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왕자와 거지
“우리가 찾아온 용건은 간단합니다. 타지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동양인끼리, 힘을 합쳐 잘 먹고 잘살아보자는 거지요.”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통(회관), 삼엽 컴파니 보스위아태의 말이었다.
식스 컴파니의 중심 역할을 하는 그는 이막산과 비슷한 시기에 캘리포니아로 넘어온 이민자였다.
막스는 위아태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게 용건이라면 내 대답도 간단하다. 뜻이 같다면 돕는 거고, 아니면 각자 길을 가는 거지.”
“그래서 그 뜻이 뭡니까?”
“불법적인 일은 정리하고 동포들 등쳐먹는 일을 안 하는 거. 그리고 차이나타운의 해체.”
회의장에 탄식이 터져나오고, 이내 이글거리는 눈빛들이 막스를 향한다.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위아태가 말을 이었다.
“저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를 순 있는데, 어찌 같은 길만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나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민자들에게 숙소는 물론, 어학당까지 만들어 이곳에서 정착하는 걸 돕고 있거든요.”
“또한 매춘, 도박, 인신매매, 아편도 취급하지. 차이나타운에서 벌이는 짓들이 이민자들을 위한 일이라고? 개가 웃을 일이지.”
막스가 코웃음치자 위아태의 표정이 굳어졌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습니다. 예를 갖추려 노력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는 할 말이 없지요.”
“그럼 이젠 내 용건을 말할 차례군.”
막스는 분노를 참고 있는 보스들을 하나둘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양지 음지를 넘나들면서 동포들 피 빨아 먹지 말고, 차이나타운의 아편, 매춘, 도박장을 폐쇄시켜.”
“보자보자하니까!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말을 하....”
탁!
테이블 올려진 연방 보안관 배지. 이를 본 여섯 보스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거린다.
이때 막스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가지 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실종된 수이 린을 일주일 안에 내 앞에 데려와.”
“..... 수이 린?”
응솅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막스는 그를 노려보며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내 이복동생이다.”
“!?”
“일주일 내로 데려오지 않으면, 차이나타운을 내가 직접 해체시켜 주지.”
조선인의 이복동생이 청나라 여자라고?
이건 누가 봐도 억지다. 없는 죄도 만들겠다는 공갈과 협박이었다.
보스들은 이를 바득 깨물며 막스를 노려봤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배지가 이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인맥까지 화려한 연방 보안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눈을 감은 위아태가 머릿속 주판을 튕긴다.
수이 린의 행방은 힙이 컴파니 보스 응솅이 알고 있다. 샤오친의 20달러부터 막스는 애초에 식스 컴파니를 노린 것고.
그 타겟은 분명 응솅을 향하고 있다.
문제는 자금의 원천인 매춘, 도박, 아편 사업들을 정리하는 건데. 뉴욕의 사례를 보더라도, 대충 무마하려는 시도는 통하지도 않을 거고.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작금의 상황으로 비유하면 힙이 컴파니를 내주고 다섯이 살아남는 것. 사업에 관한 건 그 뒤에 차차 풀어가면 될 일이다.
위아태가 응솅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할 때, 그 모습을 지켜 본 막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가장 걸리적 거리는게 네 놈이다.’
막스는 샌프란시스코 핑커톤 지점에서 식스 컴파니 보스들에 관한 정보를 입수.
내심 위아태를 제거 1순위로 생각하고 있었다.
차이나타운의 실질적인 구심점.
겉으로는 그럴듯한 사업가로 보이지만, 실상은 음흉하기 짝이 없는 자.
위아태는 사업을 위해 중국에서 갓 건너온 동포들을 감금, 폭행, 쇠사슬로 묶어 귀를 자르고 몇 시간을 채찍질해 길들였다.
약삭빠르고, 음흉하며, 이중적이고, 잔인한 인물.
이런 위아태는 의심 많고 속내를 읽기 쉬운 응솅보다 위험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물론 막스에게 그 둘 전부는 제거 대상이다.
차이나타운을 움직이는 데 여섯 개는 너무 많다.
숫자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회담이 끝나고, 늦은 밤.
막스는 SFBC 대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
차이나타운의 합싱 레스토랑.
중국 음식을 파는 곳으로 사장은 삼엽 컴파니 보스 위아태다.
식당 안에는 간혹 백인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었다.
