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일본의 선교사들
이 시기, 일본에서 암살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막부와 조슈번이 서로를 암살하고, 각 파벌이 고용한 낭인들이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하여 서로를 죽고 죽이는 짓을 이어왔다.
그중 하나로, 1년 전.
조슈번은 교토를 수호하는 좌막(막부 보좌) 파 아이즈번의 번주(다이묘) 암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왕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납치하려는 계획이었다.
조슈번은 이를 위해 교토에 방화를 저질렀다.
하지만 아이즈번의 사무라이, 신선조(신센구미)에 가로막혀 실패하고 만다. 이때 교토로 간 조슈번 사무라이들이 즉결 처분되었다.
교토에 불을 저지른 것에 분노한 막부 쇼군은 덴노(왕)를 찾아가 조슈번 토벌을 허락받으려 했다. 시모노세키 전투 이후 제2차 조슈번 토벌이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덴노는 토벌령을 차일피일 미루며 시간을 끌었다.
원 역사대로라면 지금쯤 조슈번은 막부의 공격을 막으려, 사쓰마번에게 손을 내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둘 사이에 삿초동맹이 맺어지게 되는데 견원지간인 둘을 연결한 자가 바로 사카모토 료마였다.
“동맹을 늦추고, 둘 중 하나의 힘을 빼려면, 암살 일 순위는 조슈번이지.”
왕을 암살하면 오히려 도막(막부 타도)파의 결집을 불러오고, 막부 쇼군을 암살하면 오히려 좌막 파의 힘을 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가쓰 가이슈를 암살해봐야 득 될 것도 없었다. 그를 대체할 어중간한 인물들이 막부에 가면을 쓴 채 포진되어 있으니 말이다.
여러모로 효과적인 건 조슈번을 직접 노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현재 조슈번에는 암살할 만큼 파급력이 큰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아직 어리고. 죽여봐야 현 시국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또한 그의 스승이자 조슈번의 정신적 스승, 요시다 쇼인은 수년 전 막부에 의해 처형당한 인사였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여전히 제자들에게 남아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존왕양이를 외치고 훗날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의 선구자다.
최악인 건 그가 주장하는 양이 이론이 조선의 위정척사와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건 필연적이다. 서양 열강을 탓할 게 아니라 일본이 약한 게 문제의 본질’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같은 논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 뿌리가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엔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있었다.
조선통감부이자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을 만든 타카스기 신사쿠,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모토,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등.
모두 조슈번 출신으로 조선 침략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이는 백 년이 훨씬 지난 후에도 일본 자민당의 뿌리가 되어 일본 극우로 이어진다.
굳이 인물을 열거하지 않아도, 히콕 역시 요시다 쇼인의 주장만으로도 막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슈번을 무너트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얘들이 말하는 양이라는 게 그런 의미였구나. 힘이 있으면 그냥 약한 나라는 먹어도 된다고? 머더 뻑, 하긴 뭐, 그게 지금까지 서양 열강들이 한 짓들이긴 하지.”
그런 점에서 조선은 확실히 일본의 먹잇감이 될 확률이 높았다.
SFBC 대원들에게 주입된 하이테크놀로지 조선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철도는커녕 마차조차 보기 힘든 조선을 보면, 일본에 안 먹히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개틀링 기관총을 빌려줘도 조선은 복제하기 힘들 정도로 산업 기반시설이 취약했으니 말이다.
갑자기 짠한 마음이 든 히콕이 막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보스가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유가 있었구나.”
“이건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야. 조슈번이 일본을 장악하면, 그 주변이 초토화하는 거야. 아니지, 심지어 미국까지 넘볼걸?”
“에이, 그건 오버다. 너무 갔어.”
히콕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국을, 그것도 일본이 침략할 거라 누가 상상이나 할까.
막스는 답답한 새끼라며 한숨을 내쉬지만, 어차피 벌어지지 않을 일을 확신하는 것도 우스웠다.
막스가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암살 타겟은 둘.”
요시다 쇼인 이후 조슈번의 리더가 된 카츠라 코고로. 그리고 사쓰마번과 동맹을 추진하는 사카모토 료마.
“이왕이면 사쓰마번 쪽도 암살하는 건 어때?”
“거긴 지금까지 도막, 좌막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었어. 동시에 양쪽 인물이 죽으면 동맹은 더 빨라질걸? 역효과야.”
“그것도 그렇네.”
“우선 그 둘을 시작으로 상황을 봐서 늘려나가자고.”
암살 이후 삿초동맹이 예정대로 이루어지면, 다음 타겟은 막부.
“쇼군과 가쓰 가이슈. 그리고 최후는 일왕.”
“그냥 다 죽이지 왜. 그나저나, 설마 나 시키는 건 아니지?”
“음.”
막스는 히콕을 쳐다보며 고민하는 척했다.
“속이 빤히 보이거든? 걱정하지 마. 정치는 몰라도 이런 건 내 특기잖아. 그나저나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왜 개틀링 기관총을 막부에 팔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거면 일당백이잖아. 에도에 몇 대 놔두면 게임 끝 아니야?”
“문제는 개틀링 기관총이 과연 막부를 위해 쓰이느냐지.”
“음?”
