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9화 (259/360)

#259 조미수호통상조약

“굵직한 내용은 중국과 일본이 맺은 통상 조약과 다를 바가 없소. 자국민 보호와 권리, 관세에 관한 게 주 내용이요.”

흥선대원군은 협정서 겉표지만 응시할 뿐 읽지는 않았다.

설마 또 거절하려는 건가.

슬슬 짜증이 난 막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나도 많이 참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이씨 조선과 사대부들을 아주 박살···.’

이때 흥선대원군이 고개를 들어 막스를 응시한다.

“통상에 응하겠네.”

‘음?’

“...... 잘 선택하셨소.”

“선택은 무슨. 어차피 답은 정해진 것 아닌가.”

흥선대원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거절하면 공격하겠다는데 과연 조선에 선택권이 있었던가.

이미 정해진 답을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한편으론 총사령관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좋게 보면 총사령관은 조선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다. 애초에 군인들이 도성으로 쳐들어왔다면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심력을 허비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복잡한 눈빛이 어느 정도 갈무리되었을 때. 흥선대원군이 막스에게 물었다.

“미국이 러시아를 막아 줄 수 있나?”

“시간은 벌어줄 수 있소.”

“일주일도 시간은 시간이지.”

“그건 너무 극단적이고. 내가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인 이유가 뭐겠소? 미국 혼자 무역을 독식하면 될 텐데.”

막스는 흥선대원군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조선이 여러 국가와 통상 조약을 맺으면 러시아는 생각이 많아질 거요. 조선에 무력을 행사하기엔 걸리적거리는 게 늘어난 셈이니까.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같은 조건으로 통상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겠소?”

문제는 러시아가 아니다.

조선을 위협하는 국가는 따로 있었다.

“왜놈들이 더 위험하다 이건가?”

“한 번 들어보시겠소? 개항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를.”

막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자고로 왜구는 신의가 없고, 교활하고, 흉악하여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라 이순신 장군께서 말씀하셨소.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힘을 키웠을 때, 또다시 임진왜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이거요.”

“막부와 다이묘 사이에서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들었네만.”

“무릇 내란은 곪은 게 터져 새 살이 돋아나는 과정이기도 하오. 막부가 무너지고 왕권 체제로 바뀌면 그들은 빠르게 힘을 키울 거요.”

그런 다음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할 것이다.

“만약 대원군께서 쇄국을 고집했다면, 이 나라의 개화를 꿈꾸던 이들이 어디로 가겠소?”

“.......”

“가까운 일본으로 갈 거요. 그리곤 친일 세력이 되어 조선을 망하게 하는 데 앞장서겠지. 어차피 조선이 러시아, 청나라, 일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건 빤하지 않소?”

흥선대원군의 안색이 굳어졌다.

최악의 가정만 늘어놓았지만, 총사령관의 말대로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건 반드시 막아야 했다.

‘결국 나라를 빼앗기면, 내정이고 뭐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아닌가.’

흥선대원군은 막스의 생각이 더 궁금해졌다.

“개항하면 조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항구를 개방하고 서양인들이 가져오는 물건들을 구경하면 되오. 필요하면 사고, 그들이 원하는 게 있으면 팔면 되는 거니, 그걸 잘 관리하는 게 첫 번째 아니겠소?”

“하면 두 번째는 무엇인가?”

“개항으로 인한 문젯거리를 제거하는 일이오.”

“문젯거리?”

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서양을 배척하는 위정척사 무리와 왕실 권한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일이오.”

“사대부와 유림을 말하는 거라면, 이미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 않았나.”

“물론 당장 하라는 말은 아니오. 다만, 대원군께서 진정 원하는 걸 얻으려면 한 번에 끝장낼 필요가 있소.”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은 막스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그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 나왔다.

“신분제 철폐. 왕족 밑으로 전부 평등한 존재로 만들면 해결될 일이오.”

흥선대원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머릿속에 큰 폭풍이 몰아쳤다.

그걸 시행했다간, 전국에 있는 양반들이 궁궐로 몰려 들어올 게 빤하였으니 말이다.

“매사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면 되겠소? 조선의 부국강병을 바란다면 그 본보기를 영국으로 삼으면 될 것이오. 물론 안 좋은 건 빼고.”

영토는 조선과 비슷하나 세계 최선진에 있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강력한 왕권을 가졌지만, 시민계급 사회가 나라를 지탱하는 나라.

“영국의 왕실이 존중받는 건 그 나라 백성들이 자유롭고 잘 먹고 잘살기 때문이오. 그러니 귀족들은 오히려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왕실을 떠받들 수밖에 없는 거고.”

