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던 피치의 목소리가 잠겨올 때,
동생 둘이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에밀리 언니!”
“누나!”
8년이란 시간이 꽤 길었던 모양이다.
가족들을 본 피치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오랜만에 돌아온 에밀리의 환영에 이어.
스카프를 벗은 막스가 피치 가문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왓더 뻑!”
“여보! 애들 앞에선 욕 좀 하지 마요.”
“어, 어어. 그나저나 에밀리! 너 캔자스에 간다더니 캘리포니아에 간 거야?”
“갑자기 중국 갱단이라니, 이건 아니지!”
“갱단 아니라고!”
소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정점은 피치의 아버지가 왔을 때였다.
콧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190이 넘는 거구의 풍채가 막스를 노려봤다.
“흠.”
“......”
*
피치는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이 하는 일을 밝히지 않았다.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사실 딸이 다니는 회사 사장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처음에만 요란했지, 시간이 갈수록 가족들의 관심은 막스에게서 멀어졌다.
그저 피치가 데려온 손님에 머물렀다.
“아버지, 오늘 회합은 어땠어요?”
식사 도중 장남 마틴이 물었다.
감자수프를 먹던 아버지가 수저를 내려놓고는 입을 뗐다.
“곧 발표될 징병제 때문에 말이 많더구나.”
“아무래도 남부 연합을 따라갈 가능성이 크겠죠?”
남부 연합이 공표한 징병제를 살펴보면.
18세에서 35세 사이의 모든 백인 남성은 남부 연합의 부름을 받는 경우 무조건 응해야 하고. 기간은 3년, 이미 군에 있는 자들은 24개월을 추가로 복무해야 했다.
모든 백인 남성이라고는 해도 예외 조건이 있었는데. 20명 이상의 노예 소유주는 병역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연방은 노예가 없다. 그렇다고 과연 평등하게 적용할까?
“회의에서 누가 그러더구나. 3백 달러로 징병을 면할 수 있는 법안을 준비중이라고.”
“그게 말이 돼요!?”
“없는 놈들만 군대 가라는 소리잖아요.”
아버지의 말에 두 아들이 분개했다.
부인들의 얼굴도 이내 심각해졌다.
가장이 군에 끌려가면 돈은 누가 벌 것이며, 설상가상 죽기라도 하면 가족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막스는 묵묵히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존 브라운과 섬너 장관에게 징병제 수정안을 제안했지만,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이들을 보며 확신한 건. 돈으로 병역 면제를 갈랐다간, 원 역사에서처럼 대규모 폭동과 소요사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징병제는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자꾸나.”
“뭐, 그래야죠.”
“그나저나 대장장이 레디 그 자식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이참에 아예 담가버리는 게 낫지 않아요?”
“흠.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아버지가 슬쩍 피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입을 닫은 오빠들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집안이 갱단이라니.’
피치가 뉴욕을 떠나 캔자스로 온 결정적인 이유를 찾아낸 것 같다.
막스는 유레카를 외치며 감자를 오물거렸다.
그나저나 가족들에게 뭔가를 말하려 왔는데, 그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밤이 되었다.
여동생과 신나게 떠들던 피치가 막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위에서 얘기 좀 해.”
“위?”
놀랍게도 옥상이 있는 건물이었다.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이 널리고 사방이 막힌 듯 답답했지만 이야기하기엔 적당했다.
“이제 슬슬 가야지?”
“왜? 시간도 늦었는데, 자고 가자.”
“좁아터진 집에서?”
“누울 공간만 있으면 돼.”
피치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
피치가 진짜로 갈 생각이었으면, 옥상까지 와서 이야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좋든 싫든 집은 집이지.’
미소를 보인 막스는 아무런 말 없이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피치가 팔을 붙잡는다.
“물어볼 거 없어?”
“글쎄. 없는데?”
“진짜 우리 가족 얼굴만 보러 온 거야?”
“그럼?”
피치는 막스를 빤히 쳐다봤다.
‘그냥 나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거야?’
아니면 가족 따위 뭘 하든 상관없던가?
후자라면 막스의 냉정한 모습과 어울린다.
그리고 그쪽이 피치의 마음이 더 편할 것 같다.
집안이 개판이라 막스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긴 해.”
“말해 봐.”
“지금까지 번 돈. 집에다가 보낸 거 아니었어?”
