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360)

#215 내가 피를 흘렸는데?

프레데릭스버그는 워싱턴과 리치먼드의 중간지점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포토맥강의 항구와 가까워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원 역사에선 1862년 12월에 총 나흘간 프레데릭스버그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군사 규모는 북군 11만, 남군 7만 3천 정도.

앰브로스 번사이드 장군과 로버트 리가 격돌한 끝에 북군의 대패로 끝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번사이드 장군은 남군이 오기까지 프레데릭스버그를 약탈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북군 사상자가 무려 1만 3천여 명, 남군은 5천 명이 조금 넘는 피해를 남긴 것이다.

그런데.

막스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프레데릭스버그를 유린했다.

민간인은 건들지 않았지만, 식량과 돈이 될만한 것들을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웠다.

뒤늦게 도착한 남군 장군들은 불타오르는 프레데릭스버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 맙소사.

- 완벽하게 당했구려···.

이미 북군은 포토맥강을 건너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전쟁 한번 하지 못하고,

적의 농간에 놀아난 남군 최악의 출정.

그 책임을 져야 할 로버트 리는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눈을 감았다.

타들어 가는 도시의 재가 휘날리고 코끝을 찌르는 탄 내음이 그에겐 지옥과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아니, 어디서부터 북군 총사령관의 계획에 휘둘린 걸까.

로버트 리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

매나사스 동부 사령부 캠프.

총사령관과 군단장들이 회의하는 사이, 지휘소 천막 앞에 고위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워싱턴 침공을 완벽하게 막아낸 것을 자축하며 기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총사령관은 남군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게 아니면 이렇게 쉽게 몰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맞습니다. 사실 매나사스를 공격하던가, 우리 후방을 공격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이건 뭐, 단체로 약을 처먹었는지 이렇게 맥없이 회군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전략과 전술.

일련의 상황을 복기하면 할수록 총사령관의 작전은 탄성을 자아냈다.

누군가는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기도 했는데.

윈필드 스콧 핸콕이라는 제5군단 보병 여단장이었다.

“체스판에서 적들이 졸들을 공격하는 때, 총사령관님은 느닷없이 체크를 외쳤습니다. 적들이 당황할 수밖에요. 게다가 이번에 입증된 건, 총사령관님의 말처럼 남군의 병력이 우리 절반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흠. 그건 입증되었다고 보긴 어렵지 않습니까?”

핸콕은 자신 있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력이 똑같았다면, 남군도 우리처럼 두 개로 쪼갰을 겁니다. 하나는 리치먼드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매나사스를 공격했겠죠.”

어쩌면 지난 페닌슐라 전투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총사령관의 말을 확신한 핸콕은 그동안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라파예트를 의심했다.

*

북군 총사령관의 지휘 막사.

군단장들이 모인 가운데 막스는 그동안의 일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이후 방침에 대해 짧게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에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당분간 정보 부대를 대폭 늘릴 겁니다.”

막스는 매나사스를 동부 사령부로 삼고, 이곳과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 사이를 정보 부대로 촘촘히 채우려 했다.

“매뉴얼이 곧 나갈 겁니다. 정보 부대 운용은 그걸 참고로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첫 대면 때와 달리 군단장들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포트와 포프는 할 말이 있어 보이지만, 입꼬리만 씰룩거릴 뿐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때 작심한 듯 막스가 존 포프를 쳐다봤다.

“지난번엔 정신이 없어서 물어보질 못했습니다만. 왜 그러셨습니까?”

“...... 뭐를 말입니까?”

막스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적당히 교전하랬지, 누가 적들을 보자마자 도망치라 했습니까?”

“도망? 말이 이상하군요. 난 사령관의 말에 따랐을 뿐입니다.”

“내 말을 잘못 이해했다, 이겁니까?”

“아니면 제가 그럴 이유가 없지요. 아무튼, 다음부턴 똑바로 전달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뻔뻔한 존 포프는 막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북군 총사령관이라 해도 감히 자신을 경질하고 좌천시킬 수 있을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실수는 했지만 치명적이지 않았고, 어쨌든 남군도 막아냈다. 책임을 묻는다면 오히려 총사령관이 역풍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적을 매나사스로 유인하려던 작전이 귀관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책임을 지셔야죠?”

“책임?”

“대통령께 3군단장으로 다른 분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탁!

존 포프가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남군의 공격을 막아냈는데, 대체 무슨 책임을 진단 말인가! 이건 명백한 모함이요!”

“단번에 이해한 걸 보니까 이번엔 내가 말을 잘 전달한 모양이군요.”