막스는 영국을 사례로 들어 흥선대원군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듣기엔 좋아도 그걸 따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농업에 의존하는 조선의 경제 체계로는 한계가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이제 개인적인 사업에 대해 말해봅시다.”

“사업?”

막스는 품에서 총알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걸 본 흥선대원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게 무엇인가?”

“내가 직접 만든 총알이오.”

“총알이 어찌 그리 뾰족하단 말인가.”

“뾰족하기에 정확하고 사정거리가 긴 법이라오. 현재로선 이걸 쓰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소. 허나, 내 장담하건데 전 세계에서 머지않아 이 총알을 쓰게 될 거요.”

“그런데 그걸 자네가 만들었다?”

“놀랄 것 없소. 수백 가지 중에 하나에 불과하니까.”

‘수백 가지나?’

흥선대원군은 입을 닫은 채 막스가 또다시 품속에서 꺼내는 걸 지켜봤다.

이번엔 번쩍번쩍 빛나는 주먹 만한 금덩이였다.

“주머니 속에서 별게 다 나오는군.”

“놀라지 마시오. 우리 집 앞마당에서 캔 금이니까.”

“......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미국에 내 금광이 있고, 그 앞에 내 집이 있소. 그러니 틀린 말은 아니지.”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역시 왕족이라 금을 봐도 눈 하나 꿈쩍 안 하시는구려. 아무튼.”

막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조선에서 자원을 채굴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뭣이? 이 땅을 수탈하겠다는···.”

“그게 금이라면 제반 비용을 뺀 절반을 국고에 지급하고. 거기서 얻은 이익금 역시 조선을 벗어나지 않을 거요.”

“음?”

분노하던 흥선대원군이 이내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 나라의 자원으로 얻은 이익으론 공장을 세우는 데 쓰고, 그 물건은 아시아 전역에 팔려나갈 것이오.”

막스가 총알을 들어 보였다.

“물건을 팔아 생긴 세금은 왕실을 부유하게 만들고. 단 일 년이면 경복궁 중건 예산은 충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소.”

“그 총알 하나로 가능하단 말인가?”

“...... 이 총알은 그냥 자랑하려 보여준 거고. 내 수백 가지가 있다 하지 않았소.”

막스는 흥선대원군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입증할 테니, 미국으로 보낼 사절단을 꾸려 주시오. 그들이 조선의 산업화에 물꼬를 트게 도와주겠소. 지금처럼 주변 국가에 눈치 보지 않는 강력한 조선! 아직 늦지 않았소.”

‘청과 일본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나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흥선대원군의 마음속에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막스는 더는 말이 필요 없다며 최종 시일을 못 박았다. 어차피 서로 검토하고 조율하는 시간은 필요했으니까.

“협정을 체결하는 건 사흘 뒤로 합시다.”

*

회담이 끝나고 양측은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돌아가는 길 막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길고 긴 회담. 조금은 답답한 때도 있었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하지만.

‘그놈의 하오체 쓰기 싫어서라도 조선은 오지 말아야겠다.’

어차피 길만 닦아놓으면 되는 일.

나머지는 직원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총사령관님. 저쪽 영의정이 무례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할까요?”

앤슨은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듯 시종일관 김병학 이야기였다. 막스는 피식하며 말했다.

“그건 두고두고 이용해야죠. 오히려 전 대원군이 그를 내칠까 봐 걱정입니다."

회담을 마치고 도성으로 향하는 길.

흥선대원군은 가마의 창문 틈으로 빼꼼히 김병학을 쳐다봤다.

“오늘 일은 순전히 영의정 탓이오.”

“......”

“통상의 결과가 잘못되면, 그 또한 영의정 탓이오.”

“..... 송구하옵니다.”

흥선대원군의 머리가 다시 가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김병학은 하늘을 쳐다보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 한숨이 흥선대원군의 귀에도 들려왔다.

잠시 후.

가마 안에서 대원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오경석과 박규수를 만나야겠소.”

그날 저녁.

창덕궁에 통상 결과를 던져둔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거처 운현궁에서 두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대감을 뵈옵니다.”

중국에서 역관으로 일하던 오경석.

그는 현지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하는 업무를 맡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박규수.

연암 박지원의 자손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서 두어 번 간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원 역사에서 이들은 개화파의 시조들로,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을 길러낸 인물들이었다.

“오늘 미리견과 통상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네.”

흥선대원군의 말에 오경석과 박규수의 얼굴에 놀라움이 드러났다.

