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피치가 냅다 달려와 막스의 팔을 붙잡았다.
“미안해요. 가끔 실없는 농담을 잘해서.”
“난 유머 있는 남자가 좋던데. 에밀리가 부럽네요.”
이사벨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앤 부인은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이때.
덜컥.
집무실 문이 열렸다.
토마스는 거실 분위기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밴더빌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조만간 로잔나 피어스로 찾아가겠네.”
“그럼 그때 뵙죠.”
“마침 식사하려던 참인데, 같이하시죠?”
앤 부인의 말에 밴더빌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하도록 하죠. 그럼 건강 조심하시고, 또 찾아뵙겠습니다.”
밴더빌트가 가고, 토마스 부부는 피치에게 콜로라도에 사는 드레드 스콧의 가족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내내 착잡한 표정을 지은 토마스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얼마 뒤 이어진 저녁 만찬.
육즙이 가득한 고기와 해산물, 야채로 가득한 식탁을 본 막스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열심히 고기를 썰고 입을 오물거릴 때, 토마스가 말을 건넸다.
“막스, 자넨 이곳 맨해튼에서 어디가 가장 가치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나?”
순간 막스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올랐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센트럴 파크, 상류층들이 사는 노스 오브 휴스턴 가 등.
전부 미래에서나 유명한 곳이지 당장은 별것 없는 곳이었다. 그나마 월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가 있어 보이는 정도랄까.
그런데 앤 부인, 이사벨, 피치까지 자신의 입을 주목하는 마당에,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을 말해서야 되겠는가.
칼을 내려놓은 막스는 토마스를 비장한 눈으로 응시했다.
“전부다죠. 어떻게 개발하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겁니다.”
‘이거지.’
“흠. 그럼 똑같은 건물과 거리를 조성하면 가치가 같아진다는 말인가? 그건 좀···.”
‘아닌가 보네.’
막스는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제 말은. 부동산이란 그 시대를 꿰뚫어 봐야 한다 이거죠. 현재는 월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가 가장 가치 있습니다.”
“이유는?”
“.......”
“풉.”
피치의 비웃음에 막스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핵심은 유럽의 바이어가 도착하는 장소죠. 맨해튼의 최남단에 증권거래소가 생기고, 그 위에 월스트리트가 있는 것도 그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브로드웨이는?”
“상업단지가 조성되면 부수적인 근린생활시설들이 들어서는데, 월스트리트가와 인접한 브로드웨이가 그 목적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알겠네.”
‘뭐야, 또 틀린 거야?’
하긴 용병이 뭔 부동산을 안다고.
전투적으로 고기를 씹고 토막 내던 막스.
토마스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드레드 스콧의 가족을 후원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막스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확실히 아는 분야였다. 그리고 평소 생각해둔 바도 있었다.
“콜로라도에 곧 대학이 들어설 겁니다.”
“그 정도로 인구가 늘었나? 금광의 힘이 대단하긴 하군. 아무튼, 드레드 스콧의 가족과 대학이 무슨 연관이 있나?”
“그 대학 이름을 ‘드레드’로 지었거든요.”
“설마, 자네가 이사장인가?”
막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교육이야말로 국가와 사회발전의 백 년을 책임질 근본 초석이죠. 그런데 이런 교육기관이 인종 따위에 얽매이면 되겠습니까?”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로군.”
“맞습니다. 남북전쟁의 비극과도 맞물리는 거죠.”
앤 부인과 이사벨도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탄력받은 막스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피부색, 인종, 국가를 초월한 평등의 교육. 이걸 받고 졸업한 학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그 학생이 판사가 됐다? 그들이 곧 저지 드레드(Judge Dred)인거죠.”
“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구만.”
“그래서 보통은 재단을 통해 천에서 만 달러까지 후원금을 내시는 분이 많습니다.”
“아직 학교 개관도 안 했다면서?”
“...... 취지가 워낙 좋아서 후원자들이 미리 몰렸거든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토마스 데이비스가 넌지시 물었다.
“근데, 자네 화이자에서 일한 적 있나?”
“아뇨. 왜요?”
“약을 잘 팔아서. 관심 있으면 소개해줄 수도 있네.”
웃으면서 한 농담이지만 막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일보다는 투자할 의향은 있습니다만.”
“투자? 마침 잘 됐구만. 찰스 화이자 그 친구가 연구 비용 때문에 투자금을 유치할까 고민하던 참이거든.”
