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조선과 일본의 이벤트
휘이이잉.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건조한 바람이 거세진다.
겨울 끝자락이지만, 애초에 주변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야였다.
터벅, 터벅.
햇볕은 뜨겁고 달리던 말도 이제는 느릿느릿 힘겹게 말발굽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인간의 손길이 닿은 이정표를 발견.
대충 박아둔 나무지만 막스는 미친 듯 기뻐하며 말허리를 박찼다.
그런데.
[헤스팅스 패스까지 30마일(48km)]
[그레이트솔트레이크 사막까지(60km)]
“이런 개···.”
막스가 주먹을 불끈 쥐자.
말도 실망했는지 푸르르르 머리를 털었다.
‘그냥 천천히 갈 걸 그랬어.’
막스는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여러 루트 중 최단 거리를 택했다.
이름은 헤스팅스 컷오프(Hastings Cutoff).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유타를 가로지르는 길로 현재는 거의 버려진 길이었다.
석양이 지는 저녁.
드문드문 지어진 허름한 목조 건물 세 채가 눈에 띄었다. 그 앞에 말이 없었다면 고스트 타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휑한 마을이었다.
Hastings Saloon.
끼익, 끼익.
술집 안으로 들어서자 머릿수가 제법 되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바텐더, 언제 씻었는지 모른 여행자들이 넷이었다.
“자네도 사막을 지날 생각인가?”
바텐더의 물음에 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 안내자와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만.”
“오늘 뭔 날인가. 이거 한 달 치 팔아야 할 걸 전부 풀게 생겼구만.”
장사가 잘되어도 문제인 듯, 바텐더가 인상을 찡그렸다. 막스는 테이블에 앉아 축 처져있는 남자들로 눈을 돌렸다. 전부 사막을 건너려는 여행자들로 보였다.
“싫든 좋든, 저들과 함께 가야 할걸세. 어차피 가이드는 나 혼자니까.”
‘낯선자들과의 동행이라.’
과연 그럴만한 자들인지, 막스는 슬쩍 일행들을 훑어봤다.
‘...... 뒤통수 잘 치게 생겼네.’
고개를 끄덕거린 막스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합니까?”
“오늘은 늦었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걸세. 뭐, 날씨가 거지 같으면 며칠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
바텐더는 컵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하늘이 맑고 해도 쨍쨍하지만, 워낙 날씨가 변화무쌍한 곳이 그레이트솔트레이크 사막이야. 행여 폭풍이라도 불면 죽었다고 생각하고, 소금에 절여질 각오나 하라고.”
“영감, 아까부터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 거야? 나이 처먹은 만큼 입도 무거워야지?”
테이블에 발을 올리고 신문에 얼굴이 가려진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담배를 물었는지 신문 위로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과연 이들과 사막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
미리 걸러내거나, 아니면 뒤통수를 칠 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함께 이동하거나.
막스는 전자를 택했다.
여기까지 와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걸러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일단 스카프부터 내렸다.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 발걸음을 옮겨 신문을 읽고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꺼져.”
놈은 여전히 신문에 얼굴을 가린 채 말을 내뱉었다.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테이블에 엎어졌던 놈들이 하나둘 고개를 쳐든다.
“너, 너는···!”
동양인임을 확인한 놈들이 눈을 치켜떴다.
동료들의 반응에 남자가 신문을 슬쩍 내린다.
그리고 마주한 막스의 얼굴과 눈빛.
툭.
입에 물던 담배가 떨어질 때, 막스가 물었다.
“남부 패잔병들인가?”
남자의 눈동자가 요동치고 몸이 굳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전쟁도 끝났는데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남군이든 북군이든. 이젠 의미 없잖아?”
“이 개자식···.”
“보자마자 그렇게 욕하면 쓰나.”
남자는 막스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강자가 살아남는 시대. 혼돈의 서부에선 이 정도 반응이면 걸러질 이유는 충분했다.
정색한 막스가 목소리를 깔았다.
“내일 사막은 나 혼자 출발한다. 그때까지 내 눈앞에서 꺼져.”
“뻑···.”
장내를 휘감은 침묵.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동료들로 향한다.
암묵적 신호를 주고받은 듯, 테이블에 올려진 다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땅에 닿았을 땐, 자신감이 생긴 듯 눈을 부라리며 말을 내뱉었다.
“미친 쿨리 새끼···.”
“호오.”
걸러내기 위한 도발에 상대가 반응했다. 막스는 기꺼운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를 신호로.
막스가 먼저 홀스터에서 총을 뺐다.
상대는 넷. 각도가 조금 벌어졌기 때문에 선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탕! 탕!
막스의 패스트 드로우, 패닝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속도. 이를 눈앞에서 지켜본 바텐더는 컵과 마른 수건을 든 채,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리고.
털썩.
총성 이후 남자 넷이 동시에 쓰러질 땐, 저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더욱 힘을 주어 컵을 닦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텐더라는 걸 어필하려는 나름의 생존 법칙이었다.
*
바텐더와 시체를 정리한 뒤.
막스가 50달러를 내밀었다.
“손님이 줄었으니 제가 그 값까지 지불하죠.”
방금 시체들을 털어서 챙긴 돈이었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바텐더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심지어 한가하니 좋다며 웃기까지 했다.
“내 저녁을 준비할 테니, 거기서 편하게 쉬고 있게.”
막스는 의자에 앉기 전, 피가 튀긴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깔아 놓았다.
그런 다음엔 리볼버를 올려 두고, 작은 상자에서 손질 도구를 꺼냈다.