프랑스의 힘을 빌러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흥선대원군은, 얼마 전 그 태도를 바꿔 쇄국으로 굳히려 했었다.

그 때문에 오경석과 박규수를 오히려 멀리하며 대원군 앞에선 개화의 ‘개’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그대들이 원하는 바였으니, 마음속으론 꽤나 기쁘겠군.”

“무력을 앞세워 강제 개항하는 건 해적들이나 하는 짓인데, 어찌 기쁘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말씀이옵니다.”

“조선이 이렇듯 억울한 처지에 놓였으니, 그야말로 통탄할 노릇이 아니옵니까.”

흥선대원군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개항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일. 오늘에서야 조선이 처한 현실을 톡톡히 깨달을 수 있었네.”

“······”

“해서 둘에게 묻겠네만. 미리견을 어찌 생각하는가?”

오경석이 고개를 들어 입을 떼었다.

“청나라에서 지켜본바, 미리견은 다른 열강들에 비해 덜 침략적인 국가이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중국은 예로부터, 이이제이라 하여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압하는 전략을 취했었습니다. 해서 영길리와 법국, 아라사(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청나라는 미리견과 손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몇 년 뒤 청나라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책략>이라는 걸 서술했는데.

청-조선-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외교적 동맹을 기본 전략으로 내세웠다.

“첫 통상 국가로 미리견이 나쁘지 않다 이 말이군.”

“다른 열강보다야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면 이왕 맺을 거, 미리견을 조선의 최혜국으로 삼는 건 어떠한가?”

어차피 미국 다음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모두 같은 조건으로 통상을 요구할 터.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애초에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자 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미 결정을 내린 뒤 물은 거지만, 둘은 대답이 없었다. 한 번 최혜국의 대우를 정하면 바꾸기도 힘든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미리견 총사령관이 직접 통상을 하러 찾아왔네.”

“총사령관이요?”

“나라의 군인을 통솔하는 최고 책임자라더군.”

“그런 자가 어찌 여기까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흥선대원군이 턱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총사령관이 조선인이었다네.”

오경석과 박규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흥선대원군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조만간 미리견에 사절단을 보낼 생각이네. 자네들 포함, 스무명의 명단을 내게 가져오게.”

*

통상 협정 체결 당일 오전.

창덕궁 밖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양반들을 필두로 평민들까지, 죄다 땅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고, 통곡하며 목 놓아 소리쳤다.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멀리해야 할 때. 어찌 사교를 이 나라에 끌어들인단 말입니까!”

“오랑캐의 협박에 굴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공자께서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옵니다!”

망원정으로 향하는 길을 막아선 자들.

한양의 유생들이 땅을 치면 연습이라도 한 듯 이를 평민들이 따라 했다.

일부 대신들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 역시 조선의 개항을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유생들이 막스가 말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였다.

암살 위협에서 벗어나려 평민들과 어울리던 시절. 거들먹거리던 양반들과 유생들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선을 병들게 한 게 바로 네 놈들이다!’

이는 곧 흥선대원군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

“오늘 우리가 외세에 굴복해 문을 여는 건. 나라에 힘이 없기 때문이요, 싸울 무기와 병사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나라에 돈이 없어서라는 걸 그대들은 알 것이다. 헌데!”

대원군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세금을 내지 않으려 서원을 마구 지어대고, 다른 나라의 조상을 제사 지낸답시고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었다! 그대들이 오랑캐와 다른 점은 무엇이며, 그때는 나라의 위기가 보이지 않았거늘, 어찌 지금은 보인단 말인가!”

흥선대원군의 일갈에 통곡은 더욱 커져만 갔다. 유생들은 땅에 머리를 박으며 나라가 망할 것처럼 슬퍼했다.

‘내 총사령관의 마음을 이해하겠구나.’

흥선대원군은 싸늘한 시선으로 유생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당장 길을 트거라!”

*

망원정에서 역사적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앤슨 총영사와 우의정이 조약을 체결하는 동안, 흥선대원군은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막스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 둘은 말을 섞지 않았다.

그리고 강화도로 돌아온 날.

피치가 막스를 함선의 은밀한 곳으로 불러냈다.

“여기서는 좀 그런데···.”

“어우, 응큼하게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짐칸에 간 피치는 주변을 둘러보곤 이내 속삭이듯 말했다.

“헤이 키드. 컴온~.”

잠시 후.

나무 상자가 열리더니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발한 머리에 때 구정물이 가득한 얼굴.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막스를 보자마자 상자를 뛰쳐나온 소년은 바짓가랑이부터 붙잡았다.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나리! 추노들이 저를 쫓고 있습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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