막스의 이죽거림에 존 포프의 몸이 부들거렸다.

다른 군단장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존 포터는 막스의 태도에 놀랐는지 잔뜩 위축된 모습이었다.

“억울하고 할 말이 있거든 워싱턴을 찾아가십시오, 포프 장군. 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군들과 함께 싸울 자신이 없습니다.”

“이···.”

주먹을 움켜쥔 존 포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막스를 쏘아봤다.

“총사령관이 되더니 천지 분간을 못 하는군. 워싱턴에서 동양인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글쎄요. 몇 명일지 별로 궁금하진 않습니다.”

“...... 오늘 일은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매나사스 작전을 놓친 게 더 후회되겠죠.”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한 존 포프. 계속된 막스의 이죽거림에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의자를 발로 걷어찬 뒤 천막을 벗어났다.

군단장들은 그 뒷모습을 보며 오만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과연 존 포프가 경질될 정도로 큰 실수를 했는가? 결국 남군을 막아냈으면 그냥 넘어가도 될 일 아닌가?

더군다나, 동양인에게 백인 군단장이 저런 대접을 받는 게 정상인가!?

대체 나라가 어떻게 흘러간단 말인가!

군단장들의 얼굴에 씁쓸함과 분노가 교차한다. 막스는 그들을 응시하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누구나 실수는 합니다. 다만, 고의적인 실수는 실수가 아닙니다.”

막스가 리치먼드로 향하지 않았다면, 하퍼스 페리는 점령되고 무기고를 탈탈 털렸을 터.

그걸 다시 탈환하려면 또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존 포프는 고작 나 하나 엿 먹이겠다고, 그런 짓을 벌였습니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죠.”

막스는 존 기어리를 뺀 나머지 군단장들을 차례차례 응시했다.

“작전에 실패는 할지언정, 그 이유가 사사로워서는 안 됩니다. 다들 잘 이해하리라 믿고,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승리에 대한 축하도 없이, 조금은 건조하고 딱딱한 회의가 끝나버렸다.

군단장들이 나가고 천막엔 막스만 남았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뚝을 치던 때.

슬그머니 천막이 젖혀진다.

그 사이로 방금 나갔던 제2군단장 존 기어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잠깐 들어가도 되지?”

“그럼요.”

존 기어리는 앉자마자 말을 건넸다.

“오늘 아주 잘한 거야, 총사령관. 앞으로 다른 군단장들이 끽소리도 못할 거라고.”

다만 아쉬운 게 있는지 입맛을 다셨다.

“이왕이면 존 포터도 날려버렸으면 좋았는데.”

“그랬다간, 맥클레란의 지지 세력이 들고일어날걸요. 확실한 명분이 없으면 공격할 빌미만 줄 겁니다.”

맥클레란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정치군인에 가까운 만큼 지지 세력도 많았다.

맥클레란의 기반은 북부 민주당.

그동안 강력한 구심점이었던 스티븐 더글라스가 돌연 사망한 이유도 한몫했다.

문제의 캔자스-네브레스카 법을 발의한 상원 의원. 대선에서 존 브라운에게 패배한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라스.

그는 전쟁 발발의 원인인 남부 민주당과 확실한 선을 긋기 위해 노력한 자였다.

전쟁 발발 직후 각 주를 돌아다니며 전쟁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군입대를 독려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7만 5천 명의 군인이 모집된 것도 더글라스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했던 걸까.

더글라스는 전쟁이 터지고 두 달 만에 과로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작은 거인’, ‘위대한 정치가’라 불린 더글라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민주당이 선택한 건 젊은 북군 총사령관 맥클레란이었다.

“그러니까 존 포터는 맥클레란의 측근이라, 비교적 별 볼일 없는 존 포프를 타겟으로 삼았다 이거네? ”

“뭐 겸사겸사요.”

존 기어리는 새삼 경탄스러운 눈빛으로 막스를 쳐다봤다.

“전쟁하랴, 정치하랴, 사업하랴. 어이구, 나 같았으면 벌써 머리가 터졌을 거야.”

문득 생각난 듯, 존 기어리가 물었다.

“그런데, 워싱턴에도 존 포프 인맥이 좀 될 텐데? 저항이 좀 있을 거야.”

“지금 상황에선 소용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3군단장으로 추천할 사람 있어요?”

존 기어리는 생각한 끝에 윈필드 스콧 핸콕 준장을 추천했다.

페닌슐라 전쟁에서도 맥클레란과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대부분 그의 생각이 맞았다고 했다.

또한 핸콕은 막스의 전략과 전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장군 중 하나였다.