“막부 내부에는 가쓰 가이슈 같은 인물이 많아. 몸은 막부에 있지만, 조슈번에 가까운 자들.”
그리고 보신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은 에도의 문을 자발적으로 열어줄 것이다. 가이슈가 개틀링을 요구한 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분해해서 똑같이 만들려고 하겠지. 가이슈라면 그러고도 남아.”
“역시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남부 연합이 개틀링을 따라 만든 것 봐. 퀄리티는 떨어지겠지만, 지금 일본은 제철소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어.”
히콕은 막스의 정치 공학, 주변 판세를 읽는 시각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개틀링을 주긴 줄 거야. 단, 사용할 사람들한테 직접 줘야겠지.”
“그게 누군데?”
“교토와 에도를 수호하는 막부의 사무라이들.”
“낭인들?”
막스는 고개를 저었다.
“좌막 파 아이즈번의 사무라이들. 신선조.”
“신선조?”
막스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막부의 무사 집단이자 준군사조직이지.”
“완전 SFBC네?”
“조금 다르지. 우린 할복 따윈 안 하니까. 하하.”
“.......”
막스는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신선조 부장들은 저마다 실력이 뛰어난 사무라이들이야. 그런데 그자들이 칼 대신 개틀링 기관총을 쥐었다고 생각해 봐.”
막스는 손가락으로 왼쪽 뺨에 십자가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얼굴에 십자 상흔이 있는 붉은 머리의 무시무시한 발도제.”
막스는 뭔가에 취한 듯 발검 자세를 취했다. 손은 허리춤에 있는 야전 장교의 검을 향해 꿈틀거렸다.
“발검의 경지가 극한에 이른 발도제가 개틀링 기관총을 향해 비천어검류의 천산용섬을 시전!”
막스가 요란하게 발을 굴렀다.
동시에 검을 뽑았다. 이리저리 휘두르며.
“하늘을 달리는 용의 이빨을 피해도 휘몰아치는 ‘폭풍’은 피할 수 없을 터. 네 몸의 자유를 빼앗기고 그 발톱에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스르릉.
휙휙!
“그렇게 발도제가 신선조 부장에게 역날검을 휘두르지만, 투드드드드드. 개틀링에겐 노답. 그렇게 조슈번과 함께, 바람의 검심은 진짜 바람을 타고 떠나는 거지. 어디로? 하늘로.”
철컹.
칼을 칼집에 꽂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를 본 히콕의 눈빛이 크게 출렁거렸다.
“이젠 개소리도 엄청 구체적으로 하네. 요즘 약 먹어, 보스?”
“흠흠. 아무튼, 신선조는 막부 최후의 보루야. 그들이야말로 조슈번의 심장에 개틀링 기관총과 수류탄을 투척할 거야.”
막스는 히콕과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눴다.
다음 날 정오.
영사관을 찾아간 막스는 구석에 있는 낭인들부터 확인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눈빛을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오동패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지만 막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무시하며 막스는 영사관 집무실로 향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총사령관님.”
“막부에서 벌써 답이 왔습니까?”
프루인 총영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무기 이야기는 아니고요. 막부에서 붙잡힌 사무라이들을 풀어달라고 사정하는데, 어떻게 처리하죠?”
요코하마에 있는 막부 관료는 이곳으로 모여든 낭인들을 위해서라도 풀어달라고 요구했단다.
막스는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낭인들이 서양인에게 붙잡혔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도막 파들의 명분만 세워주고, 그들이 외치는 양이 주장에 힘만 실리는 꼴이긴 하죠.”
“맞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풀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미국 총사령관을 우습게 알 터. 하루를 구금하고 거래에 이상이 없으면, 낭인들이야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었다.
단, 오동패는 예외였다. 동시에 놔줬다간 낭인들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컸다.
“다 풀어 주고 아이만 남겨 둡시다. 여차하면 미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으니까.”
“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애새끼만 남았으니, 뭐 경비도 필요 없겠네요.”
영사관 직원이 밧줄을 풀 때. 두목 사카베라가 직원을 살벌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방금 저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눈 거지?”
“아,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간다는 거랑, 경비도 필요 없을 거라는 거요···.”
‘그렇단 말이지.’
낭인들은 풀려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영사관을 벗어날 때는 오동패에게 살기 가득한 눈빛만 남기고 사라졌다. 총사령관에게 향할 복수가 온전히 그에게 쏠려 있었다.
막스는 방금까지 고개를 처박고 있던 놈들이 기세등등하게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봤다.
‘어떻게 해서든 복수는 하고 싶겠지?’
막스의 시선이 오동패로 향했다.
혼자 남은 아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스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말쑥한 차림의 백인들이 영사관을 찾아왔다.
총영사 프루인이 환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다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총사령관님, 이분들은 우리 미국의 선교사님들이십니다.”
“오오, 이분이 총사령관님이시군요.”
50대로 보이는 남자는 제임스 커티스 햅번이라는 기독교 선교사였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먼 이국땅에서도 총사령관님의 소문은 들었습니다. 전쟁영웅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선교사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햅번은 미국 장로교 선교단과 함께 요코하마에 진료소를 세우고 현재는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햅번 옆에는 백인 부부가 서 있었는데, 막스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남자는 30대, 여자는 20대 초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