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
캔자스주 동부의 와이언 도트.
이곳을 지나가던 막스는 페리 선착장을 운영하는 모세 그린터를 찾아갔다.
“막스, 콜린! 죽기 전에 자네들을 못 보는 줄 알았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모세 그린터는 막스와 콜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가족들을 불러 모아 소개해 주기까지 했는데. 북군 장교였던 둘째 아들이 특히 격한 반응을 보였다.
“캔자스 2연대 소속 필립 그린터 대위입니다! 이렇게 총사령관님을 가까이서 뵙다니, 영광입니다!”
“와, 총사령관?!”
“할아버지 말씀이 진짜였어?”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자 모세 그린터가 고개를 절레 젓는다.
“하여간 손주들이 당최 믿질 않아서 말일세. 오늘에야 내 체면이 좀 서겠군.”
“제가 신세 진 게 얼만데요. 아무튼, 가족들을 보니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신세는 내가 졌지. 자넬 못 만났으면, 지금도 노예···.”
막스가 고개를 젓자 모세 그린터가 말끝을 흐린다. 그리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과거 할아버지가 열성 노예제 옹호론자였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오늘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물고 가게.”
“일행이 좀 많습니다만.”
“원 사람도. 그 정도는 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네.”
모세의 ‘그린터 플레이스’ 페리 정착장은 콜로라도-캔자스-미주리주를 있는 중간지대.
덕분에 페리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남북전쟁 중에는 캔자스와 미주리주의 전쟁 물자를 공급하며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는데, 막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모세 그린터는 캔자스주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다.
그날 밤.
성대한 만찬을 끝내고 막스와 모세 그린터가 은밀히 대화를 나누었다.
“페리 사업은 언제까지 할 셈입니까?”
“역시 자네는 내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보는군. 그렇지 않아도 고민 중이었네. ”
모세 그린터가 걱정하는 건 곧 완공될 캔자스 철도 노선. 증기선의 이용객 감소는 피할 수 없고. 어쩌면 사업 자체가 존폐 위기에 놓일 수도 있었다.
밴더빌트가 증기선 사업을 접고 철도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였다.
“차라리 페리 사업을 축소하고, 철도에 뛰어드는 건 어떻습니까?”
“솔직히 그쪽은 문외한이라 자신이 없네. 어느 노선에 어떻게 투자할지, 워낙 말들이 많아서 말일세.”
철도 붐이 일면서 온갖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 시대. 더욱이 부자들에겐 파리 떼들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모세 그린터는 신중하게 관망만 하고 있었다.
“홀리데이 알죠?”
“이전 토피카 시장을 어찌 모르겠나. 그런데 그 친구가 왜?”
“조만간 AT&SF 철도 노선을 확정 지을 겁니다. 제가 확보한 지분이 있는데, 조금 나눠 줄 수 있습니다.”
“자네가 하는 사업이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AT&SF(애치슨, 토피카앤 산타페)는 캔자스, 콜라라도, 뉴멕시코까지 이어지는 노선으로 홀리데이가 장시간 공을 들인 숙원 사업이다.
막스는 여기에 모세 그린터를 끌어들이려 했다. 문제 소지가 있는 막스, 홀리데이에 집중된 지분을 분산하려는 목적,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음 날.
헤어질 땐 마차 한 대가 더 늘어났다. 짐칸에는 모세 그린터가 준 선물들과 먹을 것들이 잔뜩이었다.
척은 뭔가 아쉬운 듯 뒤를 힐끔거렸다.
“증기선도 공짜로 태워줄 것 같던데. 왜 안 탄 거야, 매제?”
“강이 캔자스 중간에서 끊기거든. 그곳에서 이 많은 사람이 탈 말을 어떻게 구하겠어, 척.”
“아하,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저녁 늦게 도착한 곳은 자유주의 심장 로렌스.
“막스 조가 왔다!”
“오오, 막스!”
3년 만에 등장한 막스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로렌스 첫 보안관.
제이호커스 대장.
서부 사령관.
북군 총사령관.
그 밖에 콜로라도 금광주, 로렌스 갑부 등을 양념으로 온갖 칭호들이 쏟아졌다.
그날 일행은 로렌스 시장까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환영식을 받았다. 숙소는 로렌스 최초의 호텔, 엘드릿지에서 머물렀다.
막스, 콜린이 의원들과 밤까지 시간을 보낼 때, 나머지 일행들은 옥상에서 일행들과 술을 마셨다. 다뇽은 신기한 듯 마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스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러니까, 가는 곳마다 장난 아니야.”
“덩달아 우리까지 대접받으니까 기분이 참 묘하구만.”
“가족이었으면 더했겠지?”
순간 다뇽과 용병들의 시선이 척에게 쏠렸다. 오는 도중 뉴욕 갱단들과 용병들은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매제가 저런 사람이면 기분이 어때?”
“...... 좆나 좋지.”
척의 목소리가 우울하다. 용병들은 뭔가 알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콜로라도에 도착하면 우리랑 훈련받는다며?”
“매제가 그러라고 하네···.”
