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연방 보안관의 맹세
우리가 돈이 없어, 힘이 없어.
그렇다고 쪽수가 부족해.
핑커톤 탐정들은 동료들이 화형당한 판에 참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들에겐 한 가지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바로 공권력이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눠 보죠.”
막스는 앨런을 호텔 1층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이끌었다.
앉자마자 막스가 말을 건넸다.
“이번 일은 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워싱턴을 직접 찾아온 건 정식 절차를 밟기 위해서야. 그걸 염려한 거라면 나도 생각은 있네.”
미치광이들을 잡기 위해 마구잡이로 총을 쓸 순 없는 일이다.
핑커톤은 사설탐정이지 정부 기관이 아니었으니까.
범죄자라 해도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법무장관에게 이 일을 우리에게 넘기라고 부탁할 참이네. 어차피 연방 보안관들은 수도 부족하고 할 일들이 많으니, 기대하긴 힘들지 않은가.”
“체포 영장은 어차피 내가 발부할 겁니다.”
“?!”
막스가 품에서 연방 보안관 배지를 슬쩍 보여주었다.
앨런 핑커톤은 SFBC의 직업 전환을 모르고 있었다. 막스가 연방 보안관이 된 사실은 대통령과 측근들만이 아는 정도였다.
‘정부 기관에서 일한다더니, 설마 연방 보안관일 줄이야.’
놀라움도 잠시, 막스가 조금은 동떨어진 질문을 던졌다.
“남부와 북부의 핑커톤 지부 비중이 어떻습니까?”
“당연히 북부가 많지. 남부는 이제 늘려갈 참이었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거듭된 막스의 질문에 앨런은 미간을 찌푸렸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에 자꾸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흥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냉정하지 못한 자신에게 막스는 질문으로 환기하려 한 건 아닐까. 더욱이 그 질문은 사건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으니 말이다.
마음을 가라앉힌 앨런은 담담하게 생각한 바를 털어놨다.
“사실 우리에게 KKK단 창설 정보가 흘러 들어온 것부터 이상한 일이긴 하지.”
미 전역에서 어떤 단체가 만들어지는 건 별로 주목할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핑커톤이 KKK단을 관심 둔 것부터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놈들은 핑커톤과 SFBC를 유인할 작정이었던 거겠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흑인 노예를 죽인 건, 남부의 노예제를 이어 간다는 뜻이고.
핑커톤 탐정을 처형한 건 힘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노리는 게 또 있다고?”
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문을 내밀었다.
고깔모자를 뒤집어쓴 KKK단의 사진을 가리켰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피로 쓰여진 두 단어가 있었다.
“KKK단이 적으로 간주한 건 카펫배거나 스칼라왁입니다.”
카펫배거는 카펫으로 만든 값싼 가방을 일컫는 말이다.
이주민들이 들고 다니는 짐 가방으로, 남부로 몰려온 북부 백인들을 경멸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스칼라왁은 북부인에 동조한 남부 백인들, 즉 배신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남부 분리주의자들 입장에서 카펫배거와 스칼라왁은 남부를 북부화하는데 앞장서고, 경제와 정치를 파고드는 좀벌레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핑커톤의 자금줄은 북부 자본가들이었습니다. 철도, 공장, 그 밖에 운송과 관련된 의뢰를 맡겼죠. 그리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앨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쟁이 끝난 지금.
남부 재건을 명분으로 북부 자본가들이 몰려드는 상황이다. 앨런이 줄기차게 핑커톤 탐정 수를 늘린 것 또한 남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남부 경제를 침식하는 북부 자본을 막겠다는 게 KKK단의 취지라 이건가?”
“글쎄요. 솔직히 KKK단은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죠. 중요한 건 뒤에 있는 놈들입니다.”
막스는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존 윌크스 부스가 친구 매슈스에게 준 편지였다.
이를 읽던 앨런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놀라움, 경악, 어이없는 헛웃음까지.
“...... 설마 이 일을 진짜 벌리진 않았겠지?”
“전부 편지에 언급된 현장에서 붙잡았습니다. 쿠 클럭스 클랜의 뜻이 궁금하다고 했죠?”
클럭스(Klux)는 그리스어로 원(Circle)을 뜻하는 ‘Kyklos’. 클랜(Klan)은 집단(Clan)에서 가져왔다. 반면 쿠(Ku)는···.
“총소리로 볼 수 있죠. 전체적으로 조직 이름 자체가 총을 장전하는 소리 같지 않습니까?”