“얼마나 투자 가능합니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노다지를 얻게 생겼다.
“뭐, 그건 얘기를 나눠봐야 알겠지. 그래도 얼추 5% 정도는 가능할 거네.”
화이자 지분 5%.
“투자하겠습니다. 다리만 놔주세요.”
“알았네. 자네도 참. 여기저기 많이 건드리는구먼.”
“그래야 뭐라도 얻어걸리지 않겠습니까.”
식사가 끝나고,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토마스 저택에서 나올 수 있었다.
로잔나 피어스로 돌아가는 길.
“오늘 어땠어?”
“뭐, 여러모로 소득은 있었어.”
“다행이네. 앤 부인이 그러는데, 곧 있으면 이탈리아로 갈 거래.”
“그래? 아쉽네.”
트위드가 구속되어도, 한번 추락한 명성은 쉽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토마스 가족이 택한 건 미국을 떠나 유럽에 정착하는 것이었다.
*
토마스 데이비스가 갑자기 막스를 초대한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였다.
집무실에서 마주한 그는 대뜸 이런 제안을 던졌다.
“조만간 유럽으로 떠날 생각이네.”
“에밀리에게 들었습니다.”
“해서, 내 땅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네. 혹시 자네 생각 있나?”
단순한 관리 차원이 아니었다.
땅에 대한 판매 권한을 위임하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그러다 내가 다 사버리면요?”
“상관없네. 근데 자네 천만 달러 넘게 갖고 있나? 맨해튼의 13.5%가 내 소유인데.”
‘...... 겁나 많았네?’
뜬금없은 제안이지만 나름 이유는 있었다.
유럽으로 가기 전, 땅을 처분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온갖 이리떼가 꼬일 터.
토마스 데이비스는 밴더빌트, 제이슨 굴드, 그 밖에 탐욕스러운 자들의 협박과 공갈로부터 땅을 지켜낼 사람이 필요했다.
#206 내조의 여왕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부동산의 가치는 그곳에서 수확하는 곡식의 양으로 매겨졌다.
그 때문에 부동산의 가격은 크게 오르지 않았을뿐더러, 투기의 대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밀집되면서 땅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고. 눈치 빠른 자들은 발전 가능한 땅을 사들여 비싼 값에 팔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들이 곧 부동산 투기꾼들이었다. 그리고 그 투기꾼 중 하나인 토마스 데이비스가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줬다.
“땅을 샀다고 전부 오르는 건 아니네. 주변에 빈 땅이 넘쳐나고 심지어 서부에는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도 있으니까.”
달리 말하면 누군가에게 땅은 물처럼 흔하디흔한 것이었다.
“자네에게 천 달러가 있다고 치세. 그리고 그 돈으로 땅을 샀지. 그럼 어떻게 되겠나?”
“죽어라, 또 일해야겠죠.”
“바로 그거네. 당장은 돈이 안 되거든.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언제 오를지 모를 땅을 누가 사겠나? 그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네.”
핵심은 부동산 투자는 자고로 안목이 있어야 하고, 기다릴만한 충분한 자금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막스에겐 당연한 말처럼 들렸지만, 이 시대엔 그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대부분은 땅보다 결과가 금방 보이는 금과 주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어찌 됐든, 부동산 대리인으로서 자네가 누구에게 어떤 땅을 팔든지 상관하지 않겠네.”
“참고로 제 주 활동 무대가 콜로라도입니다. 대리인이 되면 또다시 누군가를 대리인으로 내세워야 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토마스 데이비스의 제안은 파격적일 만큼 달콤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리인인 막스는 또 다른 대리인을 내세워야 했다. 그런데 토마스는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개의치 않아 했다.
“모든 책임을 자네가 진다면 상관없네.”
이쯤 되면 자신의 얼굴 어딘가에 신뢰라는 글자라도 새겨진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대체 뭘 믿고 나한테 이러지.’
막스는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토마스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말을 건넸다.
“에밀리라는 아가씨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네. 솔직히 부인이 어느 학생을 후원하는지 관심이 없었거든. 그저 같은 아일랜드인이라 그런가 했지.”
“저도 제가 직접 하는 일 외엔 잘 모릅니다.”
“아무튼.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음 날에도 에밀리가 여길 찾아왔었네.”
“그랬습니까?”
