려갔다. 그런데.
“뭐야, 벌써 고른 거야?”
“예쁘다며. 그럼 됐지 뭘.”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네.’
막스가 걸치는 건 엄청 신경 쓰더니, 정작 자기건 대충 선택했다.
들어오자마자 눈에 띄는 걸 입어보더니, 그걸로 결정해버렸다.
“난 아무거나 걸쳐도 예쁘잖아. 그리고.”
피치가 막스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인다.
“너만 멋있으면 돼.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
“뭐야, 그 미소는? 당장 결혼하고 싶어 하는 눈빛인데?”
“...... 밥이나 먹으러 가자.”
생각보다 쇼핑이 일찍 끝났다.
막스와 피치는 가까운 식당을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둘이서 오붓하게 레스토랑이라니, 진짜 여행하는 것 같다. 그치?”
피치가 콧노래를 불며 걷는 동안 막스는 ‘프리덤 에코’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펼쳤다.
“저기가 좋겠다.”
식당 간판에는 올드 에빗 그릴(Old Ebbitt Grill)이라고 쓰여 있었다.
둘이 그곳을 들어가려 할 때, 옆에 있는 계단에서 일단의 무리가 내려왔다.
그들을 힐끔 쳐다보던 막스의 눈이 커졌다.
피치가 왜 그러냐며 고개를 돌리더니,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이게 누구예요!?”
“피치 양! 설마, 막스?”
“오랜만입니다.”
막스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 둘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프리덤 에코’에 있는 윌슨 섀넌, 데이비드 러셀이었다.
옆에 처음 보는 남녀 한 쌍은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는데, 직원으로 보였다.
막스가 윌슨 섀넌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사무실을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설마 여기에요?”
“맞아. 하숙집이었는데 꼭대기 층을 개조해서 사무실로 임대했거든. 내가 편지에 쓰지 않았나?”
윌슨의 말에 막스가 뺨을 긁적였다.
‘그동안 사건 사고가 좀 많아야지.’
막스와 윌슨이 대화를 나누던 때, 멀뚱거리던 남녀가 데이비드 러셀에게 물었다.
누구냐고.
“아. 둘은 처음 보겠구나. 어차피 직원들한테도 소개해야 하니까. 다시 올라가죠!”
러셀이 앞장서고 일행들이 다시금 계단을 올라갔다.
*
"어서와, 회사는 처음이지?"
윌슨 섀넌이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워싱턴 DC의 프리덤 에코 사무실 직원은 21명.
“자자, 모여보세요! 오늘 아주 귀중한 분이 오셨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직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막스와 피치에게 고정되었다.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뭐라고 하죠?”
데이비드 러셀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프리덤 에코는 막스가 지분 전부를 갖고 있지만, 사장인 사실은 숨기고 있었다.
인종 문제에 얽힐 수도 있었고 신문사와는 별개로, 타 기업체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병행해서였다.
“모두 반갑습니다. 막스 조입니다.”
막스가 어색하게 손을 들자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인사하는 게 정상으로 보이질 않았다.
“아, 버릇이 돼서.”
스카프를 벗자,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나서 반가워요.”
“호, 혹시?”
서부 사령관이 왜 프리덤 에코에 왔단 말인가.
직원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구석에서 한 남자가 쓰윽 튀어나왔다.
사무엘, 아니 마크 트웨인이었다.
“내 필명 어땠어?”
“별로. 막스 트웨인으로 하지 그랬어.”
“워워. 그건 아니지. 마크 트웨인은 깊은 뜻이 있다고.”
막스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어줬다.
직원들은 다시 하던 일을 하는데, 막스를 힐끔거리는 게 의문이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다.
서부 사령관의 방문은 확실히 뜬금없는 일이었다.
섀넌이 막스에게 물었다.
“모처럼 대화 좀 나눠 볼까?”
“그래야죠. 근데····.”
‘밥은 언제 먹나.’
싶을 때. 눈치 빠른 피치가 말했다.
“식당에서 뭣 좀 사 올게요.”
“같이 가죠, 피치 양. 나도 점심은 아직이거든요.”
