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세 개의 전투를 한 번에
하퍼스 페리로 향하는 길목.
버지니아 북쪽의 마운트 빌 마을 주변으로 남군과 북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남군 측 스톤월 잭슨 장군은 존 포프를, 롱 스트리트 장군은 존 포터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멀리서 전장을 지켜보던 로버트 리 사령관은 존 포프가 이끄는 군대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상당히 적극적이군.”
달리 말하면, 매나사스에 함정을 파두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다.
하퍼스 페리로 향하는 발목을 붙잡겠다? 이런 얄팍한 수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질 않았다.
로버트 리는 존 포프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저렇게 단순한 자가 군단장이라니.”
같은 군인으로서 개탄할 노릇이 아닌가.
혀를 끌끌 차던 로버트 리는 전장에서 시선을 떼 하늘로 옮겼다.
자그마한 풍선이 떠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실제론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작년에 저걸 만든 자를 붙잡았다던데, 괜히 풀어줬군.”
옆에 있던 젭 스튜어트 준장 역시 눈에 거슬리는 풍선을 쳐다봤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데려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존 포프가 퇴각하면 틈이 생길 것도 같은데요.”
“흠.”
젭 스튜어트는 기병대장.
기동성을 따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버트 리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하퍼스 페리부터 신경 쓰세나. 마침 존 포프도 슬슬 병력을 물리는 것 같군. 기병들을 이끌고 전방부터 정찰하게.”
얼마 뒤, 스톤월 잭슨이 퇴각하는 존 포프 군대를 추격했다.
젭 스튜어트는 기병들을 이끌고 하퍼스 페리로 가는 길목을 정찰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캠프에서 빠져나가기 전.
5시 방향에서 연락병이 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로버트 리 사령관에게 다가온 연락병은 말에 탄 채 소리쳤다.
“북군이 리치먼드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
얼어붙은 듯 로버트 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이내 이를 바득 깨물곤 입을 열었다.
“잭슨과 롱 스트리트 장군을 불러와.”
“옛 썰!”
‘설마 이런 수를 쓸 줄이야.’
매나사스 함정을 간파하고, 북군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하퍼스 페리를 노렸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뒤통수를 맞다니···.’
북군 총사령관이 뜬금없이 리치먼드로 향하는 이유는 빤하다. 자신들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되려 회군하게 만드는 노림수가 분명했다.
적들의 속셈을 알고 있다 한들, 마땅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로버트 리는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고민에 휩싸였다.
하퍼스 페리로 빠르게 진군하기 위해 지휘소라곤 그늘 가림막이 전부다.
땡볕을 피해 탁자도 없이 통나무 의자에 걸터앉은 장군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어두웠다.
로버트 리 사령관이 그들을 향해 무거운 입을 뗐다.
“우리 선택지는 세 가지요. 회군해서 리치먼드를 사수하던가. 아니면 이대로 하퍼스 페리를 점령하고 예정대로 워싱턴으로 진격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로버트 리가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리치먼드로 가는 길에 매나사스를 습격하고 철저히 파괴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외엔 없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세 번째가 적절한 것 같습니다.”
“북군의 병력이 두 개로 쪼개졌으니, 매나사스는 빈집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워싱턴은 못 갈지언정, 뭐라도 작살 내야 체면이 살지 않겠는가.
장군들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뽑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게다가 리치먼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매나사스를 지나치는 것이다.
여러모로 세 번째가 최선책이었다.
그런데 스톤월 잭슨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수북한 턱수염 사이로 입술이 움직였다.
“현재 북군의 포지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매나사스를 방어하는 병력이 있고, 우리가 놈들을 단시간에 뚫지 못하면 더 큰 문제를 마주하게 될 겁니다.”
북으로는 하퍼스 페리를 지키려던 군단, 남으로는 리치먼드로 진군하는 군단.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 북군이 매나사스를 공격하는 남군을 포위한다면?
