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360)

척을 응시한 빌리는 긴 탄식을 내뱉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하여간 에밀리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니까. 방해꾼 새끼들이 너무 많아. 시발!”

하늘에 대고 소리친 빌리는 이내 척에게 바짝 다가갔다. 도끼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휘두르지도 못할 거면서, 허세는. 에밀리가 돌아온 이상 쟤는 내 거야.”

“그랬다간 푸줏간에 네놈 고기가 걸릴걸?”

“하여간 그놈의 입은.”

비아냥거린 빌리가 고개를 돌렸다.

탐욕스럽게 피치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와 나 사이에 방해물은 없애줄게, 에밀리. 그리고 너. 한 번만 내 눈에 더 띄면 이스트강에 시체로 떠다니게 될 거야.”

“오라고 해도 못 오면서. 말로만 주절거릴래?”

막스의 말에 빌리의 볼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낄낄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곤 손을 흔들며 무리를 이끌고 골목에서 사라졌다.

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밀리, 너 괜찮은 거야?”

“보면 몰라? 근데 일하다 그렇게 나와도 돼?”

“다시··· 들어가야지.”

“그럼 빨리 들어가.”

“알았어.”

오누이의 대화는 이상하리만치 무미건조했다.

등을 돌린 척은 뭔가 생각난 듯 막스에게 말을 건넸다.

“내일이면 떠난다고 그랬지? 용감한 건 좋은데, 여긴 서부가 아니야. 가능하면 그때까지 돌아다니지 마라. 말만 하는 놈은 아니거든.”

“미안하지만, 내 계획이 바뀌었어.”

“뭐?”

막스는 척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 달은 있을 것 같거든.”

“뭐? 이게 애들 장난인 줄···.”

“오빤 신경 쓰지 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 에밀리. 예전하곤 많이 바뀌었어. 상황이 안 좋아졌거든.”

피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가서 일하라고.”

한숨을 내쉰 척이 골목에서 벗어나고, 막스 역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피치가 팔을 붙잡았다.

“나보고 다 말하라며. 이야기는 듣고 가야지. 디캠 지부장한테는 어디까지 들었어?”

“......”

피치는 막스가 회의실에서 나눈 대화가 무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막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너를 두고 다섯 명이 결투를 벌였다는 거?”

“나 장난 아니었지?”

“...... 방금 그 빌리란 놈도 그중 하나야?”

피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결투는 나설 용기가 없고, 빌리는 대신 나를 강간하려고 했어.”

“뭐?”

막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피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한 장소로 유인했는데, 충격적인 건 피치를 꼬드긴 게 오빠들이었다고 했다.

“그땐 지금보다 더 멍청했거든.”

갱단 간의 전쟁이 치열했고, 혈기 왕성한 오빠들은 미래를 위해 여동생이 강한 세력의 남자와 사귀길 바랐단다.

한 마디로 정략결혼을 통한 세력 불리기를 자기들끼리 계획했다는 말인데.

“아빠가 오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어. 그날 마틴과 척은 죽도록 맞았고.”

대신 빌리는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나 때문에 갱단끼리 전쟁을 벌일 순 없잖아?”

“...... 오빠들을 그냥 놔뒀어?”

“가족이잖아. 아빠와 나밖에 몰라. 뭐 시간이 흐르니까 괜찮아지더라고.”

빌리의 또 다른 별명은 대장장이 레디.

어젯밤 식사 시간 튀어나온 이름 중 하나였다.

현재는 데드 레빗과 동맹관계인 치채스터 갱단의 리더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막스는 피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날 믿는다면 이곳 일은 내게 맡겨.”

“나 때문에 하는 거야?”

“나 때문이기도 해. 참고로 손해 보는 짓 안 하는 거 알지?”

“응.”

‘어쩌면 이번엔 손해를 볼 것 같지만, 피치를 위해서라면야.’

막스는 피치와 함께 골목을 벗어났다.

“참, 예전에 스폰해 준 부인이 있다고 했었지?”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게 그 부인이야?”

“응. 이 근처에 살거든.”

“그럼 잘 만나고 와. 아 참, 오늘도 집에서 자. 늦게라도 갈 테니까.”

“...... 알았어.”

피치와 헤어진 막스는 월스트리트를 따라 한 회사를 방문했다. JP 모건이 일하고 있는 ‘던칸, 셔먼 앤 컴파니’라는 금융 회사였다.

*

“여기서 보니까 또 새롭네.”

모건은 유리창이 훤히 내다보이는 독립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책상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무기 선적은 다음 주면 준비가 될 거야. 그런데 너, 스미스 앤 웨슨하고 동업 관계더라?”

“그새 내 뒷조사하고 다녔냐?”

“궁금하잖아.”

모건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뉴욕에 오자마자 그는 막스의 뒤를 캤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게 스미스 앤 웨슨과 몇몇 제조회사들. 그런데 과연 이게 전부일까?

복잡한 지분 관계로 파악하는 게 힘들 뿐, 모건은 막스가 투자한 회사들이 분명 더 있을 거라고 여겼다.