“SFBC 훈련이 좀 힘들다던데. 우리야 뭐 그딴 건 식은 죽 먹기지만.”
“.......”
“그래도 설마 훈련받다 처남을 죽기야 하겠어? 힘내, 척.”
척이 지극히 현실적이라면, 다른 갱단원은 악으로 깡으로 버티겠다며 자신 있어 했다.
‘군대도 안 간 놈들이 허세는.’
용병들은 갱단들을 귀여운 조카 보듯 쳐다봤다. 그러다 조선인들로 시선을 옮겼을 땐 입을 다시며 말을 아꼈다.
담담하지만 투지 가득한 눈빛.
조선인들은 용병들이 쉽게 말을 건넬 수 없는 타입이었다. 사실 막스와 같은 조선인이라는 것이 알게 모를 벽으로 작용했고.
그런데 이를 인식했는지, 진주민란의 유정석이 웬일로 입을 열었다.
“우리랑 보스는 달라. 조선 팔도 다 뒤져도 보스 같은 사람은 없다.”
“맞아. 그냥 보스가 특이한 거야.”
부안민란 이장열도 거들었다.
‘보스만 특별하다’라는 말에 용병들은 벽이 허물어진 듯 다가갔다.
척과 갱단들도 마찬가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해진 덕에 조선인들은 거리낌 없이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외톨이처럼 혼자 있던 조셉 헤코도 슬그머니 끼어드는데.
동서양이 융합된 진정한 다국적 모임이었다.
한편, 난생처음 호텔에서 머문 아이들은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유일한 백인 에디슨도 호텔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잠깐 호기심을 보일 뿐.
동양인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구석에서 혼자 뭔가를 끄적거렸다. 그리고 노트엔 화학 수식과 재료 외에도, ‘부자, 호텔, 명성, 영웅’ 등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에디슨이 이해하는 영웅은 단순하다.
누군가를 구해주거나, 세상을 바꾼 사람.
‘나도 될 수 있을까.’
막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에디슨이 골몰히 생각할 때, 침대에 기대고 앉은 오동패는 습관처럼 서랍을 뒤지는 고유지에게 물었다.
“넌 믿겨 지냐? 조선인이 미국 땅에서 저런 대접을 받는다는 게?”
“지금까지 뭘 봤냐, 병신아. 당연히 믿어지지.”
“그 의미가 아니잖아!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를 물은 거야, 바보 새끼야.”
“글쎄. 나는 될 수 있지만, 너는 모르겠네?”
“에휴. 말을 말아야지.”
비아냥거리던 고유지는 보물찾기하듯 빈 서랍들을 손까지 깊숙이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두목처럼은 바라지도 않아. 그저 근처만 가도 우린 성공한 거야. 감히 조선에서 누가 우릴 업신여기겠냐고.”
“뭐, 그건 그렇지.”
“두목이 하라는 것만 잘하면 돼. 오는 동안 본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고유지가 서랍에 손을 넣은 채 고유지를 쳐다봤다.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거야. 방금 로렌스인가 뭔가 마을 사람 봤지? 다들 해맑게 웃는 거. 그만큼 두목하고 관련된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거야.”
“뭔가 그럴듯한데? 너도 생각이 있긴 하구나.”
“뒤질래? 아무튼 우린 죽어라고 노력해야 해. 봐봐, 그러니까 이렇게 건지는 거라도 있지.”
고유지가 2달러 동전을 들곤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 어떤 고객이 놔둔 동전을 기어코 발견한 것이다.
“징한 새끼.”
말하던 오동패도 슬그머니 다른 가구를 뒤지기 시작했다.
일본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소근소근 대화를 나누는데. 미국의 어마어마하게 큰 땅덩어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온 미국은 거대했다. 말로도 부족할 만큼.
며칠 동안 기차와 말로 이동해도 미국 절반밖에 못 왔다는 건, 이미 아이들의 상상을 벗어난 크기였다.
“스고이네. 일본의 몇십 배는 되는 것 같아.”
“근데 어떻게 조선인이 이 땅에서 저런 대접을 받는 걸까?”
“그건 강하니까 그렇지. 나도 오야붕처럼 그런 남자가 될 거야.”
“난 그럼 부자가 돼야지!”
“그냥 난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당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저마다 포부를 밝힐 때, 조용히 책을 읽던 유코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먼저야.”
“그게 뭔데?”
“영어.”
유코는 배시시 웃으며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교사가 준 영어책이었다.
뉴욕에서 오는 동안 막스는 아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과 일본에서 신분에 얽매여 있던 아이들이 큰 꿈을 꾸게 되었으니.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된 그들에게 새롭게 생겨난 목표는 막스와 닮는 것이었다.
다음 날.
막스와 일행들은 아침 일찍 로렌스를 떠났다. 시가를 입에 문 콜린이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어젯밤엔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한참을 찾았네.”
“레인 의원하고 대화 좀 나눴습니다.”
“오호, 그래서 올해 선거에 또 나온대?”
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캔자스 상원의원이었던 레인은 올해 재선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사실 올해는 레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해다.