막스 다음으로 SFBC에서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이 피치. 창립 멤버에 콜로라도 금광 주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모은 돈만 해도 족히 수만 달러는 될 텐데, 집은 왜 이대로인지 궁금했다.
“여동생한테 용돈을 조금 보냈을 뿐이야. 내가 번 돈을 줬어도, 아마 지금이랑 똑같을걸? 그놈의 아일랜드인이 뭐라고. 오지랖이 넓어서 여기저기 다 퍼줬을 거야. 아빠나 오빠들이나 똑같거든.”
‘그건가. 가족은 나 몰라라 하고 남 일에 발 벗고 나서는 거.’
“어릴 적에 제일 두려웠던 게 뭔지 알아?”
“......”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랑 오빠들이 죽고 없어지는 거야. 이 좁아터진 파이브 포인츠에선 하루하루가 전쟁이거든. 칼부림은 예사고 누가 죽었다는 소리를 지겹게 들으면서 컸어.”
피치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문득 이런 말이 하고 싶었다.
SFBC와 다를 게 뭐냐고.
우리는 진짜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고.
‘이런 말 하면 싸대기 맞겠지.’
지금 분위기상 그렇다.
막스는 피치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이 많았구나, 피치. 그리고 내일 말야. 아침 일찍 프리덤 에코에 갈 생각인데, 넌 여기에 있는 게 어때?”
“혼자 가는 게 편해?”
“어.”
“그럼 그렇게 해.”
다음 날.
막스는 피치를 집에 놔둔 채, 월스트리트 가에 있는 프리덤 에코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둘째인 척이 자신도 일을 나가야 한다며 따라나섰다.
지리에 익숙한 척이 안내를 해줘 사무실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 건물 3층일 거야. 나는 이 근처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시간이 남아서 좀 놀다가 들어가야겠네.”
“올라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갈래?”
척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덤 에코, 뉴욕 지부>의 직원은 대략 30여 명. 워싱턴과 더 큰 규모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직원이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모리스 디캠을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되어 있으신가요?”
“아마도요. 막스라고 하면 알 겁니다.”
‘아마도가 뭐니, 아마도가. 그리고 스카프는 왜 그렇게 두르고 있는 거니.’
“일단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여직원이 사라지고.
“저기 커피 마실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나 내려갈까?”
척은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때, 한 남자가 사무실 끝에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직원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막스 앞에 멈춰 선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모리스 디캠입니다! 혹시 워싱턴에서 오신···?”
“맞습니다.”
“오신다는 말씀은 부사장님께 들었습니다!”
프리덤 에코의 부사장은 윌슨 섀넌. 미리 전보를 쳐 막스가 온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이 분은.”
디캠이 척을 알아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왜 갱단 척 ‘햇쳇’ 피치와 같이 왔을까 의아했다.
“미안하지만, 척 이 친구에게 커피 한잔 부탁해요.”
“무, 물론입니다.”
디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막스가 척에게 말했다.
“회의가 길어질 거니까, 넌 천천히 커피 마시다 가.”
“어, 어. 알았어.”
척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회사 사장에게 초대된 기분이랄까.
막스가 지부장과 사라지고, 여직원이 금방 커피를 타왔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이거면 됐어요.”
척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프리덤 에코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회의실 안.
막스는 모건의 금융회사와 프란시스 홀에 관한 정보를 요청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서두르는 것보단, 정확한게 중요하죠. 그나저나."
막스가 디캠에게 넌지시 물었다.
“척에 관해 잘 알아요?”
“파이브 포인츠에선 나름 유명하죠. 형 마틴도 마찬가지고.”
“그럼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레드 ‘블러드 빌’ 피치야 뭐. 모르는 사람이 없죠. 데드레빗 갱단을 이끄는 세 보스 중 하나거든요.”
막스는 피치에게 묻는 대신, 디캠을 통해 가족의 정보를 알아냈다. 그런데 어디 평범한 가족인가. 디캠의 입에서 파이브포인츠 갱단 족보와 역사가 술술 흘러나왔다.
“전쟁이 발발하고, 파이브포인츠의 갱단들에 세대교체가 일기 시작했어요. 원인은 데드레빗과 보워리 보이즈, 이 둘 간의 전쟁이 무려 이십 년을 지속했기 때문입니다. 앙숙이거든요. 근데 피치 가문이 조금은 애매해요.”
"애매하다는 게 뭡니까?"
"포지션이 굉장히 뭐랄까."
