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남북전쟁, 그 세 번째 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때.
특수부대원이었던 제이미 터커가 막스를 찾아왔다.
“충성!”
“어이구, 탐정 경찰국 국장님이 충성이라뇨!?”
막스가 호들갑을 떨자 터커는 한숨부터 내셨다.
“저한테 왜 이래요. 등 떠밀 땐 언제고.”
“방금 뭐야, 그 말투는.”
막스는 바짝 다가가 손바닥으로 키를 재듯 터커와 자신을 비교했다.
“많이 컸네, 어? 그새 컸어.”
둘의 키 차이는 머리 하나 정도.
물론 막스가 컸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요즘 안 바빠?”
“엄청 바쁘죠. 근데 일이 생겼습니다. 라파예트의 행방을 발견했거든요.”
막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터커에게 의자를 건네며 자신도 털썩 걸터앉았다.
“어디서 발견했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부근이요. 라파예트 때문에 연방 정찰대가 전부 죽었습니다.”
“라파예트 짓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생존자가 있었는데, 노예였던 흑인 여자라더군요. 그 존재는 대통령과 섬너 장관만이 알고 있습니다.”
‘해리엇 터브만이군.’
존 브라운 대통령과 같은 지하철도 일원이자, 하퍼스 페리 습격을 위해 지지자들을 모았던 여인. 존 브라운은 그녀를 ‘터브먼 장군’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만큼 둘의 인연이 깊었다.
원 역사에서 터브만은 남북전쟁 기간에도 활동 기록을 남길 만큼 열성적이었다. 그녀는 연방의 정찰, 스파이로서 많은 임무를 수행했다.
“라파예트도 그녀의 존재를 몰랐나?”
“예.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죠.”
대통령과 섬너만 알고 있다니, 막스 역시 모른 척해야 한다.
‘뭐, 알든 모르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막스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원 역사에서 비춰볼 때, 라파예트가 과연 이 정도까지 악랄한 인물이었던가?
오히려 그는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와 공모자를 밝혀낸 인물이다. 그런데.
“내가 그자를 흑화시켜버린 건가.”
북군이 남군 병력을 과대평가한 건 맥클레란 뿐만이 아니다. 첫 불런 전투 당시 사령관인 맥도웰 장군 역시 남군의 병력을 오판했다.
막스는 이 부분에서 정보를 제공한 원천자를 의심했다. 라파예트뿐 아니라, 심지어 앨런 핑커톤을 의심한 적도 있었으니까.
역사 기록은 그 원인을 북군 장군들의 무능함으로 다뤘지, 라파예트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막스 역시 그가 의도적으로 남군을 위해 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하들 탓으로 돌리면 될 걸, 라파예트는 스스로 흑화했다.
총부리를 아군에게 돌린 것이다.
막스가 혀를 차자 터커가 말했다.
"몇 개월 동안 남부에서 활동하던 스파이들 소식이 끊기거나 제거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라파예트와 관련되어 있겠지. 추가 작전은?”
“전부 취소했습니다.”
“의심되는 내부 조력자들은?”
“앨런 핑커톤과 함께 쳐내긴 했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누가 라파예트와 손잡았는지 가려내기 쉽지 않더라고요.”
‘라파예트에게 정보가 계속 넘어가겠군.’
“새로운 첩보활동은 계획하고 있어?”
“첩보 인원을 새로 꾸리려고 합니다. 라파예트와는 관련 없는 자들로요.”
“그 구분이 쉽겠어?”
“어렵겠죠. 그래서···.”
말끝을 흐린 터커가 입을 오물거린다.
부탁이 있어 보이는데, 말하기를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설마, 개념 없이 나보고 남군 첩자로 들어가라는 건 아니지?”
“에이,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럼 뭔데 말을 못 해?”
터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 피치 언제 복귀해요?”
“뒤질래? 지금 피치를 스파이로 만들겠다고!?”
“어우! 당연히 아니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피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아니, 차라리 저 대신 국장하라고 하면 안 됩니까? 피치 능력이 저보다 낫잖아요.”
막스가 터커의 머리를 후려쳤다.
“국장 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딴 소리를 하고 있어. 미쳤냐?”
“...... 죄송합니다.”
팔짱을 낀 막스가 터커를 응시했다.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한데?”
“일단, 새로 만들 첩보 조직을 여자들로 채울 생각이거든요.”
“너, 혹시 비방디에르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비방디에르(Vivandieres)는 프랑스에서 군대의 일원으로 포도주나 부대 편의를 제공하고 병자를 돌보는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언뜻 캠프 추종자들과 비슷하지만, 그들보단 더욱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구분되었다.