“한번 만나봐야겠네요.”

막스는 그날 오후, 핸콕과 대면했다.

왜 자신을 불렀는지 이유를 묻는 대신, 핸콕은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총사령관님!”

“승리랄게 있나요.”

남군 혼자 북치고, 장구 치다 돌아간 건데.

막스는 핸콕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물론 막스는 전생의 정보를 통해 핸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티스버그 전쟁 승리의 주역.’

물론 그 주역이 한둘은 아니나, 핸콕은 나름의 족적을 남긴 유명한 인물이었다.

전략과 전술의 이해도가 높은 군인다운 군인.

지휘관으로서 핸콕의 패배는 딱 한 번뿐이었으니.

실제로 대면한 막스는 역사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핸콕은 꽤 솔직한 편이었다.

그는 프레데렉스버그 점령을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작전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게 과연 운으로 됐을까요.”

핸콕은 민망할 정도로 막스를 추켜세웠다.

자신의 성과를 인정하고 칭찬하면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승천하려는 광대를 손가락으로 끌어내린 뒤, 막스는 최종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남군은 왜 우리의 후방을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리치먼드로 향하는 길이라면 건드려볼 만했을 텐데.”

“사령관님의 말대로, 남군의 전략이 우리 절반밖에 되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워싱턴을 함락하겠다는 포부는 실종되고, 남군은 보름 넘게 버지니아 안에서 행군에 행군을 거듭했다.

당초 목표는 매나사스를 점령해 보급품을 충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타겟이 하퍼스 페리로 변경되면서 피로도를 높이고.

북군이 리치먼드를 공략한다는 소식이 사기마저 떨어트렸다.

대체 우린 뭘 한 거지?

집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사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런 상황에서 전투는 힘들다고 봐야죠. 했다면 아마 우리가 이겼을 겁니다.”

나름의 분석을 늘어놓은 핸콕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막스는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생각이라. 근데 말이죠.”

핸콕이 막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야 결과를 놓고 분석한 거지만, 총사령관님은 그걸 예상하고 작전을 펼친 거잖아요?”

“그렇죠.”

“진짜 대단한 거예요, 그거.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지만, 솔직히 동양인이라 좀 그랬거든요.”

“그런 건 솔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나저나, 제가 왜 불렀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왜 불렀습니까?”

막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유능하신 장군님들을 알아두려고요.”

“어이구, 저보다 훌륭하신 장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그분들도 천천히 만나봐야죠.”

핸콕이 나간 뒤, 막스는 워싱턴에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제3군단장으로 윈필드 스콧 핸콕 준장을 추천합니다.]

그런 다음 존 포프의 만행을 써 내려갔다.

소심하지만, 그렇다고 군단장을 죽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같은 시각.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존 포프는 말을 타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건방진 동양인 새끼.’

오만하고 분수를 모르는 북군 총사령관을 향한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쌓여만 갔다.

‘내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네 놈을 끌어 내려주마.’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존 포프는 서부 전선에 있는 동안 이전 서부 사령관 존 프레몬트 소장을 끌어내린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은 더 쉬울 것이다.

동양인을 옹호해줄 사람은 몇 없을 테니까.

다음 날.

워싱턴에 도착한 존 포프는 곧바로 의회를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도심에 들어선 순간 고막을 후벼파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외요, 호외! 북군 총사령관이 로버트 리 장군과 스톤월 잭슨 장군을 무찔렀습니다!”

“뭐? 진짜야?”

“워싱턴은 안전합니다, 여러분! 게다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이뤄낸 승리라는 거.

‘개소리. 내가 피를 흘렸는데?!’

존 포프는 자신의 손등을 쳐다봤다.

잭슨과 교전하다 다친 상처.

물론 나무에 긁힌 거지만, 중요한 건 전쟁터라는 사실이다.

생각할수록 억울함과 비이성적인 증오가 포프의 마음을 채웠다.

그러나.

“북군 총사령관!”

“만세!”

거리에 한 사람의 칭호가 울려 퍼질수록 포프의 말 속도는 느려졌다. 의회에 가까워질수록 존 포프의 어깨는 처져만 갔다.

남군이 침공한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진 워싱턴은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

“빌어먹을 동양인 새끼!”

존 포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자, 남자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뭐여, 방금 총사령관 욕한 거야?”

“와아, 시발. 군복 입은 군인이 상관을 욕하네?”

군인들의 정점에 서 있는 북군 총사령관.

군복을 입고 그를 욕하면, 그건 하극상.

존 포프는 서둘러 말을 박차곤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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