“다섯 개까진 파악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우선 하나 묻자. 내 뒤를 캔 이유는? 대답 잘해야 할 거야.”

막스는 짐짓 살벌하게 모건의 눈을 응시했다.

침을 한번 삼킨 모건은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나와 사업을 하고 싶다며? 고객의 상황을 알아야 투자를 도와주지.”

“너처럼 뒷조사하다간 고객들이 다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

“노노.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어. 난 항상 이익을 안겨주거든. 사기꾼이 아니라고.”

모건의 말에 막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잘 넘어갔다 싶었는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웃지만 말고 너도 내 질문에 대답해야지. 무기 회사를 갖고 있으면서 나한테 총을 산 이유가 뭐야?”

“싸잖아. 6달러짜리 라이플이 어딨어.”

“젠장, 역시 그 이유였어.”

이 시기 최신식 엔필드 라이플의 단가가 14달러. 아무리 구식 라이플이라고 해도 6달러는 절대 구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내가 시간만 많았어도 절대 너한테 팔진 않았을 거야. 국내가 아니면 해외에 팔았을 거라고.”

“어쨌든 팔았으면 된 거지. 은근 뒤끝 있네. 그리고 고객이 왔으면 커피라도 좀 주던가.”

“하, 진짜 너 같은 동양인은 처음 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모건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 여직원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그런 다음 막스가 투자한 회사 목록이 적혀 있는 종이를 들고는 소파에 앉았다.

“무기, 화학, 제약, 의류. 아주 투자처가 다양하던데?”

“네가 보기엔 어때?”

“스미스 앤 웨슨 빼면 별로.”

막스가 투자한 화학회사는 듀폰, 제약은 화이자, 의류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라는 회사였다.

장기적 안목에선 탁월했지만, 모건의 말대로 단기 이익을 기대하긴 힘든 게 사실이었다.

“지금은 철도야. 무조건 거기에 투자하는 게 이익이라고.”

“난 그쪽은 잘 몰라. 새로운 노선이 생길 때면, 이미 투자 모금이 끝났더라고.”

“서부에 있으면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하지. 철도 같은 경우는 이미 있는 회사들을 노리는 게 좋아. 알지? 몇 년 전에 철도 사업 줄줄이 박살 난 거?”

모건이 말한 건 1857년 경제 대공황이었다.

당시 홀리데이의 철도 기획서를 먼지가 쌓이도록 만든, 철도 사업의 거품이 터지던 때였다.

미국 경제가 휘청이고 수많은 금융 회사와 철도 회사가 부도나고,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그때 막스는 콜로라도에서 금을 캐고 캔자스 로렌스를 번영으로 이끌었었다.

마찬가지로 모건은 경제 대공황으로 휘청거린 철도 회사의 지분을 인수하고 되파는 것으로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고 했다.

“지금도 그런 곳이 있어. 요즘 내가 눈독 들이는 게 있는데. 한 번은 들어 봤을 거야. 이리(Erie) 철도라고.”

“이리 철도?”

“뉴욕에서 펜실베니아 이리호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야. 그걸 일리노이 시카고까지 확장하려고 하거든. ”

이 사업에 뛰어든 사업가들의 면면이 화려했다. 근 시일에 철도왕의 왕좌에 오를 밴더빌터, 그와 비견될 제이 굴드, 월스트리트 금융계의 큰 손 다니엘 드류까지.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이어지는 중간에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가 있어. 위험하게 황금을 뭐하러 캐, 기차에서 황금을 만들어 내는데.”

“흠.”

사실 전생의 기억이 있다 한들 막스가 철도에 관해 전생에 무슨 지식이 있겠는가.

하지만 대륙횡단 기차와 딱 하나, 이리 철도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다.

‘이리 전쟁(Erie War)이라고 했지 아마.’

철도 회사를 손에 넣기 위한 전쟁.

이 치열한 싸움 끝에 천하의 밴더빌트가 제이 굴드에게 패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제이 굴드 역시 승리자는 아니었다.

결국 사기꾼에게 빼앗겼으니까.

그 때문에 철도는 자본, 정치, 갱단이 뒤범벅된 일종의 스캔들. 작게는 뉴욕 할렘을 관통하는 철도 역시 연관되어 있었다.

막스가 뉴욕에 온 목적 중 하나도 이리 철도와 관련이 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사업.

이리 철도는 잘만하면 돈과 인맥을 동시에 얻을 기회였으니. 정치 권력자들의 팔다리인 갱단을 제거하는 것 또한 해야 할 일이었다.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 막스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모건과의 첫 합작 투자인데다 이리 철도를 손에 넣기만 한다면 리스크 따윈 극복하면 그만이다.

“투자에 나도 끼워줘.”

“자금은?”

“십만 달러.”

“오케이!”

이후 막스와 모건은 무기 선적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구체적인 인도 시기와 자금 집행일도 결정했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되어 창문 밖으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저녁 먹으러 안 갈래?”

“뭐, 그러던지.”

모건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회사를 나온 뒤엔 맛집을 소개해주려 했다.

하지만 막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거기 가자.”

“뉴욕은 처음이라며?”