이를테면, 남북전쟁에서 활동하는 비방디에르는 스파이나 첩보원, 간호사 혹은 남장까지 한 군인들이었다.
그 수는 집계도 안 될뿐더러, 이름조차 남기는 건 극소수고 대부분 잊혀질 존재들이었다.
“언젠가 보스가 그러셨잖아요. 여자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 차라리 의욕 넘치는 비방디에르를 조직화하는 게 효율적일 거라고. 피치라면 아마 잘 관리할 수 있을 겁니다.”
막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SFBC에서 여자들을 뽑는다면, 비방디에르로 자리를 채울 생각이었다. 물론 전쟁 후의 이야기지만.
‘뭐, 지금부터 만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잠시 생각에 잠긴 막스가 물었다.
“케이트 와너는 지금 뭐 해?”
“라파예트 사건 이후 스파이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그렇다고 핑커톤에 들어간 건 아니고, 활동만 멈췄습니다.”
“그럼, 앨런에게 요청해. 케이트 와너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피치는요?”
“당연히 같이해야지.”
터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그려졌다.
“역시, 고민이 있거나 일이 막혔을 땐 보스를 찾아와야 한다니까요!”
“너무 자주 오진 마라. 국장이나 됐으면, 발걸음이 무거워야지.”
“알겠습니다!”
“밥이나 먹고 가.”
“당연히 그래야죠!”
터커는 싱글벙글 웃으며 막스와 사무실을 벗어났다. 오랜만에 터커를 본 대원들도 막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이구, 우리 국장님 오셨어요!?”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닥쳐, 새끼들아.”
“눼눼. 닥치라면 닥쳐야죠.”
대원들은 터커의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놀려댔다. 오랜만에 집에 온 가족을 맞이하듯, 터커를 중심으로 식사 시간이 시끌벅적했다.
*
막스의 요청으로 터커는 하루를 더 사령부에 머물게 됐다. 그날 저녁 커피를 마시던 중 막스가 넌지시 물었다.
“워싱턴은 어때?”
“뭐, 똑같죠.”
“진짜야?”
막스의 눈빛을 마주한 터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워싱턴에서 보스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어요.”
“내용은?”
“...... 맥클레란하고 다를 게 뭐냐고요.”
워싱턴의 의원들은 겨우내 군사 작전을 펼치지 않은 총사령관을 비판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공격할 틈이 보이면 맹렬히 물어뜯는 게 정치인들의 본성.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언론까지 동원해 여론을 악화시킬 테니까.
‘그런다고 내가 서두를 줄 알아?’
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력이 우세하다 해도, 작정하고 방어하는 남군을 부수는 건 쉽지 않다.
지형뿐 아니라, 빗장을 걸어 잠그고 공성전에 임하는 남군은 무적에 가깝다. 적군의 심장, 리치먼드를 공략하는 건 그만큼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더욱이 시간을 끌면 게릴라들과 민간인까지 북군을 괴롭히려 할 것이고. 설령 보급이라도 차단되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막심한 피해를 입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병사들만 갈려 나가는 전투를 해야 하는가?
막스는 보다 확실한 승리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정보를 역이용하고 적을 함정에 빠트리는 것.
흔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계책이다.
라파예트, 비방디에르, 워싱턴, 로버트 리.
그리고 율리시스 그랜트의 빅스버그 공략.
여러 키워드들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이를 조합해서 최선의 공략을 도출해야 한다.
‘그 첫 번째로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막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돌아가거든, 대통령과 섬너 장관에게 나를 비판하는 데 동참하라고 전해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필요하다면 갈등과 내분도 전략이 될 수 있는 거야. 일종의 심리전이지.”
막스가 설명을 이어갔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터커를 놀라게 할 만한 전략이었다.
‘진짜, 보스 머릿속엔 뭐가 있는 거야.’
총사령관은 전쟁을 길게 보지 않았다. 작전을 미루어볼 때, 단 몇 번 전투로 남부 연합을 무너트리려 했다.
터커가 워싱턴으로 돌아온 지 며칠 뒤.
국립 탐정 경찰국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터커는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케이트 와너.”
“에밀리도 합류한다면서요?”
“뉴욕 일이 정리되는 대로 올 겁니다.”
“걔 직급은요?”
경쟁의식을 불태우며, 날카로운 케이트의 눈빛이 터커를 향한다.
“...... 두 분이 똑같습니다.”
