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조선의 아이
“이름이 뭐야?”
“아저씨, 조선인이었어요!?”
놀란 아이는 이내 눈물을 훔치며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고유지요.”
“고유지?”
“예. 울 어무이가 노비 말고 지역 유지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라고 지어 주셨어요. 근데 이젠 바뀌었어요.”
아이가 품에서 옥비녀를 꺼냈다.
어머니가 죽으면서 건네줬다 했다.
“주인 대감이 울 어무이를 다른 집으로 보내려 했어요. 아부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첩으로 보낸다면서요. 어무이가 엄청 미인이거든요.”
해서 도망치다 어머니는 죽고, 그 직전에 옥비녀를 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하길.
“어무이가 유지는 안 되어도 되니, 자유롭게 살다 죽으라 하셨어요.”
또다시 고유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용은 모르지만 피치 역시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를 바라봤다. 결혼 뒤 부쩍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막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피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 외유장각인가, 그 건물 옆에 숨어 있는 걸 코디가 발견했대. 쫓아냈는데도 계속 따라와서 그냥 데려왔더라고.”
막스는 다시 고유지를 보며 물었다.
“우리랑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았어?”
“총도 있고 막, 얼굴도 우락부락해서. 아, 여기 있으면 추노도 못 덤비겠구나, 싶었어요. 근데, 아저씬 서양 말도 엄청 잘 하시네요?”
고유지가 눈을 말똥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식하던 막스는 이내 정색하며 물었다.
“우린 곧 떠날 텐데. 따라가고 싶어?”
“······ 예. 아저씨가 가는 곳에 떨궈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어요.”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우리 어엄청 멀리 가는데?”
그래도 상관없다며 아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무이 유지를 받들어 자유롭게 살면 그만이어요. 제 이름은 그래서 유지인 거에요.”
고유지는 지역 유지(有志)에서 죽은 어머니의 유지(遺旨)를 받들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 했다.
아이답지 않은 씁쓸한 각오였다.
팔짱을 낀 막스는 피치와 이 일을 상의했다.
피치는 데려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막스도 같은 생각이었다.
훗날 막스 대신 조선을 관리할 인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하지만 가기 전에 미리 경고는 해두어야 했다. 사기꾼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데려가는 건 어렵지 않지. 대신, 우리와 지내는 게 힘들 수도 있어.”
“먹고 자는 건 신경 쓰지 마세요! 구걸해서라도 먹고 살 수 있어요!”
“좋은 정신이다.”
막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유지의 앞머리를 헝클었다.
손에 기름이 잔뜩 묻어났다.
“조선을 떠날 때까진 여기서 숨어 있어. 근데, 몇 살이라고?”
“열 살이요.”
“일단 좀 먹어야겠다.”
비쩍 마른 몸을 보면 황야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던 이막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막스는 피치에게 먹을 걸 챙겨주라고 일러준 뒤 갑판으로 올라갔다.
시원한 바람 속엔 바다의 짠내가 섞여 있다.
막스는 육지에서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는 총영사 앤슨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다른 국가 함장들과 통상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조선이 문을 열고 통상에 응했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즉시 중국에 있는 자국 영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머지않아 조선을 찾아와 통상 조약을 요구할 것이 빤하였다.
다음 날.
나무로 만든 배 두 척이 함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관아에서 물자를 옮길 때 사용하는 관선으로, 약속대로 외규장각의 물품과 서책들을 싣기 위한 배였다.
- 나라의 귀한 물건들을 보관하기엔 강화도는 위험하오. 차라리 도성 깊숙한 곳이나, 동쪽에다 보관하는 편이 어떻겠소?
원 역사에서 강화도는 숱하게 외세에 침략당하는 곳이다. 흥선대원군은 막스의 조언에 따라 외규장각의 모든 물건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온 관선에는 짐꾼이라기엔 말쑥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흥선대원군도 함께였다.
‘저들인가.’
막스는 함선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SFBC 대원들과 군인들도 모여들었다.
조선인들은 바닷바람에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땅에 발을 내디뎠다.
“이들이 총사령관과 함께 갈 사절단이오. 총 스물이니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고 알려주시길 바라오.”
