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다시 등장한 그 이름
어둠 속.
한 무리가 모닥불을 응시하며 멈춰 섰다.
이들이 달려온 건 멀리서부터 보인 불빛 때문이었다.
“베니가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고 했잖아?”
“그건 역마차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고.”
“내 말이. 누가 알아? 여자라도 있을지.”
황야에서 모닥불이 버젓이 자신들을 부르는데 참을 수가 있나. 모름지기 이들 무법자에겐 습격하라는 신호로만 여겨졌다.
말에서 내려 길쭉한 바위에 말을 묶고.
무리는 발소리를 죽여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거리가 좁혀졌을 때 눈에 보이는 건 말 두 필.
‘둘씩 탔어도, 고작해야 넷.’
그런데.
‘뭐야, 왜 한 놈도 안 보이지?’
모닥불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건 기둥 하나로 세워진 천막.
밖에 사람이 없으면 의심해볼 건 천막 안이었다.
‘애송이 새끼들이네. 불도 안 끄고 처 잘 생각부터 하다니.’
황야에서 모닥불도 안 끄고 잠이 든다?
생초보거나 정신줄 놓지 않은 이상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무리 중 누군가 속삭였다.
- 가서 그냥 총으로 갈길까?
- 멍청한 놈. 안에 여자라도 있으면?
- 여자?
- 황야에서 여자 보기가 어디 쉽냐? 운 좋으면 며칠 데리고 놀 수 있잖아.
- 그럼 죽이면 안 되지!
- 혹시 모르니까 너희 셋은 주변을 샅샅이 확인해.
- 오케이.
리더의 말에 무리가 둘로 갈라졌다.
한쪽은 천막으로, 나머지 사내 셋이 잔뜩 허리를 숙이며 주변으로 퍼졌다.
딴에는 은밀한 움직이었으나. 달빛 아래 꿈틀거리는 그림자들은 막스, 콜린의 시야를 피할 수 없었다.
막스가 속삭였다.
- 다 합치면 일곱이네. 그럼 내가 셋, 콜린이 넷. 콜?
- 왜 내가 넷인데?
- 억울하면 보스하던지요. 아, 대신 한 놈은 생포하는 거로 합시다.
콜린이 입술을 씰룩거릴 때, 주변을 살피러 온 놈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그중 한두 놈은 막스와 콜린이 있는 곳까지 올 것이 분명했다.
막스는 포복으로 콜린과 거리를 벌린 뒤 몸을 바위 뒤로 숨겼다.
일곱이나 되는 놈을 총으로 쏴서 죽이기엔 리스크가 크다. 더욱이 어두운 밤에 한 놈이라도 도망가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쫓고 쫓기는 귀찮은 추격전을 할 바엔, 하나하나 확실하게 처리해 끝장을 보는 게 막스의 철칙이었다.
마침 주변을 살피러 온 놈이 살금살금 다가온다. 놈의 발걸음이 지척에 도달했을 때.
웅크리고 있던 막스는 타이밍에 맞춰 보위 나이프를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찔렀다.
푸욱.
칼날이 턱에서 정수리까지 관통. 쓰러지는 놈을 어깨로 지탱하며 천천히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늦은 밤인데다, 주변이 워낙 조용해 작은 소리도 넓게 퍼져갔다.
놈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소리가 난 곳을 응시한다. 그렇다고 소리를 내서 부르거나 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나름 신중한 놈들이었다.
소리가 났던 곳을 바라보던 놈들은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또다시 푸욱 소리가 들려왔다.
콜린이 다른 한 명을 제거하는 소리였다.
‘시발, 자꾸 뭔 소리야.’
다시금 천막으로 향하던 무리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머릿속에 오만 가지가 떠오르자 속도를 높여 천막에 다가가 애워쌌다.
“일어나 새끼들아!”
한 놈이 발로 천막 기둥을 쓰러트렸다.
나머지는 철컥 소리와 함께 총을 장전하며 쓰러지는 천막을 겨눴다.
그런데 힘없이 무너진 천막은 텅빈 것처럼 덮개가 바닥에 달라붙었다.
“뭐, 뭐야 사람이 없잖아?”
“시발 어디로 간 거야?!”
‘뭐야, 천막에 없다고?’
주변을 살피던 놈이 동료들의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천막으로 향할 때.
뒤에서 접근한 콜린이 손으로 입을 막은 뒤 칼로 목을 찔렀다.
푸욱.
“아까부터 이 소린 뭔데!”
“밀리, 발린, 데비!”
“대답해 새끼들아!”
주변을 살피던 동료들이 대답하지 않는 데다, 예상했던 천막은 비어있다.
극도의 불안감을 보여주듯 놈들을 비추던 모닥불이 몸에 일렁거렸다.