쿠 클럭스. 쿠 클럭스.
철컥, 철컥···.
중2 병 걸린 애들이 모여 지은 게 분명했다.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나?”
“연구 좀 해봤습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서클이라는 단어죠.”
앨런은 자신이 막스에게 경고했던 남부 프리메이슨과 골든 서클 기사단을 떠올렸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진 두 사건은 분명 그들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결국, KKK단으로 미 전역을 선동과 폭력으로 어지럽히고, 뒤에선 남부 경제를 장악하려는 게 놈들의 목적이라는 건데.
“그래서 자네의 해법은?”
“스스로 해체하게 만들려면, 놈들의 거창한 명분을, 혐오와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거죠.”
“어려운 말이군.”
“조만간 신문을 통해 보게 될 겁니다. 중요한 건 KKK단이 점조직이란 사실입니다. 혹시 놈들이 신문에 광고를 뿌린 것 보셨습니까?”
“...... 봤네.”
충격적인 화형식으로 메시지 전한 뒤, 놈들은 남부 전역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KKK에 가입하십시오(Join the KKK).
그리고 인종과 연방에 맞서 싸우세요(And Fight For Race and Nation).]
광고를 낼 만한 돈이 있다는 건 자금줄이 있다는 것. 더욱이 점조직인 KKK단을 뿌리 뽑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핑커톤에서 KKK단의 핵심 인물들과 지부를 파악해두는 겁니다”
“그다음은 연방 보안관들이 나선다 이거군.”
“어차피 이제 한 식구 아닙니까? 누가 하든, 박살내면 그만이죠.”
앨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권력이 부족했던 핑커톤에게 든든한 배경이 생겼다. SFBC와의 합병은 잘한 선택이었다.
앨런이 성난 핑커톤 탐정들과 돌아간 뒤, 막스는 워싱턴 외곽에 있는 가옥을 찾아갔다.
모든 정보를 토해낸 부스와 공범들의 몰골은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막스가 생기 잃은 부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대통령을 암살하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나?”
“...... 적어도 남부의 의지는 이어지겠지.”
“남부의 의지?”
막스가 코웃음을 쳤다.
“인생은 무대요, 너는 주인공 같지? 넌 그냥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거야, 의지는 개뿔.”
“.......”
“누군가에게 이용당했지만, 그 사실조차 모르면서, 대체 뭔 의지를 잇겠다는 거야?”
“마음껏 이죽거려. 그런다고 동양인 따위의 회유에 넘어가진 않을 테니까.”
“회유?”
막스가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굳이 너한테 말을 거는 건, 놈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 ?”
“널 이용할 건데, 미리 자세하게 말해줄 생각이거든. 음흉한 놈들과는 확실히 다르지?”
막스는 이죽거리며 도수 높은 위스키를 내밀었다.
“영웅이 아니라, 술에 잔뜩 취해 꼴불견인 상태로 죽게 해 주마.”
막스는 그 계획을 부스의 귀에 대고 말했다.
속삭이는 것치곤 주변에도 충분히 들릴만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부스와 공범들은 몸을 부들거리고, 대원들은 다른 의미에서 몸서리를 쳤다.
- 와, 보스는 진짜···.
- 악마다, 악마.
그날 밤.
막스가 첫 번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목적은 KKK단의 이미지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것.
이를 위해 대원들은 존 윌크스 부스를 도운 공범들을 납치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간 건 다음 날 밤이었다.
*
1865년 12월 28일.
남북 전쟁이 다시 벌어진 듯 워싱턴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정확히는 전쟁부(국방부)를 향한 총탄 세례.
그 방아쇠를 당긴 자들은 하나같이 고깔모자를 뒤집어쓴 수십의 KKK단이었다.
“백악관을 점령해라!”
“망할 연방의 대통령을 죽여!”
“근데 여기 백악관 맞아?”
“알게 뭐야! 그냥, 다 죽여!”
“엇, 경찰이다!”
“보안관이지, 새끼야.”
“아무튼, 튀어!”
이들 말고도 워싱턴 곳곳에 고깔모자를 쓴 KKK단들이 휩쓸고 다녔다.
물론 이들은 KKK단으로 위장한 SFBC 대원들이었다.
한바탕 휘저은 다음 대원들이 모인 곳은 슈랏의 하숙집.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첩자들을, 작금엔 존 윌크스 부스와 공범들의 은신처였다.
하숙집의 주인은 미망인 메리 슈랏.