흥선대원군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에 있는 자들을 가리켰다.
소문으로만 듣던 조선인 총사령관을 본 그들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였다. 호기심과 감탄이 서려 있었다.
막스는 사절단을 훑어본 뒤 흥선대원군에게 말을 건넸다.
“가는 길에 일본을 들를 생각이오. 길게는 닷새 정도 머물 것 같은데, 괜찮겠소?”
“저들을 일본에 팔아넘길 생각만 아니라면 괜찮네.”
“설마요.”
“흠. 잠시 시간 되는가?”
‘그놈의 대화는.’
막스는 속내와 달리 미소를 지으며 임시 천막이 세워진 곳으로 대원군을 안내했다.
“강화도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킬 생각인가?”
의자에 앉자마자 대원군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일부라도 놔두었으면 하네.”
“외세를 견제하기 위해서요, 아니면 반란을 막기 위해서요?”
“둘 다일세. 급작스러운 변화에는 부작용이 따르는 법. 사대부들과 외적들을 억제하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네.”
막스는 잠시 생각한 끝에 말을 이었다.
“함선 한 척을 남겨두겠소. 또한 도성의 병력을 무장할 무기도 제공하리다.”
“무기까지?”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소. 일전에 말한 자원 탐사와 채굴의 독점적 지위를 주셔야 하오.”
이미 조선에는 금 채굴장이 3천 곳이나 되었다.
조선 초기엔 관에서 관리했지만, 현재는 민간인에게 넘기고 세수가 부족할 땐 군이나 관에서 직접 채굴하는 체계였다.
막스가 원하는 건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탐사하여 채굴하는 것이었다.
“약속대로 우리 백성을 고용하고 세금을 제대로 낸다면 가능하네.”
“그럼 합의한 걸로 알겠소.”
막스는 구체적인 계약은 앤슨 총영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나저나, 경복궁 중건은 계속해서 밀어붙일 생각이오?”
“왜, 그것도 불만인가?”
“불만이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굳이 이 혼란한 시기에 중건할 이유가 무엇이오? 그 돈이면 당장 다른 일을 추진해야지 않겠소?”
이를테면 당장 제철소부터 세우는 게 급선무였다.
일본은 일찍이 네덜란드와 교류하여 1861년에 나가사키 제철소를 완공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금 시작한다 해도 5년이나 뒤처졌소. 일본은 철로 된 함선들을 건조 중인데, 조선은 아직도 나무로 배를 만들고 있으니 무슨 수로 그들을 막겠소?”
흥선대원군의 시선이 철로 만들어진 함선을 향했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 조선의 배로 옮겨졌다.
비록 관선이라 하나,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초라해 보였다.
“제철소라.”
“사절단이 돌아오는 길에 기술자들을 딸려 보내겠소.”
“흠. 그럼 자네 말대로 경복궁 중건은 잠시 보류하도록 하겠네.”
시작은 어렵지만, 한번 물꼬를 튼 이상 흥선대원군의 결정은 거침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경복궁 중건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막스가 알려준 영국을 조선의 이상향으로 생각했다.
‘강력한 국가가 곧 강력한 왕권을 갖는다.’
이 같은 생각이 만고의 진리처럼 흥선대원군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다. 그 때문에 걸리적거리는 건 곧 왕권을 위협하는 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끝나고 헤어질 무렵.
아쉬움이 남는지 흥선대원군이 쉽게 발을 떼지 못하였다.
마음 같아선 막스를 옆에 두고 수시로 정보도 얻고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총사령관은 언제까지 하는 건가?”
“돌아가는 대로 넘길 생각이오.”
“그 이후엔?”
“하던 사업을 계속해야겠지. 왜, 나를 영입이라도 하고 싶소?”
“흠. 그러기엔 조선이 너무 작아 보이네.”
막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소. 조선을 큰물로 만드는 것. 대원군과 내가 그리 만들면, 조선과 미국에 무슨 차이가 있겠소.”
“내 세상 물정은 어두우나, 자네 말솜씨가 천하제일임은 알 것 같네.”
흥선대원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
“흠.”
막스는 잠시 고민하다 대원군을 응시하며 입을 뗐다.
