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모두 고생했습니다.”
존 브라운 대통령의 깜짝 방문으로 동부 사령부 캠프가 떠들썩하다.
장교와 사병들은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대통령과 함께 지휘소로 향했다. 그 앞에 이르렀을 땐 소식을 들은 막스가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이번 일을 두고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국민이 내 등을 떠밀었다고 생각하게. 고생했네, 총사령관.”
대통령과 막스가 손을 잡자 캠프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커다란 전쟁은 없었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군인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데 충분했다.
저마다 자신들이 칭찬을 받은 양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존 포터와 군단장들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동부 사령부의 지휘소.
대통령과 총사령관의 독대가 이루어졌다.
“피를 흘리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게 지금도 믿어 지지가 않네. 자네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어.”
“아쉽게도 이런 전략은 딱 한 번뿐입니다. 다음은 안 통하겠죠.”
“그땐 자네가 또 새로운 전략을 가져오겠지.”
“부담 주러 오셨군요?”
존 브라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한 번의 승리일 뿐,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건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남군이 어떻게 나올 것 같나?”
“로버트 리 사령관이 유능하다면 아마 변화가 생길 겁니다. 우리에겐 더 안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고요.”
거짓 정보에 휘둘린 북군과 달리 남군은 자신들이 수적 열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해서 로버트 리는 기동성을 늘려 북군의 취약한 부분을 타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하지만 이게 통하지 않았을 때, 로버트 리는 오히려 북군의 병력 쪼개기 전략에 말려들었다.
“매나사스, 리치먼드, 하퍼스 페리. 이 세 곳을 동시에 공략하지 못한 건 결국 병력 차이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남군과 북군의 경제력, 인구수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좁히기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로버트 리가 취할 방법은.
“병력을 증원하는 동안 게릴라 전술을 펼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우리 병력을 줄이고 점령지도 늘려 가려 할 겁니다.”
물론 게릴라 전술치고는 규모가 크고, 사단 혹은 여단급에서 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일종의 소모전을 통한 시간 벌기인 셈인데, 막스는 당분간 대규모 전투보다 국지적인 전투로 흘러갈 거라 예상했다.
“서부 전선도 마찬가지겠군.”
팔짱을 낀 존 브라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군 총사령관의 힘을 실어주러 왔지만, 몇 가지 논의할 사안도 있었다.
“남부 연합이 영국과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했네. 문제는 영국인데. 관계가 그리 좋진 않거든.”
미국은 영국과 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한 이래, 1812년에는 미영 전쟁도 벌였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남부로부터 대량의 면화를 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 연합에 호의적이었다.
“두 국가가 남부 연합을 도우면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닐 수도 있네.”
이미 남부 연합에선 영국과 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했고 연방에서 남군 외교관 둘을 납치하는 트렌트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뻔했는데, 존 브라운은 이를 막기 위해 외교관을 풀어주어 상황을 해결했다. 그리고 현재 영국은 연방과 남부 연합을 중재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남부와 원치 않는 협상이 이루어지면 지금까지 흘린 피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갈등이 봉합되기는커녕, 더욱 혼란만 가중될 뿐이네.”
“그럼 이제 슬슬 공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막스는 존 브라운의 눈빛을 응시하며 입을 뗐다.
“노예 해방 선언이요. 이미 결심하고 저한테 물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뭐, 부정하진 않겠네. 좀 더 확신이 필요했거든.”
존 브라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남북전쟁이 노예제 갈등 때문에 벌어진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연방은 정작 이에 관한 입장은 공표하지 않았다.
남과 북의 경계이자 노예주인 미주리, 켄터키, 메릴랜드와 노예제 찬성론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치열해졌다.
누구도 쉽게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당연히 노예 해방 선언이다.
연방은 알면서도 지금껏 그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동부에서 죽을 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번 남부 연합의 퇴각으로 동부 전선에서 첫 승리를 거뒀습니다. 분위기는 일단 만들어졌다고 봐야죠. 게다가 노예 해방 선언은 곧 우리에게 전쟁 명분을 만들어 줄 겁니다.”
유럽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노예제를 폐지했다.
노예무역은 중단되고 이를 단속하기 위해 각국은 해상을 통제하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런데 영국과 프랑스가 남부 연합을 편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또 하나. 연방이 남부 연합의 해상 길을 막아 면화 수출이 어려운 상황이죠.”
“대체품을 찾는다 이 말이군.”
“이집트가 면화 공급에 적극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품질에 차이가 없다면 남부 연합에 기댈 필요가 없죠.”
존 브라운 역시 보고받은 내용이었다.
어찌 됐든, 막스의 말을 들어보면 시기를 저울질하던 노예 해방 선언의 시기가 다가온 게 분명하다. 존 브라운은 자신의 결심을 확신했다.
“해가 넘어가면 노예 해방을 선언해야겠군.”
“장담할 순 없지만, 그때까진 이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노력해보죠.”
“그 정도 대답만으로 충분하네.”
노예 해방 선언을 한다 해도 법적인 효력은 없다.
이를 법제화하려면 헌법을 수정해야 하는데, 바로 수정헌법 13조였다.
밖에선 전쟁이 한창이지만, 연방의 내부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존 브라운은 함께 노예제 폐지를 의회에 상정시키려 의원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중요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었네.”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닙니다.”
존 브라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빛으로 말을 재촉했다.
“맥클레란의 패배로 징병제와 유색부대 창설을 밀어붙이려 했는데, 이대로 가면 명분이 약해질 것 같거든요.”
손쉽게 남군을 퇴각시키고, 이후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지금 전력으로도 충분하다는 소리다. 징병제를 할 이유가 없었다.
