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가족을 위해 산다면서, 가족에게 상처 주는 짓을 또 할 생각이냐?”
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조금은 우울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게야. 내게서 이런 점은 배우지 말아라.”
“......”
마틴과 척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가 개입한다고 무조건 치채스터와 전쟁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고 두려워한 마음이 컸을 뿐. 가족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가족을 희생시킨 모순된 행동이었다.
“마틴, 척. 가서 애들 집합시키거라.”
“...... 알겠습니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연한 눈빛을 마주한 피치.
감동을 해야 할 텐데,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맙긴 한데. 진짜 도와줄 필요 없어요.”
“에밀리, 현실은 그저 막연한 믿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란다. 만약 우리가 늦는 바람에 동양인 친구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기다리면 돼요.”
“그 동양인이 꽤 잘 싸우는 모양이구나.”
“최고죠.”
피치의 태연한 모습을 본 척이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제발 상황 파악 좀 해! 빌리가 지금까지 몇 명을 죽였는지 알아?”
“됐고. 그 사람의 의도는 대충 알 것 같아요.”
“의도?”
아버지의 질문에 피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제외하고 전부 무너트릴 생각이에요. 오늘이 그 첫 작업이고.”
‘전부 무너트려? 작업?’
아버지가 피치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은 정상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때 척이 목소리를 높였다.
“걔가 대체 뭔데 그러냐?!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그렇지! 혼자 맨손으로 말이 되냐고!”
“얼마 전까지 서부 사령관이었어.”
“그러니까, 서부 사령···!?”
순간 장내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피치 이마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던 아버지는 경직된 자세로 딸을 쳐다봤다.
척은 코웃음 치며 피치의 말을 부정했다.
“...... 얼마 전에 중국인 새끼가 서부 사령관 친구라고 주접떨다 죽었는데, 걔는 더하네. 요새 트렌드냐? 어?”
“흠.”
침음을 흘린 마틴이 갑자기 구석에서 감자 껍질이 수북이 쌓인 걸 바닥으로 쏟아냈다.
그리고는 밑에 깔린 신문을 탈탈 털어 빠르게 뭔가를 뒤적였다.
신문사를 확인한 피치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하필 프리덤 에코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동양인 이름이 뭐라 그랬지?”
“막스 조.”
마틴이 탁자 위에 신문을 쫙 펼쳤다.
그곳엔 워싱턴에서 훈장을 받은 서부 사령관, 막스 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왓더!”
척의 눈이 커질대로 커지는 때.
타앙!
파이브 포인츠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방향은 대장장이 빌리 레디의 아지트.
고작해야 두 블록 거리였다.
< NYPD >
뉴욕시 경찰국(NYPD).
이제 막 출근한 금발의 테론 경위는 입구에 묶인 코커스패니얼과 마주쳤다.
“왈! 왈!”
“얜 또 뭐냐?”
“중요한 용의자 겸 목격자 중 하납니다.”
“이 개새끼가?”
테론은 개소리 말라며 순경을 쳐다보고, 그는 놀란 듯 되물었다.
“아니, 간밤에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어제 일이 있어서 아침에야 뉴욕에 도착했어.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테론이 입구 안을 슬쩍 쳐다봤다.
출근하기 전인데도 동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들어가 보세요. 부국장님이 아까부터 경위님 찾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또 지랄지랄하겠구먼.”
테론이 쓴웃음을 지으며 코커스패니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개가 으르릉거리며 미친 듯이 짖어댔다.
“하여간 성격 지랄맞다니까.”
입구에 들어선 테론은 동료 경찰들과 건성건성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자리로 왔을 땐 팀원들이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뭔 일인가 싶어 사무실을 어슬렁거릴 때 부국장 사무실 안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건 현장에 몇 명 있다고 했지?”
“20명이요.”
“더 파견해. 증거 확실히 보존하고 조사관 출근하는 대로 테론이랑 붙여. 근데, 걔는 몇 신데 아직도 출근을 안 하냐?”
“곧 오겠죠. 아, 참. 용의자 심문은 어떻게 할까요?”
부국장 버겐이 미간을 찡그렸다.
“지가 얼마 전까지 서부 사령관이었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일단 신원부터 확인되면 그때 하자고.”
‘서부 사령관!?’
테론이 날아가듯 부국장 사무실로 몸을 날렸다.
“서부 사령관이 여기 있다고요?!”