“모름지기 며느리를 잘 봐야 하오.”
‘갑자기?’
흥선대원군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며느리 이야기가 튀어나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하필 시기가 공교롭지 않은가.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 조만간 왕비를 간택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며느리까지 자네의 의견을 묻고 싶진 않네만.”
“들어서 나쁠 건 없을 거요. 범을 피하려다 여우를 만나면 그거야말로 큰일 아니겠소?”
흥선대원군의 눈이 가늘어졌다.
범은 현재 조선을 양분하다시피 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말함이오, 여우는 그 밑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세가 들을 가리키는 것일 터.
해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제외한 다른 세가에서 왕비를 간택하려 했다. 그런데 상대는 자신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지 않은가.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실로 놀라운 자로다.’
미국 총사령관의 혜안에 흥선대원군은 귀가 솔깃했다.
한편, 막스는 어쩌면 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민비의 등장을 우려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싹이 자라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민비 만의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솔직히 가장 우려스러운 건 지금의 왕이요.”
현재 조선은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신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실제 섭정은 흥선대원군이 하고 있었다.
“나이가 차 스스로 친정하게 되면 그땐 대원군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소?”
“...... 전하는 그럴 분이 아니네.”
“본래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오. 밤마다 왕에게 속삭이는데 그 누가 무덤덤하겠소? 왕이지만 모든 권력이 대원군에게 쏠려 있다면, 둘 중 한 명은 불만을 가질 거요.”
‘감히 왕에게 그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듣기는 거북해도, 그 역시 이 점을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을 축출하려 든다면, 반대 세력. 즉, 사대부들과 심지어 청과 일본을 끌어들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왕비 간택 말고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막스 말마따나 상대가 여우라면 더더욱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답답하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엔 민감한 문제다. 왕을 견제한다는 건 결국 역모를 꾸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대화는 여기까지일세.”
막스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헤어지나 싶었는데, 등을 돌린 흥선대원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겠네.”
“얼마든지요.”
여차하면 왕이든 왕비든, 흥선대원군이 암살을 원한다면 해줄 의향도 있다. 그게 조선을 위하고 막스에게 이익이 된다면.
‘당신도 예외는 아니지. 걸리적거리면 칼날은 흥선대원군, 당신에게로 향할 거요.’
*
막스는 남군에게서 빼앗은 라이플 천정을 조선에 선물했다. 그러고도 배에는 만 정이 넘는 리볼버와 라이플이 실려 있었다.
“본국에 가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총사령관님!”
“가는 길 몸조심하십시오!”
“그럼 고생하십시오, 앤슨 총영사관, 맥두걸 대령, 피어슨 소령.”
함선 열 척이 강화도를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총영사 앤슨과 중국에 주둔했던 USS 와이오밍호,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있었던 USS 타키앙호는 강화도에 남아 그곳을 지켰다.
갑곶진 성곽에 배치된 개틀링 기관총 삼 문과 함선에 실린 박격포라면, 조선이든 외세든 쉽게 당하지 않을 전력이었다.
“오래전부터 서양을 직접 보는 게 제 꿈이었습니다.”
막스는 갑판에서 사절단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박규수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머나먼 여정에 기꺼이 동참했다.
원 역사에서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평안도 관찰사였다. 개화파 시조인 그가 배를 불태울 만큼 그들이 평양에서 깽판을 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너럴막스조호는 박규수가 아닌 다른 자였다.
사절단은 전부 양반 집 자제들로 꾸려졌다.
오경석은 막스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나머지는 갓 스물이 넘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만큼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도 많았다.
“미국은 청나라만큼 크다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어떻게 미국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던 겁니까?”
“조선에선 원래 무엇을 하셨습니까?”
“미국의 왕을 직접 만나 봤습니까?”
“결혼은 했습니까?”
‘벌써부터 피곤하네.’
막스는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미국은 대략 조선보다 50배 큽니다.”
“오오!”
“총사령관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어찌어찌해서 되었고.”
“과연.”
“미국 대통령은 물론 만나 봤습니다.”
“역시.”
“그리고 조선에선 난 노비였습니다.”