막스는 테이블에 앉아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위아태가 음식보다 더빨리 막스를 찾아왔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여긴 어쩐 일입니까?”
“서양식은 질려서. 그런데 당신이 이곳 사장이었어?”
“몇 년 됐습니다.”
막스는 괜찮으면 같이 식사하자고 제안했다.
어제 회담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무슨 생각이지.’
고민하던 위아태가 자리에 앉았다.
“마침 잘 됐군요. 같이 점심이나 들죠.”
막스는 식당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막스는 젓가락을 짚어 식탁에 탁탁 치며 가지런히 정렬했다.
‘이거지, 이거. 이 느낌, 대체 얼마 만이냐.’
심지어 돼지고기가 곁들여진 흰 쌀밥도 있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밥 내음에 가슴이 울컥할 정도였다.
‘먹다 눈물나겠는데.’
막스는 격한 마음으로 젓가락을 휘적거려 음식을 입에 가져다 넣었다.
쌀밥에 면 요리까지 싹싹 비우는 동안 대화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위아태는 그런 막스를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잘도 처먹는구나. 이럴줄 알았으면···.’
약이라도 탈 걸 그랬나.
위아태의 눈이 가늘어질 때, 막스가 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말을 건넸다.
“모처럼 맛있게 먹었네. 이정도면 황실인증 마크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입구에 없던데.”
“맛을 떠나 이유가 있습니다. 황제는 쌀을 싫어하거든요.”
웃자고 한 소리에 위아태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차까지 마시고 난 막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밥이나 먹으러 찾아온 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위아태는 막스를 배웅까지 했다.
그리고 막스가 식당을 들어가고 나오는 걸 목격한 중국인 갱단들은 이를 빠르게 보스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호텔로 가는 길.
낡은 군복을 입은 남자가 하수구를 점검하며 뭔가를 열심히 기록한다. 그리고 그 뒤를 사람들이 따라다니며 키득거렸다.
“무릇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치수 사업이다. 그러니 비가 내릴 걸 대비해 하수구를 점검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오오, 그렇군요!”
“역시 황제십니다!”
‘......’
과거 독립전쟁 때 입었던 군복 단추는 채워지지 않고, 깃발 장식이 꼽히 모자를 눌러쓴 남자.
미국의 황제 노턴 1세였다.
위아태가 말한 것처럼 노턴 1세가 미친 건 쌀 때문이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청나라에서 쌀을 수입했다.
그런데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여기에 기근까지 더해져 청나라는 쌀 수출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쌀값이 가파르게 상승할 때, 페루에서 한 업자가 쌀을 수입해온다는 소릴 듣고, 노턴 1세가 이를 비싼 값에 사들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페루에서 쌀이 계속해서 수입되고 쌀값은 이전보더 더 싼 값으로 떨어졌다.
파산한 노턴 1세는 알거지가 되어 캘리포니아를 떠났고. 다시 돌아왔을 땐 황제가 되어 있었다.
- 짐은 미국의 황제 노턴 1세니라. 그대는 즉시 내 즉위식을 세상에 알리도록 하라.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사 편집장은 황당했지만, 신문 판매 부수를 늘릴 목적으로 신문 1면에 황제 즉위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황제는 얼마 뒤엔 고위 관리들의 부패를 언급하며 미국 정부를 해산하고, 당시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을 파면했다. 그리고 직접 정사를 돌보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도 고위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들끓던 시기라, 샌프란시스코 시민은 ‘노턴 황제’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리고 그 인기는 날이 갈수록 시들기는커녕, 샌프란시스코 유명인사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총사령관은 어디있습니까, 황제 전하?”
“멕시코에 내 서신을 전하러 갔느니라.”
“메, 멕시코요!?”
대중이 놀라지만, 노턴 1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하수구를 체크했다.
물끄러미 이를 지켜 보던 막스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와 총사령관이라···.’
이날 이후 막스는 위아태 식당을 몇 번 더 찾아가고, 심지어 위아태를 호텔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SFBC 대원들이 뻔질나게 식당을 방문하고 이 또한 다른 보스들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건 힙이 컴파니 보스 응솅이었다.
차이나타운 북쪽 키어니 스트리트.
샤오친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위아태는 속이 시커먼 잡니다. 그 조선놈을 만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따거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거죠!”
