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360)

“내가 총에 맞은 적이 있었거든.”

“진짜? 어디에?”

“그 브로치에. 근데, 그땐 죽는 줄 알았어. 그리고 한 사람 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공교롭게도 총을 맞은 뒤에야 말끔하게 정리됐다.

게다가 브로치가 목숨을 구했으면 그걸 선물해 준 막스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냥 우연이지. 그냥 죄 갖다가 붙이는구나.”

“너도 총 맞으면 알게 될 거야.”

“미친, 그게 할 소리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끝에 케이트가 피치에게 물었다.

“뉴욕에 가면 동생들을 데리고 나올 거야?”

“아니. 막스에게 짐이 되긴 싫어.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지.”

“냉정하긴. 뭐,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케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가거든, 막스를 집에까지 데려가진 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잖아.”

“글쎄. 내 말을 들을지 모르겠네.”

“뭐야, 너 혼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총에 한 번 맞아 볼래?”

달이 훤히 비치는 옥상. 피치와 케이트는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에야 헤어졌다.

*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막스는 호텔과 백악관, 프리덤 에코 사무실을 오가며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밤이면 어김없이 콜린과 대원들이 호텔로 찾아왔다.

“보스도 남자다. 우린 피치를 지켜야 한다고.”

“그럴 필요 없다고, 멍청이들아!”

피치가 화를 내도 대원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절대 둘만의 시간은 허락할 수 없다며 아침이 되어서야 호텔을 벗어났다.

워싱턴을 떠나기 전날.

콜린이 무기 상인에 관한 정보를 가져왔다.

외교관과 무역상들이 보내온 단편적인 정보들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내용에 따르면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는 일본에 ‘글러버 상회’를 설립하였는데 정식 명칭은 ‘자딘매시선 나가사키 대표부’였다.

막스가 읽는 동안 콜린이 설명을 첨가했다.

“자딘매시선이 뭔가 해서 알아봤지. 그랬더니 영국에 본부를 두고 홍콩에 설립된 동인도 회사가 모체더라고.”

“그 자딘매시선이 홍콩에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거네.”

“어. 그걸로 돈을 엄청 긁어모은 거지.”

정보를 추려보면 무기상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러버는 군산복합체의 일본 지부장쯤 되는 위치였다.

군산복합체란 정부와 군, 방산업체를 아우르는 구조를 말한다.

지금의 막스가 군산복합체로 탈바꿈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직은 연결 고리가 약하지만, 어쩌면 이미 그 체계를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일본을 두고 미국과 영국이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지면 좋겠는데.’

이 시기의 영국은 미국의 앙숙이다.

1776년 독립전쟁, 1812년 미영 전쟁을 거치면서 양국은 최악의 관계를 걷고 있었다.

‘계획을 세밀하게 짤 필요가 있겠어.’

미국의 내전이 끝나고, 다음은 일본 차례.

돈도 벌고 일본을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나저나, 내일 뉴욕으로 간다고 했지?”

“잠깐 들리려고요.”

콜린이 피치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가거든 갱단들 조심해. 얼마 전에 중국인이 살해되는 일이 있었다더라고.”

“중국인?”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 맞물려 뉴욕에도 소수의 중국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태평천국운동과 아편 전쟁을 피해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흘러들어온 부류였다.

“뭐, 보스가 당할 리는 없겠지만 거긴 또 서부와는 다르잖아. SFBC도 없고.”

막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슬쩍 피치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원들이 하나둘 잠이 들고, 피치가 조용히 막스에게 다가왔다.

“그냥 뉴욕에 가지 말자.”

“왜?”

“다음에 가고, 집으로 돌아가자.”

“집?”

“나한테는 서부가 집이야.”

피치가 막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콜린의 말을 들어서인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막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뉴욕에 가는 건 꼭 너 때문은 아니야. 프리덤 에코 지사도 있고, 프란시스 홀 회사에도 들릴 생각이니까.”

어디 그뿐인가. JP 모건의 회사도 뉴욕 맨해튼에 있다. 무기를 받아 프란시스 홀에게 넘겨줘야 했다.