원 역사에서 여성 최초로 교수형을 당한 여인이었다.
대원들이 도착했을 때 하숙집 안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
존 윌크스 부스를 포함, 암살에 관련된 열 명의 공범들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 또한 대원들이 벌인 짓이었다.
“다들 작업 시작해.”
“일단 고깔모자부터···.”
대원들은 시체들의 머리통에 자신들이 뒤집어쓴 고깔모자를 씌웠다.
방 곳곳에 위스키병과 아편까지 골고루 뿌려 둔 다음. 천장과 벽에 총을 난사.
탕! 탕!
그런 다음 태연스럽게 연방 보안관 배지를 가슴에 착용했다.
십분 뒤.
워싱턴 경찰들과 기자들이 몰려왔을 때.
그들은 KKK단의 난동을 제압한 연방 보안관들을 경외 어린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다음 날.
전날 밤에 벌어진 사건이 <워싱턴 프리덤 에코>, <워싱턴 스타>, <네셔널 리퍼블리칸>, <미국 텔레그래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리고 이는 곧 미 전역에 퍼져나갔다.
[워싱턴 주민의 밤잠을 설치게 한 KKK단의 추태]
[술에 취한 KKK단, 전쟁부를 백악관으로 착각 벽을 상대로 암살을 시도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대통령 암살을 계획한 KKK단, 술 먹다 잠든 것으로 밝혀져]
[KKK단에게 남부의 의지란?]
*
새해를 하루 앞둔 1865년 12월 31일.
막스와 SFBC 대원들은 미연방 법무부 청의 부름을 받았다.
연방 보안관의 배지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 실질적인 업무 서약과 임명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은밀하게 치러진 행사에는 링컨 대통령과 존 기어리 부통령, 국무, 재무, 법무장관도 참관했다 그리고 워싱턴 대법관이 대표인 막스에게 임명장을 건네주었다.
“최초 13명이 임명된 이래, 연방 보안관은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헌법을 집행하는 기관임을 잊지 않고 국민들의 안전과 연방의 질서를 지킬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정직과 신뢰로서 거짓과 위선, 음모를 멀리할 것을 맹세합니까?”
“...... 맹세합니다.”
막스를 힐끔거린 대법관이 마저 말을 이었다.
“이상 막스 조를 포함한 232명의 연방 보안관이 미국의 헌법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현 시간부로 자격과 권한에 효력이 발생합니다. 오늘의 맹세를 잊지 말길 부탁드립니다.”
막스는 대표로 임명장을 건네받았다.
이미 며칠 전에도 연방 보안관 노릇을 하긴 했지만, 정식권한이 주어진 건 오늘부터였다.
대통령, 4대 핵심 관료들과 인사를 나눈뒤.
법무부를 빠져나온 막스는 SFBC 대원들과 호텔 컨벤션에서 자리를 가졌다.
총 273명의 SFBC 대원 중 39명이 열외.
미국 비밀 경호국, 국방부의 군인 장교, 텍사스와 콜로라도. 일본에 있는 히콕과 코디와 대원들이다.
막스는 홀에 모인 대원들을 훑어봤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SFBC의 적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남부, KKK, 무법자 새끼들.
여러 대답이 튀어나왔지만, 막스는 틀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SFBC는 생각보다 많은 걸 가졌다. 돈, 힘, 명예, 인맥. 그 때문에 가장 두려운 건 내부의 적, 바로 타락한 우리 자신이다.”
막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장내를 훑어봤다.
“조직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 나 하나의 실수가 곧 조직의 존폐를 좌우한다는 걸 명심해라. 누군가 돈으로 유혹하거든. 내가 너보다 더 많다고 말해라. 누군가 자리를 약속하거든. 대통령 말고는 관심 없다고 말해라. 그리고 누군가 가족과 동료들로 협박하거든. SFBC 조직 전체가 찾아간다고 말해라. 적어도 SFBC 대원을 내 손으로 추적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적이 되는 순간 가장 무서운 존재는 다름 아닌 보스와 동료들. 더욱이 막스의 말이 말뿐이 아님은 충분히 봐오고 경험한 일이었다.
“내일부로 SFBC는 연방 보안관으로서 미 전역에 흩어진다.”
컨트롤 타워는 네 군데.
워싱턴, 뉴욕,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그리고 콜로라도주 준투 내 요새다.
막스는 대원들과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락 방법과 미 전역에 안전 가옥을 만드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음 날인 1866년 1월 1일.
230명의 연방 보안관이 워싱턴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