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간사한 새끼
미국 정부에서 막스에게 요구한 건 두 가지.
제네럴막스호 침몰 사건 진상 조사.
그리고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외적 명분일 뿐.
대통령과 장관들은 총사령관에게 모든 걸 위임했다. 돌발적인 사태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막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번 조선 원정에서 핵심은.’
한 인물을 포섭하는 일.
조선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물.
후대에도 논란이 많은 인물.
흥선대원군을 구슬려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 그가 처한 상황을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왕으로 내세우기 위해, 효명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했다.
현재 어린 고종을 대신해 효명세자의 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하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왕의 생부이나, 상왕도 아닌 경우는 조선 역사상 흥선대원군이 처음. 그 권한과 위치는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 즉위 1년.
세도정치를 이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는 여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있고. 흥선대원군이 자리를 보전하려면 그들의 힘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결국 왕권을 강화하는 게 곧 자신을 위한 길일 터.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가난하다.
토목공사에 나라가 휘청일 정도로 국가 재정이 형편없었다.
상업을 천시하고 농업만을 중시한 조선은 화폐조차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조선이 통상을 거절한 건 서양과 교류할만한 마땅한 게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기하고 휘황찬란한 물건들과 바꿀만한 건, 땅덩이와 사람뿐. 자연스레 약탈로 인식되는 흐름이었다.
사대주의에 빠진 양반과 사대부는 아직도 숭명사상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고, 그들은 청나라가 기독교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도 지켜봤을 것이다.
유교 중심의 조선으로선 쇄국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은 조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
조선으로 진입하기 전.
막스는 함대를 이끌고 제주도와 쓰시마를 지나, 일본 시모노세키 해협을 들렀다.
연료와 식량 보충, 그리고 다른 열강들의 함선들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시모노세키항에는 서양 함선들이 잔뜩이었다.
7개월 전, 4개국이 연합해 이곳을 공격한 뒤로 여전히 이곳에서 죽치고 있었다.
미국 함선 열 척이 들어서자 해안가에 있던 일본인들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미 정박해있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함선들 역시 중무장한 미국 함선을 보며 점차 눈을 치켜떴다.
정박한 함선 중엔 작년 4개국 연합 전선에 합류했던 아군 USS 타키앙호도 있었다.
“어이구, 아주 작살을 내놨구만.”
막스는 갑판에 서서 해안가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바라봤다. 부서지고 침몰한 조슈번의 조악한 함선들의 잔해물이었다.
“리지리 대령. 여기서 일단 연료와 식료품을 조달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중국 주재 총영사와 와이오밍 함장에게도 연락해두세요.”
“함정 한 대를 중국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리지리 대령은 막스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막스가 서부 사령관이던 때, 그는 테네시 포트 헨리 함락에 참가한 장교였다.
당시 막스의 오버런 작전을 감탄했던 대위가 지금은 대령이 되었고, 서부 사령관은 총사령관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다른 함장들도 마찬가지.
남북전쟁 내내 미시시피강과 남부 해역에서 해전을 치른 경험이 풍부한 해군 장교들이었다.
배가 정박하자, 미리 이곳에 죽치고 있던 타키앙호의 함장이 막스를 찾아왔다.
그는 급하게 달려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태평양 함대 타키앙호 함장 프레드릭 피어슨 소령입니다!”
“반갑습니다. 총사령관 막스 조입니다.”
“여기까지 직접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진짜 영광입니다!”
“이 먼 곳에서 애쓰시는 분을 만났으니, 제가 더 영광이지요.”
“어이구. 말씀도 참.”
피어스는 입이 귀에 걸린 채 말을 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다른 나라 군인들 사이에서도 총사령관님이 엄청 유명거든요. 포트 헨리부터 게티즈버그, 빅스버그, 로버트 리 장군에게 항복 받은 것까지. 전부 알고 있다니까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부탁할 게 하나 있습니다.”
“어이구, 말씀만 하십시오!”
막스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피어슨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조선을요?”
“예. 짧고 굵게 가야죠. 이왕 온 김에 결과물은 가져가야지 않겠습니까.”
피어슨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뜻을 물어보겠습니다.”
피어슨은 리지리 대령과 함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함장들을 찾아갔다.
막스가 끌고 온 열 척의 함선에는 2천 7백여 명의 군인이 탑승해 있었다.
오랜 항해 끝에 땅을 밟은 SFBC 대원들과 군인들은 이리저리 몸을 풀며 항구를 어슬렁거렸다.
막스와 피치는 오붓하게 해안을 걸었다.
그런데 잠시 후, 능선 뒤에서 사무라이 열댓 명이 나타났다.
그걸 본 막스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젠 사무라이들까지 보는구나.’
“데이트는 끝난 것 같네.”
“쳇. 분위기 다 깨네. 근데 어린 애들이 저렇게 칼 차고 다녀도 되는 거야?”
“······”
막스가 유독 큰 탓도 있지만, 확실히 사무라이들의 키가 작긴하다.
막스는 실눈을 뜨고 엄지와 검지로 키를 가늠해봤다.
어디선가 사무라이들 평균 신장이 150cm라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 정도였다.
사무라이들이 미국 함선 쪽으로 다가오자, USS 치코피호 함장 바체 소령이 그들을 응대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던 바체 소령이 막스를 힐끔거린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막스와 피치가 다가가자 바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갑자기 많은 함선이 와서 의도가 뭐냐고 묻네요. 식량과 연료 때문이라고 하니까 그 정도로 풍족하지 않다면서, 다른 항구로 가달랍니다.”
사무라이들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막스를 유심히 쳐다본다.
둘의 군복을 훑어보고, 일부는 서양 여자가 처음인 듯 노골적으로 피치의 몸매를 쳐다봤다.
막스가 고개를 좌우로 비틀던 때.