“...... 그럼 잘됐네. 볼일만 보고 가자.”

“그럴 거야. 걱정하지 마.”

피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김이 빠지지만,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 날.

막스와 피치는 뉴욕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직선거리로는 대략 300km.

필라델피아에서 다시금 뉴욕까지 가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막스는 내내 기차 창밖만 바라보는 피치에게 말을 건넸다.

“곧 뉴욕에 도착할 텐데, 가이드 역할 좀 제대로 해 봐.”

“뭐가 궁금한데?”

“전부 다.”

“차라리 책을 사서 보는 건 어때?”

“노노. 네 입으로 듣고 싶어.”

피치는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뉴욕은 연방 통틀어서 인구가 제일 많아. 우리가 가는 맨해튼은 섬으로 되어 있고, 알다시피 금융회사들이 많아. 그리고 독일계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고.”

“네가 사는 곳은?”

“...... 월 스트리트와 가까운 곳.”

“그렇구나.”

피치가 막스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볼일만 본다고 했다.”

“알았다니까 그러네.”

뉴욕에 도착했을 땐 자정에 가까운 밤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손님들은 마차를 타거나 종종걸음으로 어둠 속에 사라졌다.

배낭과 천으로 싼 라이플까지 둘러멘 둘은 가장 가까운 호텔을 찾아 하루를 머물게 됐다.

모처럼 둘만의 시간이 되었지만, 피치는 피곤한지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막스는 홀로 창밖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잠이 들었다.

두 개의 침대를 두고 고민하다,

피치가 있는 쪽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뒤척이길 한 시간.

‘잠이 안 와.’

막스는 슬그머니 일어나 옆 침대로 이동했다.

살짝 눈을 뜬 피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끝낸 막스와 피치는 마차를 잡고 맨해튼의 남쪽 끝 월 스트리트로 향했다.

“시카고보다 훨씬 크네. 높은 건물도 많고, 사람도 많아.”

“촌놈 티 좀 그만 내세요. 창피하니까.”

마차가 지나는 도로와 그 주변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측으로는 5층 높이의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월 스트리트가에 있는 네이튼 호텔.

“방은 하나짜리 괜찮으세요?”

호텔 직원이 물었다. 피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도 하나짜리로 부탁해요.”

“......”

포터를 따라 객실로 이동했다.

막스와 피치는 무기를 침대 밑에 숨겨두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디부터 갈 거야?”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막스는 피치를 이끌고 호텔을 벗어났다.

길을 걷던 중 코너 끝에서 메이시 드라이 굿즈(R.H Macy Dry Goods)라는 백화점을 보게 됐다. 간판에 별이 새겨진 게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에도 존재하는 메이시스 백화점의 첫 백화점이었다.

“들어가자.”

“뭐 살 거 있어?”

“백화점이라잖아. 혹시 알아, 필요한 게 있을지.”

막스는 피치를 끌고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막스가 피치를 쳐다봤다.

“가족들에게 선물할 것 좀 사자.”

“...... 볼일만 본다며?”

“이게 나한테는 가장 큰 볼일이야. 피치의 가족을 만나는 거.”

둘의 시선이 한동안 교차하고. 피치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가는 건 가는 건데. 굳이 이런 거 살 필요 없어.”

“너랑 나랑은 다르지. 난 조선 스타일이니까.”

막스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피치를 재촉했다.

좋은 듯 싫은 듯 피치는 마지못해 옷가지를 골랐다. 주로 여동생과 남동생을 위한 것인데, 막스는 반강제로 부모님과 오빠들의 옷도 바구니에 담았다.

그렇게 잔뜩 쇼핑을 끝내고 피치를 따라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상당히 낡은 건물들을 지나는 동안 몇 명의 남자들을 마주쳤는데. 우울하거나 살벌한 인상으로 막스와 피치를 쳐다봤다.

스카프를 두르고 둘은 모자를 눌러쓴 채 빠르게 지나쳤다.

골목을 지나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모습을 보였지만, 피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판자촌 사이의 골목을 따라 들어갔을 즈음.

