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264/360)

#264 막부 최후의 보루들

“제임스 해밀턴 밸라, 이쪽은 부인 마가렛 키니어 밸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편에 이어 부인이 환한 미소로 막스에게 말을 건넸다.

“연방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일본에서 총사령관님을 만나다니 정말 꿈만 같네요.”

밸라 부인은 표정이 풍부하고 성격이 쾌활해 보였다. 조용한 남편과는 대조적이었다.

선교사들은 일본 생활에 익숙해서인지, 동양인을 봐도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들 눈에 막스는 미국 총사령관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어쩐 일이십니까?”

“조선이 개항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막스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밸라 부인의 입에서 조선말이 튀어나왔다.

개항 이전, 조선에 미국 선교사가 갔던 적이 있던가.

‘하긴 이막산도 서부에 있었는데.’

막스가 물었다.

“조선에서 혹시 선교활동을 하셨습니까?”

“선교사라면 어디든 가야지요. 일본에 온 이상 조선을 안 갈 수가 있나요.”

아프리카 오지는 물론 마추픽추 정상까지 올라가 십자가를 세운 선교사들이다.

일본은 이미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았기에, 밸라 부부는 새로운 선교 시장에 눈을 돌렸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조선이 자연 관심을 끌었다.

이들에게 조선 백성은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로 성경 말씀을 반드시 설파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의 선교 활동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조선에서 일 년 정도 머물렀는데, 생각만큼 지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더라고요. 일찍이 자리 잡은 천주교 선교사들도 그렇고. 분위기가 좋지 않아 결국 일 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조선이 마침내 개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밸라 부부는 정확한 상황을 묻기 위해 일본 영사관을 찾은 것이었다.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선교사라 이거지.’

더욱이 성격도 열성적이며 쾌활하다.

막스는 밸라 부인을 보며 막스는 사절단을 떠올렸다.

제대로 된 통역이 막스뿐이라 미국 본토에서까지 그들을 안내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막스는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만큼 일이 많았다.

워싱턴, 뉴욕, 캔자스, 콜로라도 등.

방문할 곳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넘쳐났다.

그런 점에서 조선말을 할 줄 아는 밸라 부인의 등장은 반길만한 일이었다.

“제임스도 조선말을 할 줄 압니까?”

“어설프지만, 조금은 합니다.”

‘둘씩이나!’

남편은 부인보단 어눌하지만 통역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부에게 두 가지를 제안했다.

“함선에 조선 사절단들이 타고 있는데. 통역을 맡아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부부가 눈을 껌뻑거렸다.

막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사절단이 석 달 정도 미국을 둘러보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 함께 하면 두 분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 제안하는 겁니다.”

부부는 나직이 의견을 교환했다.

이들은 어차피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절단과 함께라면 정식으로 조선에 들어갈 명분도 생기고, 친분도 쌓을 수 있다.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천천히 결정해주셔도 됩니다. 며칠 동안은 여기에 머무를 생각이니까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밸라 부인이 갑자기 영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는 막스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사실 저희가 보살피고 있던 아이들이 몇 명 있는데, 함께 데려갈 수 있을까요?”

질문으로 보아선 통역관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만, 돌보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결정을 망설이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입니까?”

“부모가 죽어서 마땅히 돌볼 사람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물론 일본인들입니다.”

“미국으로 데려가면 아이들을 돌볼 사람은 있습니까?”

“장로교 재단에서 보살펴 줄 거예요.”

막스는 프루인 총영사에게 의견을 구했다.

“외교적인 문제는 없습니까?”

“어차피 나라에서 신경도 안 쓰는 아이들입니다. 물론 동의는 구해야겠지만, 반대하진 않을 겁니다. 선교사들이 데려간 경우는 종종 있었으니까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밸라 부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레 물어왔다.

“혹시 붙잡힌 아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아이를 아십니까?”

밸라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으로 올 때 오동패가 밀항했던 배에 이들 부부도 타고 있었다고 한다. 묘한 인연이었다.

“낭인들하고 어울리길래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듣질 않더라고요.”

“지금은 들을 것 같습니까?”

“방금 저기 안에서 얼굴을 보니까,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던데요?”

확실히 증오와 분노로 가득했던 오동패의 눈빛에 독기가 빠져 있었다.

먹을 때만 눈알을 희번덕거릴 뿐, 시종일관 득도한 고승처럼 정면의 벽만 응시했다.

그런 변화 때문인지 밸라 부인은 오동패를 구하고자 했다.

“알고 보면 불쌍한 아이예요. 방법이 없을까요?”

“빼내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내일이면 막부에서 사람이 올 테니까요.”

“정작 아이를 이용한 낭인들은 풀려났는데요?”

“시기가 시기인지라, 어쩔 수 없이 풀어 줬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밸라 부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오동패의 운명을 확신했다.

막부에 잡혀가면 죽을 거라는 걸.

‘아이를 데려가기 전에 빼내야겠어.’

오지랖이 지나친 밸라 부인은 생각과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타입이었다.

방법을 고심하던 그녀는 영사관을 둘러보고 침투 경로를 파악하려는 듯 매의 눈초리로 주변을 훑어봤다.

그녀의 이런 황당함은 미국 시민으로서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아이를 풀어 주다 발각되어도, 일본이 아닌 미국 법에 따라 처리된다.

그런데 총영사 프루인이 자신을 미국 법정에 세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행동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밤.