“쥐새끼처럼 숨지 말고, 어서 모습을 보이라고! 이 개새···!”
놈들이 총구로 사방을 가리키며 소리칠 때.
탕! 탕!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총탄이 놈들의 이마에 적중하고.
운도 지지리없는 한 놈은 모닥불을 덮치듯 쓰러졌다.
츠스스스.
옷과 살이 타는 내음이 풍긴다.
그리고 한 놈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끄으으···. 어떤··· 개새끼···들···.”
무리 중 하나를 생포하기 위해 막스와 콜린은 치명상을 피하는 대신, 팔과 다리, 복부를 쏴 숨을 붙여놨다.
놈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피를 꾸역꾸역 흘리는 동안. 막스와 콜린은 움직임을 멈춘 채 눈으로는 상황을 지켜보고, 귀로는 소리에 집중했다.
만약 무리가 더 있다면 총소리에 어떤 반응이라도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오 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제야 막스가 몸을 일으켰다.
“어떤 놈들인지 확인해 볼까요.”
습격한 놈들은 세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첫째는 닥치는 대로 여행자를 공격하는 무법자. 굳이 신분을 확인할 필요가 없는 놈들이다.
둘째는 찾고 다녔던 은행강도들인데.
쓰윽 시체들을 둘러보면 마땅히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준투 보안관이 말한 역마차 강도들. 역 관리자와의 내통이 의심된다던 놈들이었다.
현재 위치상으로 보면 세 번째일 가능성이 컸다.
뿌드득.
막스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놈의 손을 발로 뭉개버렸다.
고문까지 해서 정체를 알 필요가 있을까.
막스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역마차 관리자 이름이 줄 베니라고 했지 아마.’
마을도 그자의 이름을 딴 ‘줄 버그’.
막스는 준투 보안관이 알려준 이름을 떠올리며 말을 건넸다.
“줄 베니가 네놈들을 죽이라고 했는데, 알아서 찾아왔구나.”
“베, 베니가··· 우리를?”
‘역시 역마차 강도들이었구만.’
“이유는 잘 알고 있을 텐데?”
막스는 계속해서 떠보듯 물었다.
그러자 놈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분노가 치미는지 몸을 부들거렸다.
“그 개자식이··· 뒤통수를··· 치다니···!”
“호오, 역시 역마차 강도들이 맞구만.”
“?”
더 들어볼 것도 없다.
막스는 퍼즐을 완성한 듯 놈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막스와 콜린은 딱히 이 사건에 관심도 없었다.
갱단과 결탁한 역마차 관리자를 제거하기 위해 왔던 길을 굳이 되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뭐, 그래도 모르니까 물건이나 뒤져 보죠.”
어차피 밤은 길지 않은가.
전리품 챙기듯 돈 될만한 것들을 빼앗았다.
그리고 소지품에서 줄 베니와 관련된 증거물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독수리가 막스 머리 위를 맴돈다.
배고프니까 산 사람은 얼른 가라며 독촉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말에 올랐다.
길을 가기 전에, 둘은 놈들이 왔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갔다.
바위에 묶여 있는 말 네 필을 본 막스가 콜린을 쳐다봤다.
“가져가죠.”
“귀찮은데.”
“말 네 필이면, 돈이 얼만데 놔두고 갑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말 네 필을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콜린은 뻑뻑소리를 내며 말들을 밧줄로 엮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말은 금방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자, 그럼 가 볼까요.”
막스가 앞장서고 콜린은 말 네 필을 몰고 뒤를 따랐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이동하자 나타난 길은.
오레곤 트레일이었다.
“이 길도 진짜 오랜만이네요.”
“살면서 두 번 지나가긴 힘든 길이지.”
동부에서 서부의 끝으로 이어진 길.
오레곤 트레일은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목숨도 많이 잃은 위험하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비록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저물었지만, 드문드문 마차 행렬과 수레를 끌고 이동하는 자들이 여전히 눈에 띄었다.
그들은 무장한 두 남자의 합류에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더욱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것만으로 경계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디 보자.’
막스는 타겟을 물색하듯 행렬을 둘러봤다.
시선이 멈춘 곳은 수레에 짐을 한가득 싣고 이동하는 가족이었다.
“콜린, 저 쪽으로 가죠.”
막스가 행렬 틈을 파고들자 앞뒤에서 불안한 눈초리가 둘을 향했다.
막스는 개의치 않으며 수레를 끄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 솔트레이크로 가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말은 필요 없습니까?”
남자는 콜린이 몰고 다니는 말 네 필을 힐끔 쳐다봤따. 그리곤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럴 돈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왜 수레를 끌었겠습니까?”
오레곤 트레일을 여행하기 위해, 말과 안장을 사려면 최소 125달러.
