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내가 왜 총잡이인지 보여주지
남북전쟁에서 검은 천으로 감싼 라이플은 특수부대원 저격수들의 심볼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소문 난 건 아니고, 독립적으로 활동한 탓에 SFBC 대원끼리만 알고 있는 정도랄까. 사실상 같은 북군이라도 특수부대 저격수를 만날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라이플만 보고 알았다 이거지.’
조금은 흥미가 생긴다.
막스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 특수부대인 모양이군. 나는 조셉 알프레드 슬레이드. 사람들은 잭 슬레이드라고 부르지.”
말투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잭 슬레이드.’
실제로 동부까진 아니더라도, 이 일대에선 제법 이름을 날린 총잡이였다.
막스는 그에 관한 기사를 떠올렸다.
망해버린 포니 익스프레스의 역마차 감독관.
냉정하고 침착하지만 포악한 성격을 지닌 서부 개척지의 전형적인 총잡이. 그리고 현재는 웰스파고가 인수한 센트럴 오버랜드 역마차의 감독관, 잭 슬레이드.
하지만 그것만으론 막스의 관심을 끌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용건은?”
막스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잭 슬레이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내 이름을 듣고도 담담한 걸 보니 과연 특수부대원이군.”
“...... 용건을 물었다.”
“용건이라. 막스 조는 지금 어디 있지?”
“막스?”
고개를 끄덕인 잭 슬레이드가 날카롭게 막스를 쏘아봤다.
두 가지 용무가 있다는데, 하나는 비즈니스,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은원을 해결하기 위함이라 했다.
“나한테 말하면 전해주마.”
“네가 그런 급인가? 내가 직접 만나야 한다. 더구나.”
잭 슬레이드는 막스가 끌고 가는 말들과 수레를 보며 피식거렸다.
“미련하게 소금 사막을 건넌 것 같은데, 그런 머리로 내 말을 제대로 전달이나 할 수 있겠어? 보스는 약삭빠른데, 밑에 대원들은 죄다 허당들인가...!”
철컥.
총구가 잭 슬레이드 머리를 향한다.
홀스터에서 총을 뽑기까지, 그야말로 전광석화. 미친 속도에 샷것 메신저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막스의 건조한 목소리가 고막을 후볐다.
“셋 셀 동안 용건을 말해.”
“......”
“하나.”
‘뭐야 저 눈빛은!?’
상대는 쪽수를 개무시하고, 두려움은커녕 눈빛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질 않는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사람 수십은 죽여본 듯 대담한 모습이었다.
‘특수부대라더니 과연.’
탄성을 내뱉기엔 당장 목숨이 위태롭다.
재미삼아 총을 뽑진 않았을 터.
잭 슬레이드의 얼굴이 벌게졌다.
“둘.”
“자, 잠깐!"
"세···."
"웰스파고라는 회사에서 SFBC 보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은 잭 슬레이드가 침을 꿀꺽 삼킨다. 상대의 총구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향해 있었다.
“메시지 내용은?”
“...... 그건 본인에게 직접 전해야지. 설마, 보스의 편지까지 탐내는 건가?”
“흠. 그럼 두 번째 용건. 무슨 은원을 해결한다는 거지?”
“그건··· 그냥 해본 말이다.”
“하나.”
‘아오, 시발 진짜.’
잭 슬레이드는 잔뜩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 망할 주식 때문이다!”
“주식?”
막스는 황당한 나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막스 조는 포니 익스프레스 주식을 가장 비쌀 때 팔아넘겼다. 그때 내가 전 재산 4백 달러를 긁어모아 그걸 샀다···.”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잭 슬레이드는 눈을 감으며 분을 삭였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가.
포니 익스프레스가 망할 걸 예상한 막스는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 팔아치웠다.
똥손 율리시스 그랜트가 파산하지 않은 건 막스가 비싸게 팔아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막스의 예상대로 포니 익스프레스는 망했다.
남북전쟁 발발, 대륙횡단 열차 공사가 초읽기에 들어가자 회사 주식은 폭락한 것이다.
당시 막스가 처분한 주식을 산 사람들은 고점에 물려 알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나다. 그런데 내가 가장 열받는 게 뭔 줄 알아? 폭락했을 때, 막스 조는 무려 50토막 난 걸 다시 주워 담았다는 거다.”
그 결과 현재 포니 익스프레스는 막스의 소유였고, 콜로라도와 캔자스, 미주리주의 역마차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취급하는 품목은 금광, 우편, 금융, 개인 소포등 다양했다.
“그래서 주가 조작이라도 했다는 거야?”
“..... 말이 그렇다는 거다. 결국, 헐값에 포니 익스프레스를 인수한 셈이니까.”
내심은 막스의 주가 조작을 확신했지만, 총구가 잭 슬레이드의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막스가 망해가는 회사를 인수한 건 다른 목적이 있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건 체이스, 씨티은행에 이어 향후 미국의 4대 은행인 웰스파고(Wells Fargo). 더불어 같은 창립자가 세운 뉴욕 맨해튼의 아메리카 익스프레스까지 지분을 얻기 위해 포니 익스프레스가 필요했다.