“근데, 에밀리는 아직도 대령인가요?”
“석 달 전, 직위 해제됐습니다.”
“어머, 잘렸어요?!?”
케이트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푸흐흐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이때.
문이 덜컥 열리며 허리가 잘록한 빅토리아식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들어섰다.
뉴욕에서 방금 도착한 피치.
그녀는 케이트를 가소롭게 쳐다봤다.
“잘린 게 아니라, 내가 요청한 거야 바보야.”
“아, 그럼 잘리기 전에 선수쳤구나?”
“너, 나한테 자격지심 있구나?”
피치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은 반달이 되어 조롱하듯 케이트를 쳐다봤다.
“미친년, 내가 너한테 왜 자격지심을 갖냐?”
“아니면 다행이고.”
“뭐냐, 진짜.”
‘앞으로 깜깜하구나.’
중간에 낀 터커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콜로라도 때도 그랬지만, 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간과했다.
터커는 입맛을 다시며 서류를 건네줬다.
“자자, 이렇게 모였으니까 바로 시작합시다. 비방디에르 운용 방안이니까, 보고 의견 줘요.”
언제 그랬냐는 듯, 케이트와 피치는 진지한 얼굴로 서류를 훑어봤다.
케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운용은 그렇다 치고, 모집하는 게 쉽지 않겠네. 비방디에르는 보통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잖아.”
“그건 애초에 정부에서 인정을 안 해줘서 생긴 문제야. 제약이 많다 보니까 음지로 숨어드는 거지.”
피치의 말에 케이트도 수긍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서 해결책은?”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건 어때?”
“그건 리스크가 크지 않아?”
“맞아, 피치. 그러다 라파예트 끄나풀이 또 달라붙으면 어떻게 해?”
터커까지 나서서 걱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피치는 괜한 걱정이라며 말을 이었다.
“터커, 보스가 정보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그랬는지 기억해?”
“신뢰성, 신속성...?”
“그리고 그걸 위해선 교차 검증이 필수적이라 했지.”
“교차 검증···.”
터커는 그제야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 역시 금방 이해한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피치가 말을 설명을 덧붙였다.
“비방디에르를 운용하는 방식은 점조직. 그렇게 되면 우리 셋만 알지 그들 개개인은 서로 알 수 없어. 정보가 왜곡되어도 분명 걸러낼 수 있을 거야.”
“역으로 배신자들을 추적할 수도 있겠네?”
“바로 그거지.”
케이트의 물음에 피치가 고개를 끄덕인다.
케이트는 피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너, 혹시 총사령관 만나고 왔냐?”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얼굴 까먹겠어.”
“뭐야, 그럼 전부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고?”
“당연하지. 이 정도는 해야 총사령관 옆에 붙어 다닐 수 있는 거야.”
“지랄.”
케이트가 코웃음 치던 때, 뭔가 생각난 듯 피치가 터커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터커. 워싱턴 분위기가 이상하던데. 왜 다들 총사령관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뭐, 정치적인 문제지.”
“의회는 그렇다 쳐도, 대통령까지 우리 보스를 비난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피치가 눈을 치켜뜨자, 터커가 케이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리 비켜줘요? 비밀 얘기라도 있나 보네요.”
“그건 아닙니다.”
터커가 피치를 보며 미소를 보였다.
“일단 대통령의 진심은 아니야. 모든 건 총사령관님의 뜻대로 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음. 그럼 다행이고.”
“열녀 났구만, 열녀 났어.”
케이트의 비아냥에 피치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내조가 어디 쉬운줄 아냐. 하긴 네가 뭘 알겠냐.”
“정 뭣하면 소개라도 시켜주던가!”
“내가 왜? 무슨 욕을 먹으려고?”
“욕? 나처럼 예쁘고 똑부러지는 여자를 소개해주는데 욕을 왜 먹냐?”
“착각도 그 정도면 병이다.”
터커는 한숨을 크게 들이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들 하고. 일단 피치가 제안한 걸로 갑시다. 기획안 만들어서 섬너 장관에게 내야 하니까, 서두르자고요.”
피치와 케이트는 국립 탐정 경찰국 소속의 감독관이 되었다. 주 임무는 남부 연합 첩보 및 정보 수집, 교란과 선동이었다.
*
버지니아 매나사스 사령부.
겨울이 끝나고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단단한 땅이 녹고 새싹들이 주변을 녹색으로 물들여 간다.
누가 먼저 움직일지, 남군과 북군의 눈치 싸움도 서서히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