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가 막스 옆에 앉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눈동자 흔들리는 것 좀 봐. 아무튼. 가족들에겐 뉴욕 가이드 역할로 따라왔다고 말했어.”
“그거 괜찮네.”
피치는 말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어렵게 입을 뗐다.
“아버지가 너를 만나고 싶다는데. 상황이 좀 아니겠지?”
“아니. 지금이 딱 좋아. 참, 내 은신처는?”
피치가 품속에서 종이를 내밀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 갱단들도 더러워서 안 가는 곳이야. 일단 아버지를 여기로 모셔갈게.”
“넌 올 필요 없어.”
“쳇.”
막스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방에 무기를 넣고, 피치의 것까지 두 자루의 라이플도 챙겼다.
“참, 콜린 지금 뉴욕에 있어.”
“진짜!?”
막스는 경호를 그만두고 합류한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피치는 걱정거리가 줄어든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문득 옛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뉴욕도 셋이서 시작하는 거네. 로렌스 보안관 사무실에서 콜린이랑 나랑 맨날 투닥거렸잖아.”
“조 짐 주니어만 있으면 그림 완성이지.”
“그러네. 주니어는 콜로라도에서 잘 있으려나. 다들 보고 싶다.”
막스는 씩 웃으며 피치를 쳐다봤다.
“설마?”
“훈련소에 교관이 빠지면 되겠어? 죄다 불러와야지.”
콜로라도는 라이언 홀드와 알프레도, 키트 카슨 부대가 주둔하며 지키고 있다.
텍사스는 월러스를 중심으로 한 레인저스.
캔자스는 제임스 헨리 레인이 게릴라들의 습격을 막고 있었다.
“조 짐 주니어는 진작에 율리시스가 있는 멤피스에 합류했을 거야. 산초도.”
“그럼 세븐 스트롱 전부 뉴욕으로 오겠네!?”
“모였다가 훈련소로 가야지.”
그리고 거기서 찾아볼 생각이다.
금수저들을 모아 인맥의 강을 만들고, 여기에 배를 띄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나갈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지닌 전사들을.
막스에 훈련소란 SFBC에 어울리는 인재를 미리 점찍어두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그 때문에 3백 달러에 예외를 두는 징병제는 결사코 반대였다.
*
야심한 밤.
어둠 속에 스며든 막스는 피치가 마련해준 은신처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했을 땐 하마터면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할렘가 중에서도 더 극빈층이 사는 곳.
백 년 전 양조장으로 쓰였던 건물이라는데, 총소리에도 무너져내릴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갱단도 더러워서 안 올 정도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였다.
- 척이 건물 뒤 잡동사니들 틈에 자리 만들어놨대. 보면 알 거라던데.
‘척의 복수인가.’
뺨 맞은 걸 이런 식으로 푼 모양이다.
막스는 군데군데 날카로운 쇳조각들을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어디에 사람들이 처박혀 있는지 코 고는 소리와 앓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렇게 건물을 지나 잡동사니가 쌓인 곳에 이르렀다.
‘이야, 그냥 고물상이었네.’
막스가 혀를 차던 때. 어디선가 속삭이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느라 고생했네.”
피치의 아버지, 레드 ‘블러드 빌’ 피치가 막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가 실망스러워도 이해해주게. 나름 척이 신경 써서 알아본 곳이니까.”
“..... 실망은요. 완벽한 은신첩니다.”
“여기 있는 자들은 파이브 포인츠에서 밀리고 밀린 자들이네. 대부분 병들고 움직이기 힘든 노인들이지.”
“그렇군요.”
막스는 잡동사니가 쌓인 곳에 대충 걸터앉았다. 피치의 아버지 레드는 막스의 눈을 쳐다봤다.
‘전혀 다른 인물과 마주 앉은 느낌이군.’
딸이 데려온 서부의 사업가가 알고 보니 서부 전선을 승리로 이끈 서부 사령관이다.
게다가 짧은 시간 피치를 통해 알아본바 이력이 화려하다 못해 과연 같은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기가 막혔다.
SFBC의 수장. 특수부대 대장.
대통령과의 관계.
캔자스의 제이호커스 리더.
콜로라도 금광의 실제 오너.
그리고 치채스터 갱단 25명을 몰살시킨 말도 안 되는 전투 능력.
‘과연 타마니 홀에서 경계할 만한 인물이야.’
레드 피치는 몇 시간 전, 타마니 홀의 실세들에게 불려가 추궁을 당해야 했다.
딸과의 관계를 묻는 말에 뉴욕 가이드 역할일 뿐이라 일축했다.
하지만 그들이 믿을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도 막스의 행동이 이해 안 가긴 마찬가지였으니까.
“가이드치곤 딸이 자네에 관해 많이 알더군.”
“평범한 가이드는 아니니까요.”
조금은 특별하다 이건데.