두 명의 건장한 청년이 도끼와 칼을 갈고 있었다. 콧수염에 내복을 입은 두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리고 막스와 피치를 본 순간, 두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왓더!”

“너, 설마 에밀리냐!?”

피치의 두 오빠는 뉴욕 파이브 포인츠의 명문 갱단 대드 래빗(Dead Rabbits) 조직원들이었다.

‘괜히 왔나.’

< 파이브 포인츠의 갱단 >

평범한 오빠들은 절대 칼과 도끼를 들지 않는다.

‘피치, 너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막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릴 때.

칼을 든 오빠가 막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누구야?”

“내 보스.”

“보스? 척,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냐?”

“어. 나도 그렇게 들었어.”

둘이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피치에게 다가왔다.

“기껏 공부해서 선생질 한다더니. 보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막스의 동공이 피치와 오빠를 번갈아 쳐다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차라리 남자친구라고 하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럼 더 큰일이려나.

막스는 여차하면 총을 뽑아야 하나 고민했다.

만약 쏜다면 어딜 쏴야 할까.

‘치명상은 피해야겠지.’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막스에 비해 피치는 외외로 침착하다. 오빠들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역시, 피치 가문의 피는 못 속이지. 언젠가 너도 우리의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랑스럽구나, 에밀리.”

‘!?’

갑자기 둘이 피치를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인다. 피치의 입에선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칼을 든 오빠가 막스를 힐끔 쳐다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피식 미소를 지었다.

“서부에서 큰 건 하나 터트리고 온 모양이군. 걱정하지마 친구. 여긴 안전하니까.”

스카프를 벗어도 된다는 말이었다.

막스를 쳐다본 피치는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뭐, 맘대로 해. 그나저나 갱단 규모는?”

“활동 무대가 어디야?”

두 오빠가 잇달아 질문을 던졌다.

피치가 질린다는 듯 짜증을 냈다.

“개소리 그만하고. 이쪽은 큰오빠 마틴, 이쪽은 척. 둘 다 정신 상태가 15살에 멈춰 있으니까 이해해.”

“뭐야, 그땐 18살이라며!”

“지금 척이랑 나랑 같은 취급 하는 거야?”

"형, 나도 기분 나쁘거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보면 남매들 사이가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막스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 막스다.”

“막스?”

순간 두 오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맥스가 아니라, 막스? 너, 설마 독일계냐?”

“진짜. 화 내기 전에 적당히 해. 집에 식구들은?”

피치의 말에 둘은 도끼와 칼을 다시금 내려놓았다.

둘째 오빠 척이 코를 훔치며 말했다.

“오늘 갱단 간에 회합이 있어서, 아버진 거기 가셨어.”

“...... 엄마랑 동생들은?”

“집에 있지. 근데 거기 손에 든 것들은 뭐야? 혹시 선물?”

“됐어. 몰라도 돼.”

쌀쌀맞게 대답한 피치가 막스를 힐끔 쳐다봤다.

“보스, 들어가자.”

두 오빠는 막스 옆에 찰싹 붙어 손으로 막스의 몸을 이리저리 눌러봤다.

“운동 좀 했냐? 몸이 아주 단단하네.”

“마침 손이 모자랐는데, 가서 진지하게 얘기 좀 해보자고.”

“고만하라 했다.”

“......”

허름한 2층 건물로 들어서고 계단을 올랐다.

전체적으로 지저분하고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낡아 있었다.

덜컥.

문을 열자 어디선가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틴이니, 척이니? 밖에서 빈둥대지 말고 홀리 씨 댁에 가서 감자 좀 가져오렴.”

“엄마, 누구 왔는지 한 번 봐봐요.”

“응?”

거실로 쪼르르 달려온 어딘가 피치를 닮은 여인. 그녀는 피치를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주걱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에밀리!”

이를 시작으로 방안 곳곳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두 오빠의 부인들과 아이들이 넷.

피치의 조카들이었다.

어디선가 갓난아이 울음소리도 들리고.

‘대체 여기에 몇 명이 사는 거야.’

충격적인 건 피치의 반응이었다.

“둘이 언제 결혼했어? 못 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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