마크 트웨인이 피치를 따라갔다.
막스와 섀넌, 러셀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
“내일 파티에 초대됐다고요?”
막스의 말에 섀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사에도 올 거야. 워싱턴하고 뉴욕에 있는 사업가들까지 온다던데.”
말은 안 했지만, 막스는 존 브라운의 뜻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서부 사령관이라는 직위가 해제되기 전, 막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내일 파티엔 나와 마크가 갈 예정이야.”
“데이비드가 안 가고요?”
“저는 일이 있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데이비드 러셀이 말을 이었다.
“예전에 등유 형태의 정제유를 판매하는 회사를 찾아보라고 하셨잖아요? 그중 두 군데가 괜찮아 보여서, 만나러 가볼까 하거든요.”
“회사 이름은?”
“하나는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왐수타 오일 회사고, 다른 하나는 클리블랜드에 있는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회사에요.”
‘록펠러!’
드디어 막스의 레이다에 석유왕 록펠러가 포착됐다.
남북전쟁 중, 어디에서 돈을 쓸어 담고 있나 했더니 클리블랜드에 있는 모양이다.
“어디부터 가볼 거야?”
“펜실베이니아부터 가볼까 하는데요.”
러셀의 말에 막스가 고개를 저었다.
“클리블랜드부터 가. 거기서 지분 관계랑 재정 상태, 동업 관계까지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다 알아봐.”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엘리베이터 만드는 회사 중에 오티스도 알아봐봐. 이건 직접 할 필요는 없어.”
데이비드 러셀은 다섯 명의 직원을 두고 기업 정보를 수집, 정리하고 있었다. 기자들도 정보를 가져오긴 하지만, 기업에 특화된 팀을 별도로 운영했다.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막스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피치는 왜 안 오냐. 배고파 죽겠는데.’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소식이 없다.
막스의 신경이 예민해져 갈 때.
사무실을 벌컥 연 직원이 소리쳤다.
“밑에 식당에 북군 총사령관이 떴대!”
“오오!”
“가보자!”
‘그래서 밥이 늦은 건가.’
막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회의를 중단시켰다.
< 북군 총사령관 맥클레란 >
[나는 이곳에서 새롭고도 이상한 위치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어.
대통령(Presdt)과 내각(Cabinet), 심지어 윈필드 장군(Genl Scott) 모두 나를 따르고 있거든.
마치 어떤 마법이 이 땅의 힘을 내게 모아주기라도 한 것 같아.
-중략-
만약 이 상황에서 내가 약간의 성공을 거둔다면 독재자가 되든 뭐가 되든.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나는 독재자가 되지는 않을 거야.
훌륭한 자기희생이지!
(Admirable self-denial!)
-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조지 맥클레란이 부인 메리 엘렌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연방의 국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다.
민간인 군사 지도자로서 존 브라운은 북군 총사령관에 해당한다.
반면 정규군으로서 실질적으로 남북전쟁을 이끄는 핵심 사령부는 서부와 동부로 볼 수 있다.
위치상 동부 사령부의 작전 지역은 버지니아 북동부를 기점으로 연방의 핵심인 워싱턴 DC까지 커버하고 있었다.
주요한 위치를 맡은 맥클레란은 복잡한 직함을 갖고 있었는데, 동부 사령관이자 포토맥 사령관인 동시에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프리덤 에코 회의실.
막스는 직원들의 열렬한 반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총사령관의 주둔지가 워싱턴인데, 얼굴 보기가 힘든가.’
신문에선 엄청 욕먹고 있다더니 막상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에 대해 윌슨이 웃으며 대답했다.
“최근 들어서 분위기가 바뀌었거든. 그동안 병력만 잔뜩 끌어모으더니 마침내 리치먼드를 공략하기로 했거든.”
“아, 그것 때문에 그런 거에요?”
맥클레란의 굉장히 늦은 출사표에 사람들의 기대감이 큰 모양이다.
물론 그사이에도 두어 번의 시도는 있었다.
그중 야심 차게 세운 얼반나(Urbanna) 작전은 워싱턴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