“결국 돌고 돌아, 놈들이 만들어 놓은 매나사스 함정에 빠져드는 겁니다.”
“반대로 놈들이 리치먼드를 공격하면 우리가 포위할 수 있겠군요.”
“글쎄요. 과연 놈들이 리치먼드까지 갈지도 의문입니다.”
일종의 공갈 협박이다.
장군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자신들의 움직임에 따라 북군이 얼마든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로버트 리 사령관 역시 잭슨 장군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지휘관들에게 세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한 건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회군하는 게 내키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북군 총사령관의 변칙적이고, 파격적인 전술은 해법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한편, 아군이 아군의 전략에 경악하는 일도 벌어졌다.
“리치먼드를 공략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게다가 나한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제5군단장 존 포터는 총사령관의 연락병인 특수부대원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쪼록 총사령관께선 남군이 회군하면 위에서 압박을 늦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망할!”
같은 상황은 제3군단에도 벌어졌다.
잭슨 장군과 교전을 벌이고 막 퇴각하려던 존 포프. 실수를 만회하려 교전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허탈함과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을 배제하고 작전을 수행한 총사령관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 작전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짝.
존 포프가 대원의 뺨을 후려쳤다.
“기밀? 건방진 새끼, 연락병 주제에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놀려!”
손과 발을 휘두르며 구타가 이어졌다.
대원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존 포프가 분을 삭이며 씩씩거릴 때.
대원 드레이크 하딘이 입을 열었다.
“사령관께서 남군이 회군하면 압박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매나사스로 향하면, 그곳에서 전 군이 집결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포프는 흠칫하며 대원을 쳐다봤다.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에 오싹함마저 든다.
순간 연락병의 계급이 소령이고, 그 또한 특수부대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테네시 게릴라들을 학살한 살인 병기들이라는 것도.
머리카락이 쭈뼛거린 존 포프는 이를 포장하려 소리쳤다.
“알았으니까, 꺼져!”
“그럼 가보겠습니다.”
드레이크는 올 때처럼 절도 있게 뒤로 물러섰다. 달라진 게 있다면 뺨이 붉게 변했다는 거.
드레이크가 천막에서 나오자, 밖에 있던 장교들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힐끔거렸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드레이크는 문득 발을 멈춰 세워서는 바닥에 떨어진 나무를 주워들었다.
그리곤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휘우웅.
휘우웅.
장교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병신들.”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드레이크 하딘은 낄낄거리며 말에 올라탔다.
그리곤 오늘을 곱씹으며 평원을 질주했다.
*
막스는 매나사스에 3개 사단, 일만의 병력을 남겨두고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렇게 8시간을 행군하고 서머빌이라는 작은 마을 주변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하죠.”
총 병력 5만 2천. 이들은 중대 단위로 퍼져 캠프를 구축했다.
행군으로 몸은 지쳤지만, 군인들의 얼굴은 고되어 보이지 않았다.
총칼이 오가는 전투보다야 행군이 나았고, 그 목적지가 적진의 심장이라는 말엔 들뜬 병사들도 있었다.
게다가 총사령관은 적진 한가운데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걸 허용했다.
의도는 리치먼드로 당당하게 진군하는 모습은 적들의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하고, 생각들은 단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군단장들이 휘하의 지휘관들과 식사를 할 때.
총사령관인 막스는 옥수수수프와 구운 감자를 먹으며 특수부대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규범과 원칙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다만 그에 합당한 이유는 있어야겠지. 오늘의 경우,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 위치와 군세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야.”
“그런데 이러다 로버트 리 장군이 회군해서 우리 뒤를 노리면 어떻게 해요? 리치먼드에서도 지원 병력이 오면 우리가 양쪽으로 포위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한 거지. 그리고 그 타이밍을 잘 잡으려면 정보는 필수고.”