“너, 어디서 엿듣다가 왔냐? 출근하면 바로 튀어왔어야지!”
“...... 그래서 바로 튀어온 건데요.”
“아아, 됐고. 넌 조사관하고 현장이나 다녀 와. 국장님하고 청장님한테 보고 해야 하니까, 대충하면 알지?”
부국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제 성격 아시잖아요.”
“아니까 하는 소리잖아!”
“근데, 우리 애들은 어딨습니까?”
“현장에 있습니다요, 테론 경위님. 쓰벌, 내가 너한테 이런 보고를 해야 하냐?”
큰 사건이 터질 때면 부국장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이럴 땐 무조건 수그리고 들어가는 게 상책이다.
테론은 비굴한 웃음을 남기며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에 앉기 전, 그는 동료에게 부탁해 간밤에 일어난 사건을 정리한 자료를 입수. 커피를 마시며 이를 훑어봤다.
[치채스터 갱단 학살 사건]
‘이 새끼들이 또 누굴 죽인 거야’라며 몇 줄을 읽어가던 때.
테론이 커피를 뿜어냈다.
‘이 새끼들···. 당한 거였어!?’
*
치채스터 갱단을 죽인 살인범.
그 용의자가 사건 직후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왔다. 그리고 진술하기를.
- 개를 찾다가 일이 좀 꼬였습니다.
개 때문에 갱단 25명을 죽여?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않은가. 경찰관들은 타국 땅에서 미쳐버린 중국인쯤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서부 사령관이었다고 밝혔지만,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다. 하지만.
‘나 테론은 믿는다. 그 자가 진짜 서부 사령관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거든.’
펜으로서, 테론은 용의자를 보기 위해 2층 심문실을 찾아갔다.
철문 앞에는 순경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안에 누가 들어갔냐?”
“아뇨. 부국장님이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테론이 슬쩍 창문 안을 들여다봤다.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있는 동양인 남자.
손목에는 얼마 전 개발되어 보급된 특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저자가 서부 사령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테론은 확신했다. 동양인으로서 서부 전선을 연전연승으로 이끈 주역이라는 걸.
테론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뉴욕 방위군에서 전략 전술을 공부한 군사 전문가였다. 비록 지금은 경찰관이 되었지만, 밀덕으로서 남북전쟁 전투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동안 여러 전투가 있었지만, 저자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
서부 사령관의 전술, 전략과 전투 능력.
그 찬란한 업적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테론은 열망에 찬 눈으로 순경들을 바라봤다.
“어째 경위님 눈빛이 불안 불안하네요.”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말야. 남군 사령관 알버트 존스턴하고 군단장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그거 한 번만 물어보면 안 될까?”
“제발 진정하세요, 경위님.”
“서부 사령관이 왜 뉴욕에 있겠습니까. 전쟁터에 있어야지.”
‘새끼들이 보는 눈들이 이렇게 없어서야. 머리도 나빠, 눈도 안 좋아. 에라이··· 응?!’
자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순간 동양인이 눈을 떠 테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묘한 미소와 함께 입으로 뭔가를 말하려 했다.
테론은 자세히 보기 위해 이마를 유리창에 붙여 서부 사령관의 입 모양을 해독했다.
‘내. 가. 어. 떻. 게. 죽. 였. 냐. 면···.’
“테론 경위님! 부국장님이 찾습니다!”
“안돼!”
서부 사령관이 입을 닫고 다시금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테론은 시발 거리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부국장은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덕분에 서부 사령관과의 대화를 뒤로 미뤄야 했다.
*
뉴욕시 경찰국과 사건 현장은 불과 500m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경찰국을 나온 테론은 조사관과 함께 현장을 방문했을 때, 주위는 온통 갱스터로 득실거렸다. 몸담은 갱단들도 가지각색이라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일단 현장의 목소리 좀 들어볼까요?”
“뭐, 그것도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지.”
테론의 제안에 조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인파에 묻혀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가장 목소리가 큰 건 피해 당사자인 치채스터 갱단원들. 그들은 적대 세력인 보워리 보이즈 갱단을 의심했다.
“보워리 개새끼들아! 니들이 그랬지!?”
“조까. 범인이 제 발로 경찰서 찾아갔다며. 근데 왜 우리를 의심해?”
“뭐, 자칭 서부 사령관이라는 미친 중국인 새끼? 그걸 누가 믿냐, 새끼들아. 니들은 죽었다고 생각해. 이 전쟁을 받아 주마!”