막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때, 토마스가 말을 이었다.
“웃을 날이 없던 부인을 위해서인지, 그날 에밀리가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갔네.”
시작은 캔자스의 정착 마을, 로렌스부터였다.
학교 선생이었다가 부 보안관이 된 일.
보더 러피안과의 전쟁, 제이호커스, 드레드 스콧을 만난 일화.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콜로라도 금광, SFBC, 그리고 특수부대원으로 남북 전쟁에 참여한 이야기까지.
“솔직히 한 편의 소설을 듣는 기분이었네. 여자가 그 모든 걸 경험했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그렇긴 하죠.”
“그런데 들어보면 이야기의 중심엔 항상 자네가 있더군.”
“그야··· 항상 제 옆에 있었으니까요.”
토마스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런가. 누구보다 자넬 잘 안 다면서, 내게 약을 팔더군. 자네가 했던 것처럼.”
‘설마?’
막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파격 제안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피치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정도 내조하는 여자라면 얼른 붙잡아야지 않겠나?”
“......”
석양으로 물든 뉴욕.
막스는 로잔나 피어스로 돌아오자마자 피치를 옥상으로 불러냈다.
“토마스 데이비스가 부동산을 내게 맡기겠데.”
“나 때문인 거 알지?”
예상과 달리 피치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 보통은 감춰야 정상아냐? 그래야 더 감동이 큰 거라고.”
“왜? 난 생색내고 싶어 죽겠는데.”
피치가 막스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눈을 응시했다.
“내가 줄 게 없잖아. 집안은 갱단에, 이 몸엔 관심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너보다 돈이 많아? 그래서 머리를 쥐어짰어.”
“......”
“나를 탐낼만한 이유를 하나라도 늘리고 싶었거든. 근데···.”
피치가 막스의 눈빛을 빤히 쳐다보며.
“오늘은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네?”
“...... 이젠 그럴 이유가 없거든.”
‘어차피 정해진 거. 미룰 게 뭐 있냐.’
이젠 감정에 충실해질 때.
막스가 팔을 뻗어 피치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화르륵.
개틀링 포를 덥던 천이 벗겨지고.
그 안에서 산초와 조 짐 주니어가 튀어나왔다.
“커플을 총살하자!”
“여긴 신성한 로잔나 피어스 옥상이라고!”
산초는 장전도 안 된 손잡이를 무서운 속도로 돌렸다.
드르르륵.
‘하, 사이코 새끼들.’
분위기가 깨진 막스는 하늘을 쳐다보고, 피치는 보위 나이프를 꺼내 둘에게 달려들었다.
얼마 후, 피치를 겨우 진정시킨 산초가 말을 건넸다.
“첫 키스였다면, 오늘 그 상황은 아니었어.”
“지랄.”
“왜지?”
노을 지는 풍경에 달달한 분위기.
두 놈의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오늘이 최적의 타이밍이었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산초의 말이 막스를 충격에 빠트렸다.
“키스를 꼭 보상으로 하는 것 같잖아. 피치가 그런 존재야? 보스가 속물이야?”
순간 막스의 머리에 벼락이 내려쳤다.
부동산 재벌의 대리인이 되게 해줘서 고맙다는 일종의 보상. 분명 막스의 진심과는 전혀 다른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뭔 개소리야. 오해든 뭐든, 그냥 하면 되는 거지.”
피치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막스는 멍한 눈으로 산초를 쳐다봤다.
“너 아니었으면 큰 실수할 뻔했다.”
“에휴, 앞으로 연애 상담은 나한테 해. 내가 또 이런 건 빠삭하니까.”
“웃기고 있네. 너 모쏠이지?”
피치가 산초를 냉랭하게 쳐다봤다.
급격히 작아진 산초가 고개를 떨궜다.
“...... 어.”
“근데 누가 누굴 코치해.”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서로 오해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피치는 혀를 끌끌 차고, 막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역시 어렵다고.
*
막스는 피치 덕에 토마스 데이비스의 부동산 대리인이 되었다.
물론 전적으로 피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토마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이유가 컸으니까.
어찌 됐든.
그냥 한 소리가 아님을 증명하듯, 서류작업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기존에 이 일을 담당했던 부동산업자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떤 개자식인지 내가 가만 안 둔다!”
하루아침에 초특급 VIP 고객을 놓친 업자의 입에선 쉴새 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