이 시기 시간당 평균 임금은 8센트임을 감안하면. 하루 10시간 일한다고 가정, 150일을 일해야 겨우 말 한 필을 살 수 있었다.
남자는 막스가 자신을 우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솔트레이크까지 1달러에 빌려드리죠.”
“...... 1달러요?”
“어차피 저렇게 끌고 다닐 바에야, 1달러라도 버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혹할만한 제안이다.
그런데 덜컥 의심부터 들었다.
어쩐지 1달러에 말을 빌리는 순간 목숨을 담보 잡힐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서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따로 계약서도 필요 없고, 그냥 1달러만 주시면 됩니다.”
“······”
갈등하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부인과 아이들을 바라봤다.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저들이 이렇듯 고생하는 건 가장이 이주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쓰려온 남자는 막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1달러에 말을 빌릴 수 있다면, 저야 고마운 일이지요.”
남자가 옷을 뒤적거려 1달러 동전을 내밀었다. 막스는 담담하게 이를 받고는 콜린에게 말을 건넸다.
“밧줄을 수레랑 연결할 수 있죠?”
“그야 뭐 금방이지.”
콜린이 볼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내심은 의문투성이었다.
‘말을 처리하는 건 반가운데, 고작 1달러를?’
그런데 막스가 누구인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말을 수레에 연결하자 부인과 아이들도 들고 있던 짐을 수레 위에 얹어 놓았다. 아버지를 위해 수레 무게를 줄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몸이 가벼워진 가족들은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여행 내내 찡그리던 얼굴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행복이란 의외로 얻기 쉬운 것이었다.
소문이 그새 퍼졌다.
한 시간 만에 다른 가족들이 나머지 세 필을 1달러에 빌려 갔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때.
막스가 버팔로를 사냥해 끌고 왔다.
“우리 둘이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습니까. 다들 같이 드시지요.”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대신 손 좀 거들어 주십시오.”
야영을 위해 마차와 수레는 코랄(Corral)이라 부르는 방원진을 만드는 데 동원된다.
그 안에서 천막을 치고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막스는 익숙한 솜씨로 버팔로를 부위별로 해체했다.
잠시 후, 식사 시간이 되고.
사람들은 고기를 먹기 위해 스카프를 벗은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막스 조라고 합니다.”
그 이름에 탄성을 내질렀다.
남북전쟁을 종식시킨 미국 총사령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이들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레곤 트레일의 동양인 성자!”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동하는 이주자들은 대부분 몰몬교도들이다. 그들은 그제야 1달러에 말을 빌릴 수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동양인 성자니까.
오레곤 트레일에서 저녁마다 버팔로 고기로 굶주린 교도들의 배를 채워 준 동양인 성자가 있다 했으니. 직접 목격한 자들의 감동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 일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면 약발도 떨어지는 법이지.’
브리검 영을 만나기 전, 막스는 몰몬교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남북전쟁에서 유타주를 중립으로 만들기 위해 존 브라운이 그들의 일부다처제 관행까지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브리검 영에게 자신감과 오만함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터.
어떤 협상이든 우위에 서기 위한 자그마한 조치였다.
‘캬, 이걸 이렇게 또 이용해먹네.’
콜린은 고기를 뜯으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말들을 달고 다니는 귀찮음도 해결하고 인심까지 얻었으니 잔머리는 가히 미국 최강이었다.
*
솔트레이크 시티.
막스가 도착했을 때, 함께 온 몰몬교도만 2백 명이 넘어갔다.
이처럼 많은 숫자가 동부에서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주하게 된 데에는 대륙횡단 열차의 영향이 컸다.
- 가면 철도 공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 브리검 영 회장께서 유타의 철도 공사는 교도들이 맡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정작 계약도 하지 않았는데 브리검 영은 교도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백지 수표를 날려댔다.
‘하여간 능구렁이가 따로 없어.’
막스는 저 멀리 십 수년 째 공사가 진행중인 대성전을 바라봤다. 당시엔 땅을 고르기만 하더니, 이젠 기둥이 제법 갖추어져 있었다.
그래도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다.
원 역사에서 솔트레이크 성전이 완성되는 시기는 앞으로 30년 뒤였으니까.
“오레곤 트레일의 성자님!”
“총사령관님 제발 여기 한 번 봐주세요!”
브리검 영이 있는 작은 성전에 도착할 때, 몰몬교도들은 수천에 달했다.
물론 호기심에 몰려든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들이 머릿수를 채우는 바람에 한 사람만큼은 심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전과 달리 전 미국 총사령관이 되어 나타난 막스.
자신들 세상 안에 갇힌 몰몬교 회장이라도 상대하기 버거운 인물이었다.
“갑자기, 유타엔 어쩐 일이오.”
브리검 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