‘서부의 상징인 그 이름만으로도 값어치는 충분하지.’
비록 사업은 실패했으나, 동부에서 서부를 10일 만에 주파한 대담한 시도는 서부의 전설로 기억될 터. 포니 익스프레스는 웰스파고가 눈독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막스가 역마차의 깃발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오버랜드 센트럴 캘리포니아도 웰스파고에 먹혔구나.’
현재 웰스파고는 캘리포니아에서 뉴욕까지 대륙 노선을 확장하고 있는데, 잭 슬레이드가 막스를 찾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생각이 정리된 막스는 리볼버 총구와 스카프를 동시에 내렸다.
“마침 잘 만났다. 내가 막스 조거든.”
경악하는 잭 슬레이드에게 막스가 손을 내밀었다. 주식에 맺힌 복수를 잊은 채 잭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쭈뼛거리며 다가와 막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렇게 만나서 반···.”
“아니, 웰스파고의 메시지를 달라고.”
“아하.”
멋쩍게 웃은 잭 슬레이드가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인사말은 대충 넘기고 핵심 내용을 추려보면.
웰스파고 경영진은 포니 익스프레스를 원했다.
제안 가격은 130만 달러. 현금과 웰스파고의 주식으로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일단 캘리포니아에 가서 만나봐야겠군.’
막스는 편지를 챙긴 뒤 잭의 어깨를 토닥였다.
“모든 투자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다. 주식 가지고 남 원망하는 거 아니야.”
“......”
막스가 염장을 지른 뒤 말 머리를 틀었다.
잭 슬레이드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시발, 그냥 싸울까.’
긴 한숨을 내뱉은 잭은 이내 동료들과 막스의 뒤를 쫓아갔다. 뒤통수를 의식한 듯, 막스는 이미 거리를 벌려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
웰스 빌리지에서 막스는 여분의 말을 팔아 치우고, 필요한 식량을 구입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잭 슬레이드가 알짱댔다.
잡화점에서 산 물건들을 말에 실으려는 때 잭이 말을 걸어왔다.
“근데 SFBC는 어떻게 해야 들어가는 거야? 콜로라도에서 보니까, 돈도 제법 주는 것 같던데···.”
“돈 때문이라면 다른 데 알아봐. 참고로 당분간 SFBC 대원은 늘릴 생각 없다.”
잭 슬레이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웰스파고 편지와 주식 얘기는 그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잭이 진정 원하는 건 SFBC 대원이 되는 것이었다.
“감독관이면 대우가 나쁘진 않을 텐데.”
“거기서 거기야. 게다가 이번에 콜로라도 쥴스버그로 옮기는데, 거기 처박히면 꼼짝도 못 할 거야. 따분한 일이지.”
‘쥴스 버그?’
막스가 고개를 돌려 잭 슬레이드를 바라봤다.
콜린과 역마차 강도를 제거했는데, 놈들과 내통한 역마차 관리인을 대신하려는 모양이었다.
“쥴스 베니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막스의 말에 잭의 눈이 커졌다.
“쥴스 베니를 알아?”
“보진 못했지만, 놈의 평가에 대해선 알고 있지. 놈이 관리한 뒤로 역마차 강도가 끊이질 않고 있다고 들었는데?”
잭 슬레이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중품을 운송할 때만 그런 일이 발생했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지.”
“그래서 네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가?”
“회사에선 증거를 찾아내서 내쫓으라고 했거든. 역마차 강도 놈들을 잡지 않는 이상, 쉬운 일은 아니지. 더구나 쥴 베니는 총잡이야.”
“너도 나름 유명한 총잡이 아니었나?”
잭 슬레이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보단 아주 아주 조금 느릴 뿐이지.”
“그 조금이 생사를 가른다.”
“이거 참, 보여줄 수도 없고.”
막스의 말에 잭 슬레이드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이때, 마을 안으로 말 한 필이 빠르게 다가왔다.
“보안관! 보안관 어딨어!”
‘목소리가 왜 이리 익숙해.’
막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허겁지겁 말을 타고 달려오는 흑인을 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 즘, 지나칠 줄 알았던 흑인이 갑자기 말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이이이잉!
“보, 보스!?”
네바다주에서 흑인이?
기막힌 상황에 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냐, 넌.”
“접니다, 저. 데니스 헤인즈!”
SFBC 대원이자, 현재는 연방 보안관.
과거 세인트루이스 뒷골목에서 파이트 머니를 내걸고 싸웠던 데니스 헤인즈였다.
그런데.
“위장 기가 막히게 했네. 감쪽같다, 야.”
막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하자, 데니스가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 보스에게 배운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상황을 깨달은 듯 데니스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항상 냉정, 침착하라고 했을 텐데.”
“갱단이 지금 쫓아오고 있습니다만···.”
막스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깟 갱단이 뭔 대수라고. 역시 혹한기 훈련이···.”
“30명입니다만.”
“?!”
‘이색, 대체 뭘 건드린 거냐.’