원 역사에선 올해 제임스 헨리 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까.
주지사 찰스 로빈슨과의 갈등과 동료 공화당 의원들에게 부정행위 기소를 당하는 등.
복잡한 문제에 우울증까지 겹친 레인은 결국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자살한다.
그런데 어제 본 레인에게선 아무런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제이호커스의 사령관이었을 때처럼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 상원의원 재선을 노릴 생각이네. 전쟁은 끝났어도, 흑인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고 보거든.
- 옳은 말씀입니다. 가야 할 길이 멀죠.
- 그나저나, 내가 뒷배경이 되기엔, 자네가 너무 커버렸네. 집을 지을 때 기둥이라도 보탰으면 모를까, 내 도움도 없이 자넨 혼자서 대저택을 짓지 않았나.
- 미안하지만 아직 절반도 짓지 않았습니다.
입술을 꿈틀거린 레인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 꿈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나와 할 일이 더 있다는 얘기로 해석해도 되나?
- 물론입니다. 의원님은 정치권에서, 저는 밖에서 하나둘 만들어가야지요.
역사는 뒤틀렸다.
레인을 우울하게 만든 제이호커스의 민간인 학살 사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신념과 독기, 욕망으로 가득했던 레인은 좋은 의미로 열정만 가득한 모습이었다.
여러모로 폭력을 변화의 도구로 삼았던 존 브라운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다음 날.
로렌스만큼은 아니지만 토피카에서도 막스를 그냥 두지 않았다.
캔자스주의 주도인 탓에 주지사 찰스 로빈슨까지 나와 환영하며 막스를 맞이했다.
그러는 동안 콜린은 캔자스에 유일하게 있는 핑커톤 탐정 사무실을 찾아갔다.
은행강도들이 유타로 향했다면, 분명 캔자스를 지나쳤을 테니 말이다.
“안 그래도 나흘 전, 헤이즈 마을에 무법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남부 억양에 전쟁에 관한 무용담을 떠들었다고 하더군요.”
“은행강도와 연관성은?”
“바텐더 말에 따르면 돈이 많았다고 하다는데, 은행강도일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놈들은 술집에서 진탕 마시다 매춘부 한 명을 살해한 뒤 도주했습니다.”
“......”
콜린의 표정이 굳어지자, 탐정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총 다섯인데 둘은 붉은 스카프를 둘렀고 한 놈은 덩치가 꽤 크다더군요.”
핑커톤 사무실에서 나온 콜린은 토피카 보안관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탐정들보다 정보가 부족했다.
콜린이 실마리를 찾은 뒤, 막스와 일행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토피카를 빠져나왔다.
가는 길에 막스와 콜린은 은행강도 사건을 두고 이런 저런 작전을 구상했다.
*
캔자스와 콜로라도 대평원을 지나 마침내 눈에 들어온 건 로키산맥 동쪽의 파이크스 피크.
겨울이 끝나지 않은 탓에 봉우리 끝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침내 콜로라도에 도착한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멀긴 더럽게 머네.’
철도가 깔렸다면 5일이면 올 걸 무려 20일이나 소요되었다. 철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일행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준투 도시로 입성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환대는커녕 아무도 막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스카프로 얼굴을 가려서라기엔, 캔자스 사람들은 귀신같이 막스를 알아봤다.
‘SFBC 본진이 왜 이래.’
대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혹자는 콜로라도를 SFBC, 아니 막스의 제국이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반응이었다.
일행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콜린이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동안 많이 변했네. 사람들도 붐비적 거리고.”
“그러게요. 이제야 도시답네요.”
나무와 숲으로 우거졌던 곳. 금광이 발견되고 골드러시로 사람들이 밀려들더니, 어느덧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중심가는 건물들이 오밀조밀 들어섰고, 추운 날씨에도 길거리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듯 급속도로 발전한 데에는 금광이 발견된 지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데다, 콜로라도가 준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외부인들이 대거 유입된 준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서부 어느 곳이든 무장한 이방인들의 등장은 환영받지 못한다. 막스와 일행 역시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사람들의 의심과 경계 가득한 눈초리를 받으며 이동했다.
준투 도시를 가로질러 요새에 도착했을 즈음.
갑자기 요새 안에서 세 명의 무장한 자들이 말을 박차며 뛰쳐나왔다.
두드드드드.
누가 신고라도 한 듯, 일행을 향해 달려오는 자들의 가슴엔 보안관 배지가 달려 있었다.
서두에 있던 보안관이 소리치며 다가왔다.
“이곳엔 무슨 일인가! 우린 막스 카운티 소속의 보안···!”
“보스!?”
“콜린!”
달려오던 보안관들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멈춰 섰다. 이들은 그동안 콜로라도를 지키고 있던 SFBC 대원들이었다.
“그동안 잘 있었냐.”
“대체 이게 얼마 만입니까.”
“고생했다.”
막스는 눈시울이 뜨거워진 대원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피치는 뉴욕에 있지만, 사실상 막스의 집은 콜로라도다. SFBC가 시작된 이곳이야말로 끝까지 지켜야 할 곳이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