“허어, 병신. 그럼 누가 쫄 줄 아냐? 쪽수도 팍 줄었으면서. 큭큭.”
비단 두 갱단뿐 아니라, 치채스터와 엮인 갱단들도 서로를 의심하며 으르렁거렸다.
반면 관련 없는 갱단들은 나름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대장장이 빌리만 유독 잔인하게 죽였다던데. 누가 봐도 보복살인이잖아? 그럼 누구겠어?”
“찰튼 스트리트 갱이랑도 사이가 좀 나빴었지, 아마?”
“뭐, 걔들 뿐이겠냐. 빌리가 쓰레기 같은 짓을 좀 많이 했어야지.”
조사관과 테론은 수첩을 꺼내 이들이 언급한 내용을 메모했다.
“그나저나, 저 피치 놈들 사이에 있는 여자. 에밀리 아냐?”
“응?”
남자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한다. 테론과 조사관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들 사이에 낀 아름다운 여인. 테론은 그들이 데드 레빗의 피치가라는 걸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인을 두고 남자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저년 저거. 얼굴은 진짜 반반하게 생겼네.”
“오죽하면 빌리가 에밀리 왔다고 흥분했겠냐.”
“그럼 뭐해, 이제 시체 결혼식 하게 생겼는데.”
키득거리는 틈에 한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너네, 그거 아냐? 어제 빌리가 저년한테 찝쩍대려다 척 때문에 물러난 거?”
“그런 일이 있었어?”
“어. 근데 더 충격적인 게 뭐냐 하면.”
남자는 치채스터 갱단원으로 빌리와는 다른 계파였다. 하지만 정보만큼은 빠삭했다.
남자가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저년이 뉴욕에 올 때 남자를 데려왔는데. 그게 동양인이었대.”
“뭐어?!”
“와, 이건 또 반전인데? 그럼 피치 가가 이번 일에 엮였다는 거야?”
“설마. 서로 동맹관계인데 여자 때문에 그랬겠냐.”
테론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피치를 쳐다봤다.
‘서부 사령관과 함께 온 여자라.’
어쩌면 이번 사건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인물일 수도 있다. 테론이 피치에게 접근하려 할 때, 조사관이 말을 건넸다.
“이제 우리도 직접 조사를 해야지 않겠나?”
“아, 참. 그래야죠.”
경찰들은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시체를 치우지 않았다. 테론과 조사관은 용의자의 동선을 추적하며 사건 당시의 상황을 유추했다.
“범인은 골목에서 마주치는 갱단들을 칼과 맨손으로 상대했어. 그렇게 아지트까지 왔을 때 총 8명을 죽인 거지. 문제는.”
갱단들이 모여있는 아지트.
이곳까지 오는 동안은 그럭저럭 혼자 죽였다 쳐도, 아지트는 예외였다.
“17명이나 되는 갱스터를 어떻게 죽인 걸까? 이놈들도 분명 총을 들고 있었거든.”
조사관은 시체들과 그 주변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건 절대 단독범행이 아니네. 갱단 간의 전쟁이었던 게야.”
단순하지만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다.
혼자 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과연.’
테론은 검게 그을린 바닥을 주목했다.
손가락 바닥을 쓱 훑자 검은 게 묻어났다.
게다가 냄새는 발화한 흑색화약이었다.
흔적이 오래되지 않은 걸로 봐선 사건 당시에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특수무기다!’
아쉽게도 그게 뭔지는 모르나 확신이 들었다.
용의자가 서부 사령관이라는 가정하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조사관은 같은 흔적을 살폈음에도 다른 결론을 내렸다. 그는 애초에 서부 사령관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아니, 믿었다 해도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
“서부 사령관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네. 전쟁에서 승리한 건 휘하의 장군들이 훌륭해서였던 게지.”
조사관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만, 인종의 벽에 가로막힌 자다. 테론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현장을 떠나기 전.
테론은 보스의 시체를 관찰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총알에 관통당한 양 손.
잘려 나간 양 다리.
복부는 갈라져 내장을 쏟아내고 가슴엔 칼까지 박혀 있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죽었을 텐데.’
서부 사령관은 빌리 레디의 목까지 날려버렸다. 부릅뜬 눈은 당시의 공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복수다. 아무래도 그 여자를 만나봐야겠어.’
하지만 테론은 조사관과 함께 경찰국으로 복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