그렇다고 고작 가이드를 위해 그 난리를 쳤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딸을 위해 서부 사령관이 날뛰었다는 건 가슴이 웅장해질 이야기다.
하지만 짝사랑한다는 딸을 보면 둘의 관계가 그리 깊어 보이진 않았다.
서부 사령관과 딸의 접점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원하는 게 있나? 아니, 뉴욕에 온 이유가 대체 뭔가?”
레드 피치가 강렬한 눈빛으로 막스를 쏘아본다.
이를 담담히 받아내며 막스가 입을 뗐다.
“에밀리에 파운 피치를 원합니다.”
“.......?”
“딸을 주십시오, 장인 어르신.”
“!”
레드 피치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거렸다.
지금 상황에서 튀어나올 말인가?
날아가는 멘탈을 잡아 마음을 진정시킨 뒤, 물었다.
“진짜 그 이유란 말인가? 그건 둘이 결정해도 될 일인데.”
서부로 떠난 딸이 누구와 결혼하든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뉴욕까지 와서 갱단 하나를 날려버리고 한다는 말이.
‘딸을 달라!?’
기묘하다 못해 황당하지 않은가.
레드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막스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뉴욕으로 오는 내내 에밀리의 얼굴에 먹구름이 껴 있더군요. 그걸 없애려다 보니,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
“언제 죽을지 모를 가족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여길 통째로 드릴까요?”
동양인 사위가 파이브 포인츠를 접수해서 주겠단다. 웃어넘기기엔 진짜로 할 것 같은 진심이 느껴졌다.
*
막스와 대화를 나눈 레드가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기 전.
“타마니 홀에서 자네를 제거할 생각이네. 지금쯤이면 로잔나 피어스에서 프리랜서 총잡이를 구하고 있을지도. 하여간 몸조심하게.”
짐을 내려놓던 막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가가 물었다.
“그곳 위치 아시죠?”
“음?”
암살자가 언제 올지 불안해할 바엔.
‘차라리 찾아가는 게 낫지.’
< 제 발로 찾아온 타겟 >
뉴욕시의 갱단이나 범죄자들이 모이는 장소.
소위 울타리(fence)라 불리는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운영자들 대부분은 갱단의 두목들로 프레데릭카 “맘” 만델바움, 존 디 그레이, 에브라임 스노우, 조에리히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오래된 곳이 바로 파이브 포인츠의 중심에 있는 로잔나 피어스(Rosanna Peers)였다.
- 대략 40년 전은 되었을 거네. ‘40인 도둑(Forty thieves)’의 리더 에드워드 콜먼이 조직원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곳이었지. 하지만 그자가 교수형 당하고, 지금은 딸이 어렵게 운영하고 있네.
- 딸이요?
-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보통내기가 아니지.
레드 피치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뭔가 싶지만, 막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 됐든, 리더의 교수형과 갱단의 몰락.
이후엔 데드 레빗과 보워리 보이즈 갱단의 세력이 커지고 로잔나 피어스의 울타리 역할도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했다.
- 지금은 어느 갱단에도 속하지 않은 범죄자들의 은닉처가 되었네. 타지역에서 도망친 자들, 갱단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자들이 머무는 곳이지. 만약 그곳을 자네가 먹을 수 있다면 도움은 될 거야.
주변 갱단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로잔나 피어스의 주인장은 정보 수집에 집중한다고 했다.
- 아무튼, 오래된 만큼 로잔나 피어스엔 자신들만의 룰이 있네. 무기 소지는 자유나, 그 안에서 대결이 아닌 일방적인 살인은 허용하지 않지. 총을 꺼내는 순간 전부 자네의 적이 될 거야.
막스는 단지 위치만 물었을 뿐인데.
레드 피치는 울타리에 얽힌 역사 전체를 일러주었다. 덕분에 막스의 머릿속엔 로잔나 피어스의 역사와 경쟁자, 현재 상황까지 정보로 가득했다.
- 이 바닥은 정보가 생명이네. 딸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려면 자네가 오래 살아야지 않겠나.
- 감사합니다.
- 감사는 무슨. 아무튼, 로잔나 피어스로 가는 길이 어렵진 않을 걸세. 자네 덕분에 밤거리가 한산해졌거든.
은신처로 오면서도 느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제 사건 때문인지 파이브 포인츠의 밤은 더욱 조용해졌다.
밤의 왕처럼 군림하던 갱단들은 집에 처박혀 나오질 않았다. 그만큼 예민해진 시기였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
검은 인영이 느릿느릿 파이브 포인츠를 어슬렁거렸다.
막스는 파이브 포인츠의 한 갈래인 워스 스트리트 남쪽에 위치한 로잔나 피어스로 향했다.
늦은 밤이지만 여전히 식료품점의 등불은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게 앞에선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근데, 이게 뭔 냄새냐.’