총구를 쑤시고, 닦고. 그러다 자연스레 테이블에 깔린 신문을 쳐다봤다.
‘이게 언제 적 신문이냐.’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크게 박힌 헤드라인 만으로도 오래된 신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조선 사절단 뉴욕 방문’이라는 글자를 봐선, 최소 몇 개월 전이었다.
‘역시 오지 마을 답구만.’
전부 아는 내용이라 딱히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나저나, 올해가 66년이니까···.’
조선과 일본에 나름 빅 이벤트가 있는 해였다.
특히 조선의 경우, 개항을 10년 앞당긴 건 의미가 컸지만 갈 길이 멀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조선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 올해 조선에선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해였다.
‘과연 흥선대원군은 어떤 결정을 내렸으려나.’
*
1866년 2월 15일(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신정왕후는 왕의 비를 간택하기 위해 조선에 있는 12세~17 사이의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렸다.
그리고 일부를 추린 끝에 다섯 명의 후보만 남게 되었는데, 그중엔 여흥 민씨 민자영도 포함되었다.
한양 감고당.
여흥 민씨인 인현왕후의 사가였으나, 후에는 민자영의 아버지 민치록이 소유.
그가 죽은 뒤엔 딸 민자영이 홀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었다.
형제와 부모를 여읜 고아라, 민자영은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었는데 이번 왕비 간택 역시 그들의 도움이 컸다.
“후보들이 쟁쟁하긴 하지만, 결국 삼간택에서 대원군은 너를 택할 게다.”
“가당치도 않습니다. 감히 제깟게 뭐라고요.”
“자신감이 그리 없어서야 원. 내가 대원군을 하루 이틀 뵈온 것도 아니고, 이미 그 속내를 훤히 알고 있다.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
민승호, 민겸호가 민자영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두 형제가 이렇듯 자신하는 건,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때문인데 누이가 바로 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이었다.
그동안 외척 세력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대원군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택할 리도 없고.
티만 내지 않았을 뿐, 사촌 오빠들의 확언대로 민자영 역시 자신이 간택될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었다.
한양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거처.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대구 서씨, 기계 유씨.
그리고 여흥 민씨.
이들 다섯 세가의 딸을 두고 대원군이 고민에 휩싸였다.
원래 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을 즉위시키기 위해 안동 김씨와 비밀 묵계를 체결했다.
내용은 안동 김씨를 왕의 배필로 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땐 그때고.’
가뜩이나 막강한 안동 김씨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약속은 파기해야 했다.
이는 풍양 조씨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이것저것 따져보면 남은 선택지는 여흥 민씨뿐. 자신의 부인도 그렇고, 이대를 이어 여흥 민씨와 연을 맺으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력을 견제하리라 여겼다.
더욱이 여흥 민씨 민자영의 경우엔 아버지 민치록의 병간호를 지극히 한 효녀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9살이었던 걸 생각하면 싹수부터 달랐다.
‘아버지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외척 세력도 두지 않을 터.’
볼 것 없이 민자영을 택해야 했다.
그런데.
- 모름지기 며느리를 잘 봐야 하오.
미리견 총사령관이 한 말 때문에 이렇듯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범을 피하려다 여우를 만나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라 했던가.’
범은 말 그대로 이미 힘을 갖춘 것이고.
여우는 힘은 없지만, 머리가 교활하고 잔꾀가 많은 법이다. 또한 여우는 절대 자신이 여우라는 걸 드러내지 않는다.
‘민씨 아이가 여우라면 어떤 식으로 날 위협할까.’
흥선대원군은 여러 경우의 수를 따져봤다.
하지만 현재로서 여흥 민씨들이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문득 자신을 비추어 생각하니 뭔가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하려 파락호 생활을 하고, 아들을 왕좌에 올리기 위해 걸어왔던 길.
지금은 범일지 모르나, 상갓집 개 소리를 들으며 자란 대원군은 분명 여우였다.
씁쓸한 표정 뒤에 대원군의 눈이 이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상실한 것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
밑바닥에서 하늘로 올라가 권력을 맛보았을 때, 그걸 지키고자 하는 집념.
민자영을 자신과 빗대어 생각한 순간, 흥선대원군의 머릿속 고민도 사라졌다.
며칠 뒤 3월 6일.
최종 삼간택이 있는 날.
여흥 민씨 민자영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쏟아냈다.
밖에 있던 민승호, 민겸호는 착잡한 얼굴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대원군은 왕비는 안동 김씨 김우근의 여식으로 간택.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충격적인 결정이었다.
조선의 왕비가 결정되기 두 달 전.
일본 남쪽의 나가사키현.
삿갓을 눌러쓴 사무라이들이 숲에 퍼져 매복하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사무라이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조슈와 사쓰마번의 회동이 방금 끝났습니다. 조슈번이 먼저 저택을 빠져나왔습니다. 곧 이쪽으로 올 겁니다.”
“연결자들은?”
“저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흠.”
턱을 매만진 남자는 생각을 정리한 뒤, 옆에 있는 자들에게 말을 전했다. 일본어가 아닌 영어 발음으로.
“회동은 끝났고, 조슈번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오케이. 그럼 시작해보자고.”
와일드 빌 히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료들을 힐끔 쳐다봤다. 삿갓을 눌러 쓴 채, 기모노를 입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온갖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번 일의 핵심은 사쓰마번이 조슈번을 공격한 것으로 위장하는 것.
더불어 양측의 동맹을 중계한 연결자들.
사쓰마 측의 사카모토 료마와 조슈 측의 나카오카 신타로를 암살하는 것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SFBC 대원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막부의 아이즈번. 신선조 사무라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