“당신이 이들 상관인가?”
선두에 있던 사무라이 한 명이 어눌한 영어로 물었다. 막스는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네?”
“난 조슈번의 통역을 맡고 있다.”
“그래? 그럼 저 눈깔들 돌리라고 해. 뽑아버리기 전에.”
“······”
통역사의 얼굴이 굳어지자 바체 소령은 막스의 눈치를 살폈다.
막스가 가보라고 손짓하자 그는 두말없이 함선으로 돌아갔다.
“우린 오래 있을 생각도 없고, 여력이 닿는 데까지만 자원을 보충하면 된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통역사는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사무라이들에게 말을 전달했다.
그 모습을 본 막스의 눈빛에 이채가 서렷다.
‘조슈번의 통역관이라.’
나이도 젊어서 이제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흥미가 생긴 막스가 물었다.
“영어는 어디서 배웠지?”
“1년 동안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남자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마치 ‘미국보다 뛰어난 영국을 갔다 왔어, 대단하지?’ 이런 표정이었다.
‘병신.’
“유학은 몇 명이나 다녀왔는데?”
“나 포함해서 다섯이다.”
“존왕양이를 외치는 조슈번에서 유학이라니. 모순 아닌가?”
“······ 지금은 개국론으로 전환한 자들이 더 많다.”
일본은 개항이 이루어진 직후,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유럽으로 파견했다.
언어와 신문물을 접한 그들은 곧 메이지유신의 핵심이 되어 일본의 미래를 이끌어갈 터.
‘너도 그중 하나겠지.’
훗날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네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
“!”
‘이 좆만한 새끼가···?’
*
막스의 강렬한 시선을 마주한 이토 히로부미는 아까부터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스카프 위로 드러난 눈매는 분명 서양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 나와 같은 동양인인 것 같은데?”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거든.”
“그래서 어느 나라 출신이지?”
“궁금해?”
막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스카프를 내렸다.
“난 조선인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뒤에 있던 사무라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조, 조센징!”
이 시대 조선인은 조센징이 맞다.
분명 욕은 아닌데, 기분이 더러웠다.
“어떻게 조선인이 저들의 상관이 되었지?”
“나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혹시 가려는 곳이···?”
“조선.”
“훗.”
‘이게 비웃어?’
“쓸데없는 짓이다. 조선 정벌 이후, 그 나라는 쇄국을 고수하고 있으니까. 우리 일본과 달리 조선은 열어봐야 별거 없다는 거,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 가난한 조선은 아무것도 먹을 게 없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조선을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거고. 미국은 특이하네.”
이토 히로부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나저나, 미국에서 꽤 오래 생활한 것 같은데. 계속 거기 있을 건가? 당신 지식과 경험이라면 이곳에서 중용될 수 있을 텐데.”
“중용?”
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해군 장교로 만족할 거야?”
‘해군 장교라. 하여간 간사한 새끼.’
막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선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안 고맙다. 생각해 볼게, 나도 미래를 준비해야 하니까.”
“현명한 친구군. 근데 이름을 아직 모른다.”
“이막산.”
이토 히로부미는 기억하려는 듯 이름을 곱씹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막스가 몸을 돌리자 피치가 바로 따라붙었다.
함선으로 가던 중 피치가 물었다.
“대화 분위기가 묘하던데?”
“어떤데?”
“날이 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널 그냥 해군 장교로 아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인가 그 남자 어때?”
“어떠냐고?”
막스는 피치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냥 개새끼야.”
이토 히로부미를 만난 막스는 조선을 반드시 개항시키겠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그리고 일본은.
‘혼돈의 카오스로 만들어 주마.’
*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함장에게 전달은 했습니다.”
“반응은 어떻습니까?”
리지리 대령은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다들 관심은 있는 것 같더군요. 어차피 우리가 총대를 메기로 한 거라, 지켜본 뒤 행동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시모노세키 항구에 머문 지 이틀.
조선 원정대는 일본을 떠나 조선 남해로 진입, 다시 서해를 따라 북상했다.
리지리 대령은 막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보이진 않지만, 저 해안선 너머엔 조선이 있었다.
“순순히 통상에 응할까요?”
“그랬다면 벌써 개항했겠죠.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죠.”
“처음이요?”
“예. 진지하게 조선에 대포를 쏟아붓는 건 우리가 처음이라는 소립니다.”
아직 프랑스가 쳐들어오기 전.
즉, 병인양요가 벌어지기 전이었다.
얼마 전 러시아 제국이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이 거절하자 두말없이 돌아갔다.
중국과 일본이 열강들에게 얻어터지는 동안, 조선은 이렇듯 평화롭기만 했다.
“지금껏 조선은 제대로 된 압박과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처음은 강렬하고 충격적일수록 효과적이죠.”
조선이 쇄국을 고수한 건 나름 프랑스와 미국의 잘못도 있었다.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일으켰지만 패배했고.
자신감을 얻은 조선은 신미양요 때 더욱 적극적인 교전을 펼쳐 미국도 퇴각시켜버렸다. 사실상 아무런 이득이 없어 미국이 후퇴한걸, 조선은 자신들의 힘으로 착각했다.
‘이럴 땐 현실을 깨닫게 해줘야지.’
조선의 도성으로 향하려면 강화도를 거쳐야 한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막스는 함선 한 척을 먼저 보내 수로와 수심을 확인토록 했다.
동시에 관리에 편지를 전달했다.
제네럴막스조호를 침몰시킨 이유를 따져 묻고, 통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열 척이 넘는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함선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강제 개항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미국이 나서서 뚫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서해 앞바다에 모인 다국적 깡패들이 총 23척.
연장을 가득 실은 출렁거리는 배조차 껄렁껄렁해 보인다.
‘이래도 안 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