속으로 개념 없는 데니스 헤인즈라고 욕하며, 막스가 눈을 감았다.
덕분에 출렁거리는 눈동자를 감출 수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선은 옆에 있는 잭 슬레이드로 향했다.
“총 좀 쏜다고 했지?”
“..... 그건 다음 기회에. 솔직히 30명이나 되는 갱단은 오버지.”
‘그게 정상이다.’
막스는 개념 없는 데니스를 노려봤다.
그러다 말에서 주렁주렁 달린 가방을 하나둘 풀어 어깨에 짊어졌다.
“너도 내려, 인마.”
“설마 여기서 싸우게요?”
“일대 다수일 땐 시가전도 나쁘지 않지.”
막스의 말에 잭 슬레이드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냥 도망가는 게 낫지 않겠어?”
“SFBC는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흠.”
잭 슬레이드가 감탄할 때, 데니스 헤인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병법 중 최고는 상황에 따른 후퇴다.
- 도망가라고요? 그건 좀.
- 어떻게든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법. 개죽음당하는 것보단 낫다.
‘그랬던 보스가···.’
갑자기 막스가 데니스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마을 보안관한테 가자.”
“예, 옛 썰!”
가는 동안 데니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캘리포니아 경계에 있는 오로라 마을이라고 있는데, 거기서 민간인 여섯이 죽는 사건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데니스가 조사하러 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잔뜩 겁에 질려 탐문 수사에도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가 연방 보안관이라니까, 오히려 저보고 몸을 사리라고 하더라고요.”
“마을 유지가 범인인 모양이군.”
“오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을에 데일리 갱이라고 있는데, 리더가 존 데일리라는 놈이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놈이 보안관이지 뭡니까.”
흑인으로 위장하면서 겨우 알아냈지만, 결국 발각되었다. 그때부터 놈들이 데니스를 쫓기 시작했는데,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났다고 했다.
서부 개척 시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어떤 의도로 마을에 흘러들어왔는지 모르나 무법자가 보안관이 되고, 보안관이 무법자가 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개척마을은 무법자들에겐 은신처인 동시에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는 서부가 확장되고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더욱 잦아졌다.
“어지간하면 유타까지 가려고 했는데, 말도 지치고 식량도 떨어져서 여기에 들렀거든요. 아마 삼십 분 내로 놈들이 도착할 겁니다.”
“흠. 그런데 오자마자 보안관부터 찾은 건 실수인 것 같다. 과연 그들이 널 도와줄까?”
흑인인데다, 30명의 갱단에게 쫓기고 있는데?
막스가 쓴웃음을 짓자, 데니스 헤인즈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Wells Sheriff.
사무실 앞에 부 보안관 둘이 테라스에 기대고 있다.
보안관 수를 보면, 마을의 치안 상태를 알 수 있는데. 작은 마을이지만 부보안관이 둘이나 된다는 건 그만큼 이곳이 위험한 곳이라는 증거였다.
막스은 멀찍이 몸을 숨기고, 흑인으로 위장한 데니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보안관 사무실을 향해 뛰어갔다.
그들은 흑인을 보자 인상부터 찡그렸다.
“무슨 일이야?”
“보안관님, 제가 오로라 마을 갱단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오로라?”
데니스의 말에, 부보안관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한 명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땐 보안관도 함께였다.
“오로라 마을에서 너를 쫓는다고?”
데니스는 빠르게 그간 사정을 설명했다.
조금은 떨어진 곳에서 막스는 보안관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과연 30명의 무법자를 상대로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데니스를 잡아다가 그들에게 바칠 것인가.
그런데 보안관은 애매하게도 중간을 택했다.
“말을 줄 테니 당장 이 마을에서 나가.”
“지금까지 도망쳐왔는데, 안 도와주고요?”
“30명이나 되는 갱단을 무슨 수로?”
보안관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을과 너를 지키려면 이 방법뿐이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어서 가.”
부 보안관 하나가 벌써 말을 끌고 왔다.
‘지극히 인간적인 결정이군.’
30명의 갱단을 상대로, 보안관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막스는 품속에서 배지를 꺼내 허리춤에 달고.
발걸음을 옮겨 보안관들에게 다가갔다.
“연방 보안관, 막스 조요.”
“!”
“마을 지도부터 한 번 봅시다.”
보안관들은 여전히 배지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데니스의 가슴에도 보안관 배지가 달려 있었다.
*
“제가 괜히 일을 크게 벌인 걸까요?”
“그럼 애초에 끌고 오질 말았어야지.”
막스의 말에 데니스는 심란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건물 옥상, 창문에 숨어 있는 자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한 민병대원들이었다.
- 부끄럽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보겠습니다. 연방 보안관이 위협받는데 모른 척 할 수 있나요.
그렇게 곧바로 민병대 열 명을 끌어모은 보안관은 비장한 표정으로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또 한 명.
“내가 왜 총잡이인지 보여주지.”
잭 슬레이드 역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겠다며 합류했다.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드드드드드.
황야를 질주하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말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