보통은 주둔하는 곳 주변을 정찰하는 게 통상적이다. 공격하는 경우엔 그 경로에 정찰대를 파견해 장애물을 파악하거나 적들의 매복을 탐지한다.
땅덩이도 넓고 인적이 드물어 수만 명이 이동해도 눈에 띄지 않으면 어찌 알겠는가.
해서 막스는 최소 500m를 사이에 두고 정찰대를 사방에 배치했다.
여기에 투입된 인원만 무려 두 개 사단이었다.
“눈먼 장님이 어디를 향해 칼을 휘두를지 누가 알겠어. 행군하면서 남군의 움직임에 적절하게 대응하려면, 지금은 전투 병력보다 정보 부대가 더 필요하거든.”
다음 날.
아침 일찍 리치먼드로의 행군을 이어갔다.
가는 도중에 간혹 정찰병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중대 단위의 남군이 발견되었다는 말에 한 개 대대를 보내 추적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오가 되기 전, 로버트 리 사령관을 정찰하던 연락병 드레이크가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
“남군이 회군을 결심했습니다.”
“방향은?”
“불런 마운틴 쪽입니다.”
매나사스로부터 20km 떨어진 곳이다.
막스는 전 병력의 행군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군단장뿐 아니라, 사단장급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남군이 회군한다는 소리에 탄성을 내뱉었다.
“설마 이걸 노린 겁니까!?”
“리치먼드 공략은 적들을 위협하는 용도였군요?”
일부는 눈치챈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수가 워낙 많아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하퍼스 페리와 리치먼드. 이 둘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당연히 사령관이라면 수도를 지켜야죠.”
막스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남군의 예상 가능한 경로는 두 가집니다.”
매나사스를 훑고 지나가던지, 아니면 빠르게 우회해서 리치먼드에 합류하던지.
이에 프랜츠 시겔 장군이 물었다.
“우리 뒤를 노리는 경우는요?”
“포프와 포터 장군이 뒤에서 압박할 겁니다. 우릴 공격하면 결국 양쪽에 갇힌다는 걸 모르진 않겠죠.”
총사령관의 말대로라면, 워싱턴을 공격하겠다던 남군은 치욕스러운 회군을 하는 셈이었다.
반면 북군은 무엇을 얻었는가?
적들에게 공격받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기분 좋게 돌아가야 할까?
장군들이 웅성거릴 때, 막스가 입을 뗐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죠. 지금부터 한 개 사단은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5시간 거리인 프레데릭스버그를 점령할 겁니다.”
“점령이요?”
점령이라기보단, 북군이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이는 적은 수의 병력으로 적에게 심리적 타격을 입히는 방법이었다.
막스는 이번 일련의 행동으로 맥클레란이 띄워준 남군의 사기를 확실히 꺾어 놓으려 했다. 그 때문에 작전 초기부터 대통령과 섬너에게 요청한 게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막스는 군단을 이끌고 매나사스로 회군했다.
대신 프랜츠 시겔 휘하의 2사단은 프레데릭스버그로 진군했다.
여기에 특수부대원 50명이 따라붙었다.
- 아군이지만, 민간인을 학살할 수도 있어. 너희들이 잘 감시하도록 해.
총사령관과 군단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광기에 휩싸인 군인들은 제어하기가 힘들다.
이는 남군과 북군 모두에게 해당했다.
프레데릭스버그는 매나사스와 리치먼드 중간의 제법 큰 도시였다.
몇 개월 뒤, 원 역사에선 북군의 제9군단장 암브로스 번스타인 장군이 프레데릭스버그를 점령. 얼마 버티지 못하고 로버트 리에게 대패한 뒤 개 쫓기듯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오늘. 프레데릭스버그를 점령한 북군은 마을을 약탈한 뒤, 동쪽으로 15km 떨어진 포토맥강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곳엔 막스가 전쟁장관 섬너에게 요청한 북군의 해군 수송선이 며칠째 정박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