“아, 그 문제였군. 그렇지 않아도 여기 오기 전, 섬너 장관과 논의를 했었네.”
존 브라운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색 부대는 워싱턴에 돌아가는 대로, 공표가 이루어질 거네. 물론 각 주의 자율에 맡기는 거라, 반응이 없을 수도 있네.”
“괜찮습니다. 시작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징병제인데.”
당초 징병제를 공표하는 건 내년 초로 가닥을 잡았었다. 그런데 어쩐지 막스는 서두르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제가 총사령관이 됐으니까요. 이렇게 된 이상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습니다.”
“징병제로 그게 가능한가?”
“결과는 장담할 순 없지만, 지금 방식보단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소모전으로 질질 끌고 싶진 않거든요.”
과연 막스가 구상하는 전략은 무엇일까.
존 브라운의 기대감 서린 눈빛이 막스의 입을 응시했다.
“적당한 시기가 오면, 총력전에 돌입할 생각입니다.”
“...... 총력전?”
“서부와 동부가 일제히 남군의 심장으로 향하는. 말 그대로 총력전이자, 섬멸전입니다.”
“...... 뭔가 무서운 말이군.”
“생각보다 전략은 단순합니다.”
전쟁 의지를 박살 낼 정도로 적진을 초토화하는 것.
남부 연합이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까지 몰아붙이는 게 전략의 핵심이었다.
*
며칠 뒤 북부연방이 떠들썩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유색인종 부대(United States Color Troopers)’ 창설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는 원 역사보다 8개월가량 앞당긴 것으로, 여러 번 논란이 되어 그런지 생각보다 격렬한 저항은 없었다.
다만 부대를 모집하는 주체들. 주지사와 주 의회는 유색인종 부대에 회의적이었다.
- 흑인들이 과연 총이나 쏠 수 있을까요?
- 전투가 벌어지면 목숨 걸고 싸울 놈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솔직히 지휘관들이 말하는 전술을 이해나 할지 의문입니다.
흑인들의 전투력을 의심하는 주들이 대다수.
그 때문에 적극적으로 모집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공표가 되자마자 유색 부대가 만들어진 곳이 있었는데, 바로 캔자스였다.
캔자스 로렌스 북동쪽 막스의 최초 기지.
6개의 중대로 구성된 흑인 대대가 소집되었다.
단상 앞에서 올라선 남자. 제임스 헨리 레인 민병대 준장이 대원들을 훑어보며 소리쳤다.
“제군들은 오늘부터 연방의 군인이다! 그동안 받은 훈련이 헛되지 않도록 총과 칼로 이 나라를 지켜주길 바란다!”
“와아아아!”
캔자스 로렌스에 울려 퍼진 함성.
이들은 그동안 SFBC 대원들에게 훈련을 받은 흑인들로, 대부분 미주리주의 노예거나 탈출한 도망 노예였다.
“우리가 군인이라는 게 믿어져?”
“솔직히 난 전쟁 끝날 때까지 훈련만 받다가 끝나는 줄 알았어!”
흑인들은 무려 일 년이나 로렌스에 머물면서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전투에 투입될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후 자신들을 공장에 고용하고 조직하고 훈련 시킨 당사자가 서부 사령관이 되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흑인들은 캔자스에 머물면서 막스의 의류 공장에서 일하고, 훈련받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 사장님이 북군 총사령관???
희망이 다시금 생겨날 때.
제임스 헨리 레인이 자신들을 소집했다.
“제군들은 앞으로 제1 캔자스 유색 의용 보병 연대(1st Kansas Colored Infantry Regiment)의 군인이다!”
북부에서 최초로 조직된 흑인 연대.
노예가 아닌 미국 땅에 사는 인간으로 싸울 수 있는 자격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등장에 자연스레 연방의 이목이 쏠렸다.
반대하는 이들은 흑인들의 미개함을 지적하며 총 대신 삽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투병이 아닌 공병 혹은 허드렛일이 어울린다며 무시했다.
백인만이 우월하다는 오만함.
이는 캔자스 유색 부대에 첫 전투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겨 주었다.
더욱이 자원 입대를 희망하는 다른 흑인들의 열망까지도 떠안게 되었다.
패배 직후 유색 부대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그러나 자신들을 훈련 시킨 SFBC 교관들은 달랐다.
- 드디어 때가 온 건가.
- 정신 무장부터 다시 시켜야겠군.
빨간 모자를 썼던 교관들이 이제는 중대장이 되어 자신들을 통솔했다.
물론 훈련할 때와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예전 세인트 루이스에서 길거리 싸움을 했던 데니스 헤인즈가 소리쳤다.
“전부 엎드려뻗쳐!”
“엎드려뻗쳐!”
“이 새끼들, 동작 봐라! 지금까지 북군 총사령관님께서 개 병신같은 너희들을 훈련 시킨 이유가 뭔 것 같나?”
“......”
“안 되겠구만. 지금부터 하나 하면, 나는! 둘 하면, 블랙 버팔로가 아니다! 하나!”
“나는!”
“둘!”
“블랙 버팔로가 아니다!”
"너흰 사냥감 버팔로가 아니라, 당당한 전투 보병이다! 잊지 마라!"
먼지 나도록 구른 흑인들의 눈빛에 다시금 뜨거운 열기가 피어났다.
사람들의 평판 따위 무슨 상관인가.
그저 나가서 싸우고 이기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미주리주 베이츠 카운티의 아일랜드 마운드에서 게릴라들이 마을을 습격했다.
연방의 눈과 귀가 주목된 상황.
첫 유색 부대의 출격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