다가갈수록 고약한 냄새가 막스의 코를 찌른다. 식료품점 가판대에 올려진 썩은 야채와 싸구려 시가 냄새가 뒤섞여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척. 척.
막스가 가게 앞에 도착하자 의자에 눕다시피 한 남자가 모자를 슬쩍 들어 올렸다.
세상에 찌든 듯한 얼굴. 눈에 띄는 건 절단된 왼쪽 무릎에 끼워진 목발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나이 든 바운서. 그는 시선을 위아래로 훑어내리곤 시가 연기를 막스에게 내뿜었다.
“스카프 내려.”
“여기도 그딴 게 필요한가?”
“경찰이 아니라는 건 확인해야 하니까.”
“걱정하지 마. 경찰은 아니거든.”
범죄자들의 은닉처는 자신도 범죄자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로잔나 피어스에 들어가려면 그에 맞는 법에 따라야 했다.
막스가 스카프를 내리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혹시 어제 빌리를 죽인 그 동양인이냐?”
“맞다.”
“...... 좆나 당당하네. 꺼져,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니까.”
“경찰만 아니면 된다며?”
“...... 시발, 넌 군인이잖아.”
그것도 얼마 전까진 서부 사령관이 불린, 별 두 개 달린 소장.
바운서가 귀찮은 듯 소리쳤다.
“여기서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
“듣던 거랑은 다르네. 사람 가리면서 받는 거야?”
“경찰이나 군인이나. 게다가 동양인 새끼들은 출입 금지야.”
“동양인은 방금 급조된 거 같은데?”
짜증이 난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무 목발 때문인지 양쪽 어깨높이가 심하게 차이 났다.
바운서가 막스를 노려봤다.
“다리는 병신이지만 손은 누구보다 빠르지.”
“난 둘 다 빠른데.”
“...... 그럼 확인해볼까.”
서로 눈이 마주친 채 홀스터 위에서 바운서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이때 가게 안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들여보내요. 찰리가 죽으면 나는 어쩌라고요.”
막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찰리라는 남자가 소리쳤다.
“내가 이깟 놈한테 질 거 같아!?”
“서부 사령관을 상대로, 이길 것 같진 않네요.”
“......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놈을 들였다간 가게가 쫄딱 망할 거라고!”
“어차피 그냥 있어도 망할 텐데요, 뭘. 어서 들여보내기나 해요.”
찰리는 긴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자리에 털썩 앉아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안에서 소란 피우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짧게 으르렁거린 찰리는 이내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가게 앞은 마치 아무런 일이 없던 것처럼, 처음 왔을 때 그대로였다.
막스는 바운서를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열 평 남짓한 공간, 구석 책상에서는 한 여인이 등불 아래서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나이는 막스와 비슷해 또래로 새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 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막스 조 장군님. 그런데 그냥 동양인이 아니라, 잘생긴 동양인이었네요?”
초승달 같은 눈웃음의 고혹적인 미소.
문득. 피치의 아버지 레드가 이 여인을 언급할 때 보였던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건 테스트다!’
막스를 떠보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막스의 얼굴에 냉기가 풀풀 휘날렸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심장이 떨릴 만하나, 막스는 여인을 보는 둥 마는 둥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성격 급하시네. 바쁘지 않으면 나랑 얘기 좀 하죠.”
여자는 눈으로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테스트를 떠나, 눈앞의 여인은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갈루스 매그 로잔나. 매그라 부르면 돼요.”
“나에 관해선 아는 것 같으니까 생략하고. 하고 싶은 말은?”
“엄청 많은데, 시간 돼요?”
“...... 용건만 간단히 합시다.”
“뭐, 그러죠.”
매그는 입을 삐죽이며 말을 이었다.
“이 타이밍에 여길 온 걸 보면, 역시 피치 가에서 말을 해준 거죠?”
“......”
“에밀리랑 무슨 관계에요?”
“!?”
“오, 반응하는 거 보니까 진짜 뭔가 있나 보네.”
매그는 턱을 괴며 막스를 그윽하게 쳐다봤다.
“에밀리랑 저랑 비교하면 어때요? 솔직히 말하면 어릴 적엔 에밀리가 더 인기 많았어요.”
“장난질은 그만. 용건이나 말해.”
“쳇. 방금 타마니 홀 쪽의 똘마니가 왔다 갔는데, 총잡이를 고용했어요.”
주인이 내부 정보를 마구잡이로 흘리고 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건데.’
막스는 술수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매그는 그런 막스의 얼굴을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이름은 올드 플래허티. 30대 초반의 얼굴에 왼쪽 뺨에 칼자국이 있는 남자예요.”
“그 남자는 여기 고객이 아닌가?”
“고객이긴 한데. 나한테 하도 찝쩍거려서 어디서 뒈졌으면 싶었거든요. 보다시피 제가 인기가 좀 많아요.”
매그가 입김을 불며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