“이래 봬도 이틀 됐어. 제2의 고향이라고.”

농담이 통했는지 모건은 키득거리며 막스를 따라갔다. 그리고 둘이 향한 곳은 피치의 둘째 오빠 척이 일하는 식당이었다.

자리에 앉은 모건의 입에 미소가 그려졌다.

“여기 잘 왔네. 나도 자주 오는 데거든. 고기가 부드럽고 맛도 괜찮아.”

“다행이네. 그럼 모건, 네가 추천 좀 해줘.”

여종업원에게 모건은 으깬 감자가 곁들여진 스테이크와 맥주를 주문했다.

“호텔은 어디다 잡았어?”

“넬른이라고. 여기서 두 블록 뒤야.”

“거기 좀 위험한 곳 아니야? 파이브 포인츠랑 가깝잖아.”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마. 전쟁이 시작되고부터 더 개판이거든.”

프리덤 에코의 뉴욕 지부장이 말하길.

전쟁이 시작되고 갱단 내 다툼이 심해졌다고 했다. 뉴욕의 민병대가 전쟁터에 끌려가고, 치안에 공백이 생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갱단에 들어왔던 자들에겐 기회였다.

군대를 핑계로 탈퇴하기 시작. 인원 결손을 불러오고 갱단은 와해 혹은 흡수되어 버리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피치 가문의 데드 레빗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전쟁의 여파가 갱단을 뒤흔들고 있었다. 비교적 건전했던 조직원들이 피 끓는 열정과 무용담을 쌓으려 전쟁터로 향한 것이다.

그냥 놔둬도 피치 가문이 와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문제는 자연스레 도태되는 게 아닌, 흡수 혹은 말살되는 것이었다.

어찌 됐든, 전쟁이 갱단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했다.

막스가 모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징병제 되면 너도 군대 가겠네?”

“어이구, 큰일 날 소리 하네. 가면 최소 3년인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내 인생을 허비하라고?”

“그래도 부르면 가야지, 별수 있어?”

모르는 소리 말라며 모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쟁은 돈이야. 그런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 남부든 북부든 다 똑같아. 있는 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로 의무를 다하면 되는 거라고.”

돈이 있으면 돈으로, 없으면 몸으로 때우라.

모건에겐 당연한 논리였다.

하지만 상대는 군인인 막스다.

머쓱해진 모건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사령관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네.”

“나 사령관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전쟁터에서 싸우는 사람이 들으면 기분 좋을 리는 없겠지.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고.”

“괜찮다니까 그러네. 하하.”

웃음을 짓는 막스. 하지만 머릿속에는 훈련소에서 구를 모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190cm의 장신인 모건은 방패 들고 돌진하기에 딱이었다.

“그림 나온다, 나와.”

“뭐가? 무슨 그림?”

“그런 게 있어.”

잠시 후. 음식이 나오고, 맛은 모건의 말대로였다.

막스의 입맛에도 딱이었다.

머릿속에 또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구내식당에서 고기 손질하는 둘째 처남의 모습이랄까.

막스가 흐뭇한 얼굴로 식사를 즐길 때.

주방에서 나온 척과 눈이 마주쳤다.

모건을 본 그의 눈이 더욱 커졌다.

‘어떻게 그자를 아냐는 표정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척은 다가오는 대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맥주까지 마시는 바람에 식당도 곧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막스는 카운터를 쓱 지나치며 말했다.

“계산은 내가했다.”

모건의 눈이 똥그래졌다.

“미쳤어? 음식값을 네가 왜 다 내?”

“내 고향 전통이야. 친구나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대신 내기도 하거든.”

“왜? 뭣 때문에?”

“이게 정이란 거야, 정.”

“정?”

마음 같아선 초코파이라도 주고 싶지만, 있을 리도 없고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모건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며 물었다.

“야, 나도 돈 많거든?”

“지금은 내가 더 많아. 그리고 그거랑은 전혀 상관없다니까 그러네.”

“하, 내가 동양인한테 얻어먹다니.”

“나중엔 네가 사면 되지.”

“알았어. 하여간 진짜 신기한 놈이라니까.”

그새 거리감이 줄어들었는지 모건의 말투가 편해졌다.

식당 밖으로 나온 막스는 지나가는 마차를 세웠다. 이번엔 마부에게 2달러를 건네고 모건을 그 안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어어, 너 진짜!”

“조선 전통이야, 전통. 조심히 들어가라.”

모건은 뭐 이딴 놈이 있냐는 식으로 막스를 쳐다봤다. 기묘한 시선은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이어졌다. 모건은 갑자기 창틈으로 머리를 내밀어선 소리쳤다.

“막스! 내일 내가 밥 살게, 꼭 찾아와!”

“내일은 시간 없다.”

“그럼 모레 와!”

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차가 사라지고 몸을 돌리자 척이 서 있었다.

식당 벽에 등을 기댄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사업을 꽤 크게 하나 보다? 주니어스 모건 아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아직 JP 모건보다는 회사 사장인 아버지 이름이 더 컸다. 척은 모건을 그저 아버지 잘 만난 금수저로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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