디캠이 종이에 대고 뭔가를 긁적거릴 때.
회의실 밖에서 기자 한 명이 소리쳤다.
“데드레빗하고 신흥 갱단이 13번 가 뒷골목에서 붙었답니다!”
< 피치의 과거? >
막스는 회의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갱단 간의 싸움이라.’
이걸 굳이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입구에 있던 척은 언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갱들끼리 싸움이 붙었지만, 기자들은 서두르지 않고 여유로웠다.
디캠이 슬슬 막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너가 보기엔 기자들의 모습이 태만해 보이지 않겠는가. 더욱이 함께 왔던 일행은 데드레빗의 갱스터였다.
“잠시만요, 사장님.”
덜컥.
회의실을 나간 디캠이 기자 두 명을 부른다.
그리고는 당장 사건 현장으로 튀어가라며 으르렁거렸다.
다시 회의실 의자에 앉아서는 개운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사실 자잘한 싸움은 기삿거리가 안 되거든요.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구독자들도 지겨워하고요.”
어디 그뿐인가. 기사 내용에 따라 갱단들이 신문사를 찾아와 깽판을 치기도 했다.
“기사야 지부장이 알아서 하시는 거고. 아까 했던 말이나 마저 해보시죠.”
“아, 피치 가문의 포지션 말이군요. 이걸 설명하려면 일단 두 조직을 알아야 합니다.”
디캠은 족보를 정리한 종이를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이곳 갱단의 시작은 보워리 보이즈, 로치 가드라고 보시면 됩니다.”
초기 뉴욕에 정착했던 영국인들이 만든 갱단이 보워리 보이즈(Bowery boys).
감자 기근으로 아일랜드를 탈출한 이주자들이 만든 갱단이 로치 가드(Roach Guard)다.
“보워리 보이즈의 경우. 앵글로색슨족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죠. 그래서 비교적 안정적인 노동자 계급층이었습니다.”
반면 로치 가드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주민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갱단이었다.
보워리 보이즈는 보워리 지역에서 활동하고, 로치 가드는 파이브 포인츠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그 거리가 불과 몇백 미터밖에 되질 않았다.
굴린 돌이 박힌 돌을 빼내게 생겼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보워리 보이즈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아일랜드인을 공격했다. 여기에 대응해 로치 가드 역시 아일랜드인을 규합해 세를 불려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게 십 수년간 두 갱단의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죠.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로치 가드 역시 살인강도를 저지르며 지역 사회의 위험한 갱단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때 로치 가드 갱단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그중 세 명이 반기를 들어 만든 갱단이 바로 데드 레빗이었다.
이들은 얼마 안 가 로치 가드를 제거하고 파이브 포인츠를 평정했다.
“그런데 데드 레빗의 세 보스 성향이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한 명은 과격하고, 한 명은 굉장히 원론적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돈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고요.”
과격하다는 건 살인강도에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다. 돈과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건 갱단을 사업과 출세의 도구로 삼는다는 것이고.
여기서 확실한 건. 피치 가문은 절대 돈과 정치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거.
아니나 다를까.
“세 명의 보스 중 레드 블러드 빌 피치는 상당히 원론적인 인간입니다. 반드시 직업은 가져야 하고, 살인과 강도는 절대 금지거든요. 그리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만 허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갱단이 유지 됩니까?”
디캠은 좋은 질문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갱단의 목적은 아일랜드인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거니까요. 피치 가문은 그 목적에 충실한 거죠.”
“흠.”
막스가 생각하는 갱단의 이미지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피치의 집안은 의외로 정상이었다.
‘다행인 건가.’
들어보면 오히려 피치가 자신의 집안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정도였다.
막스가 팔짱을 끼며 생각할 때, 디캠이 말을 이었다.
“현재 데드 레빗에는 세 분류의 아일랜드인이 독립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키트 번즈를 중심으로 뭉친, 그야말로 갱단에 충실한 과격파.
피치 가문을 따르는 지극히 정상적인 온건파.
그리고 존 모리시를 따라 돈과 정치를 추구하는 권력파.
“평상시에는 독립적으로 있다가, 갱단 간에 전투가 벌어지면 합칩니다. 특히 보워리 보이즈가 공격하면 예외는 없습니다. 무조건 참전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갱단이 유지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건, 한번은 보워리 보이즈와 데드 레빗이 화해할 기회가 있었다는 겁니다.”
“화해요?”
디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