“······?!”
흥선대원군이 미리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말이 없었다.
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는 피치를 가리켰다.
“이쪽은 에밀리에 피치 조. 내 부인입니다.”
“!!!”
노비보다 이게 더 놀라운 모양이다.
다들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경악했다.
며칠 뒤.
바다가 아닌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지리 함장이 막스에게 소식을 알렸다.
“곧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할 겁니다.”
“함선 열 척이 입항하면 다들 놀라겠군요.”
“아마 뭔 일 터진 줄 알겁니다.”
잠시 후, 요코하마 항구에 들어서자 SFBC대원들이 탄 함선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요코하마에 흔적을 남겼던 히콕과 대원들이 게이샤 이름을 외치는 소리였다.
“히요코짱! 드디어 내가 왔드아아아!”
“하라짱! 나도 왔어어!”
“저것들이 미쳤나.”
막스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사절단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들은 항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철로 만들어진 다양한 국적의 함선과 상선들. 분명 나룻배만 드문드문 있던 조선의 항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정적인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활기가 넘쳐 보였다.
사절단 몇몇은 곧바로 붓과 먹을 꺼내 풍경을 담아내려 했다.
“며칠 머물 테니, 천천히 해도 됩니다.”
“...... 알겠습니다.”
배가 정박하자 선착장에는 이미 많은 일본인이 몰려와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항구 관료들은 이마를 훔치며 함선을 살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입항 절차와는 별개로 이곳 총영사에게 연락해 두세요. 그래야 무기를 빨리 처분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리지리 대령은 수하에게 지시를 내린 뒤, 자신은 관료들과 대화를 나눴다. 방문 목적을 들은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허리를 숙이며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다들 내리십시오!”
이를 신호로, 함선 열 척에서 미군이 쏟아져 나왔다.
유럽 열강들의 상인과 군인들은 미국의 군세를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미국은 아직까진 열강 반열에 들지 못한 국가. 3류 혹은 2류 정도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함선에서 내린 히콕은 얼굴이 상기된 채 막스를 찾아왔다.
“대장, 다녀올게!”
“······ 숙소부터 알아봐. 도중에 다른 데로 새면 알지?”
“알지, 알지.”
히콕은 코디와 대원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차피 일본 주재 총영사를 만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사절단은 배에서 머물고 피치는 막스의 팔에 감겨왔다.
“데이트가자!”
“어디로?”
“뭣 좀 살 게 있어. 가자!”
피치가 막스를 이끌고 간 곳은 포목점이었다.
사람들 틈에서 살펴보니, 일본의 전통 옷 기모노가 색깔별로 늘어져 있었다.
막스는 피치를 힐끔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기모노 좋지.”
“그래? 근데 이건 사이즈를 모르겠네.”
“그게 뭐 중요해. 대충 걸치면 되지.”
‘어차피 금방 벗을···.’
그런데 예상을 벗어나 피치는 상당히 작은 옷을 만지작거렸다.
막스의 눈이 작아졌다.
“그건 속옷이 아닌데.”
“뭔 소리야. 고유지 옷 고르는 거야. 낡고 찢어진데다 냄새가 장난 아니더라고.”
“아, 음. 그렇군.”
“근데, 너 왜 이렇게 응큼해졌어?”
“······”
그때였다. 갑자기 팔 하나가 쑥 나와 피치 허리춤을 향했다.
‘소매치기?’
막스의 눈이 날카롭게 바뀌며, 그 손을 낚아챘다.
그런데 팔이 짧고 가늘다.
막스의 시선이 팔을 따라 위로 향했다.
10살 남짓한 아이가 살기 짙은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가 입술을 깨문다. 동시에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막스를 찔러왔다.
퍽.
짧은 단도는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막혀버렸다.
막스가 아이의 손을 꽉 붙잡았다.
순식간에 양손 전부가 결박당한 것이다.
아이는 이를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상대는 어른, 더구나 막스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때.
“젠장! 이거 놓으라고!”
‘또 조선의 아이인가···.’
스카프 위로 막스의 눈이 반짝였다.
주변에 있던 일본인들이 그제야 상황을 눈치채곤 식겁하며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