그림자 하나가 영사관을 기웃거렸다.

안을 들여다보던 그림자의 고개가 좌우로 까딱거렸다.

‘아이를 지키는 사람 한둘은 있을 줄 알았는데.’

영사관 안이 너무 조용하다.

갈등 끝에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가, 조심스레 아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보이질 않았다.

‘사라졌어?’

그림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스러워했다. 이때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이를 찾습니까, 밸라 부인?”

“!”

흠칫한 여인은 놀란 눈으로 상대를 쳐다봤다. 미국 총사령관이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부인을 기다린 건 아니었는데, 간도 크십니다.”

“...... 저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

“쉿.”

막스가 손짓으로 총영사 집무실을 가리켰다. 밸라 부인은 눈치 빠르게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집무실 밖, 푹 소리와 함께 신음이 들려오고. 곧이어 화다닥 누군가 도망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막스가 집무실 문을 열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바닥에는 낭인이 피를 쏟아내며 쓰러져 있었다.

기겁한 밸라 부인은 벽에 붙어 멍하니 서 있는 오동패를 보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밖에서 대원 몇 명이 영사관 안으로 들어왔다.

“쥐새끼는 도망갔습니다. 달리는 속도가 장난 아니던데요.”

“잘했어. 일단 여기 시체부터 밖으로 치우자. 그리고 코디 넌 아이를 함선으로 데려가.”

“옛 썰!”

코디는 미소를 지으며 밧줄에 묶인 오동패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는 영사관 밖으로 나가 함선으로 향했다.

모든 상황을 지켜본 밸라 부인이 물었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어요?”

“설마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저도 풀어 줄 구실이 필요했거든요.”

“아.”

밸라 부인은 상황을 이해한 듯 탄성을 내뱉었다.

내일 막부에서 오면, 아이는 도망간 자객들이 납치한 것으로 둔갑할 것이다.

시체는 그 증거였다.

"통역 하기로 결정하신 거죠?"

막스의 말에 밸라 부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며칠 뒤에 보기로 하죠, 밸라 부인.”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가는 길은 우리 대원이 데려다줄 겁니다.”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네요.”

“그런데 남편분 몰래 오신 겁니까?”

“...... 보기보다 그이가 새가슴이거든요. 말했으면, 절대 못 오게 했을 거예요.”

“보통 그게 정상입니다. 아무튼, 다음에는 조심하셨으면 좋겠네요. 시간이 조금이라도 겹쳤으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물론 밖에 대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용감무쌍한 선교사 부인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조선에서도 이러면 곤란해요.”

“네!”

밸라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고, 막스는 대원 셋과 총영사관에서 밤을 보냈다.

함선 USS 콜로라도호.

짐칸에 갇힌 오동패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긴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을 구해주러 온 백인 선교사.

자신을 죽이러 온 낭인들.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들을 곱씹어 보고, 그 생각의 끝엔 총사령관의 말이 떠올랐다.

- 너 같은 애새끼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중요한 건 선택이야. 모르면 배워. 세상에 어떤 길이 있는지.

분명 자신은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백정의 자식이 일본까지 와서 백정 짓을 하려고 했다. 선교사의 손길을 거절하고. 백정이라 자학하며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줄곧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새로운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다. 굳은 결의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 오동패는 이제 백정의 자식이 아니다! 난 그냥 나다!”

“뭐래, 이 백정 놈의 자식새끼가.”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며 상자 뚜껑이 열렸다.

얼굴을 내민 또래 아이가 오동패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 넌 뭐야?”

“나?”

고유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난 노비 자식새끼다. 너랑은 근본부터 다르지.”

“지랄하네. 백정이나 노비나.”

“다르지 새끼야. 어딜 똑같이 취급하고 있어. 자존심 상하게.”

“어차피 너나 나나 바닥이야. 그걸 이기고 싶냐?”

“당연하지. 꼬우면 한 번 붙던가?”

고유지를 노려보던 오동패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 난 배에서 쫓겨나기 싫다.”

고유지도 움찔하며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둘에게 이 배는 생명의 동아줄이다.

스스로 놓아버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갑자기 고유지가 오동패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빵이었다.

“먹어. 난 아까 실컷 먹었으니까.”

오동패는 말없이 빵을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탁.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라, 이 백정 새끼야.”

고유지가 또 다른 빵을 집어 던지며 으르렁거렸다. 오동패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도 낼름 입에 집어넣었다.

오물거리면서 마지못해 말했다.

“고맙다. 노비 새끼야.”

다음날 정오.

가쓰 가이슈가 일단의 무리와 함께 영사관을 방문했다. 이들은 마당에 방치된 낭인의 시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한 사내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시체에 다가갔다.

“흠. 왼쪽 목을 위에서 사선으로. 칼끝으로 정확히 심장을 찔렀군.”

‘사람을 한두 번 죽여본 솜씨가 아니야.’

단 한 번에 깔끔하게 죽였다.

무기는 단도. 길이는 한 자(30cm) 정도.

사내는 손가락으로 시체의 상흔를 휘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때, 영사관 안에서 막스가 나오자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가 죽인 건가?”

사내가 막스를 노려보며 묻자, 가쓰 가이슈가 당황해하며 미국 총사령관임을 일러주었다.

흥미롭다는 듯 막스를 위아래로 훑어본 사내는 이내 한 걸음 나서서 짧게 자신을 소개했다.

“신선조 3번대 부장, 사이토 하지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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