응솅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막스 조가 자신을 타겟으로 삼은 이상, 위아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응솅이 음산하게 말을 내뱉었다.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면, 그건 위아태일거다. 어차피 희생양이 나오는 순간 이 사태는 끝나게 되어있으니까.”
응솅의 논리는 이렇다. 막스가 식스 컴파니를 길들이려 기세 싸움을 벌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연방 보안관은 무법자가 아니다.
확실한 증거와 명분이 없는 한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희생양이 나오는 순간 사태는 일단락 될 가능성이 컸다.
‘그건 그거고.’
“수이 그 계집은 어떻게 됐어?”
“절대 내놓을 수 없다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아토이 성격 모르십니까?”
“매춘부였던 년을 이렇게까지 키워준 게 누군데.”
“그걸 알면 아토이가 아니죠.”
캘리포니아 초기 이민자이자 매춘부였던 아토이는 현재 여러 개의 매춘 업소를 운영하는 마담이자 사업가였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수이를 보자마자, 거액의 돈을 주고 데려간 게 바로 아토이였다.
“일 틀어지면 내가 가만 안 둔다고 해. 그리고 말야. 항구에 자딘매시선 들어와 있지?”
응솅이 목소리를 낮추며 묻자, 샤오친은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윌리엄 캐즈윅도 와 있거든요. 여차하면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우리가 당할 위험도 있어. 캐즈윅은 위아태와도 관계가 좋으니까.”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혹시 모르니 넌지시 떠보기만 할게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한 카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자딘매시선도 그중 하나였다.
“그건 그것대로 준비하고. 중요한 건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다. 그때까지 막스 조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엮이지 말아야 해.”
“애들한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해놨습니다.”
‘한 놈만 걸려라’ 막스는 누군가 시비 걸기를 바라는 것처럼 차이나타운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상대는 연방 보안관이자 전 미국 총사령관.
건드려서 피해보는 건 단연코 중국인이었다.
“절대, 절대. 건드리지 마.”
*
식스 컴파니의 내분을 유도했지만, 아직까지 큰 진전이 없고. 누군가 트리거를 당겨야 하는데 다들 막스를 개무시한다.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해서 막스가 택한 방법은.
“진짜 이거 입으려고요?”
“총사령관이 입던 건데, 어려울 거 있나.”
SFBC 대원이 낡은 옷과 모자를 가져왔다.
가짜 중국인 총사령관이 입던 것들이었다.
“지금 걔는 뭐해?”
“개새끼가 자꾸 우리한테 명령하더라고요. 몇 번 총으로 쏠 뻔한 걸 참았습니다. 아무튼, 공장에 있는 보스 방에서 신나서 혼자 놀고 있어요. ”
“하필 내방을? 이게 무슨 왕자와 거지냐?”
“..... 그러고보니 상황이 딱 그렇네요.”
대원들이 시선을 피하자, 막스는 혀를 차며 하나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착용하자 대원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와 진짜 그 정신병자같네요.”
“이 미친 싱크로율 뭡니까?”
“뒤질래?”
호텔 밖으로 은밀히 빠져나간 막스는 말을 타며 거리를 질주했다.
“와아, 총사령관이다!”
여기저기서 총사령관이라는 환호가 들려오자 과거의 영광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은근 취하는구만.’
사람들의 관심 속, 질주하던 말이 멈춘 건 하수구 앞이었다.
매번 가짜 총사령관이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차이나타운 갱단이 이를 갈취한다고 했다.
막스는 이를 노린 것이지만, 사실상 이렇게까지 한 데에는 한 인물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대망상증에 빠졌지만, 시대를 앞서간 인물.
오늘도 열심히 하수구를 체크하던 노턴 1세는 여유롭게 고개를 들어 막스를 바라봤다.
그렇게 시선이 3초간 머물렀을 때.
“총사령관은 짐에게 예를 갖추라.”
“......”
눈알을 굴리며 고민하던 막스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노턴 1세가 고개를 끄덕인다.
황제를 알현하는 데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니.
‘내 불찰이다.’
막스가 잠깐 반성을 하던 때.
이번엔 노턴 1세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오른 팔을 들더니, 이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미국의 영광을 위하여!”
“...... 위하여!”
막스가 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하자, 흡족한 듯 노턴 1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물었다.
“그래, 멕시코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에게 내 서신을 전달했는가, 총사령관?”
“...... 너무 멀어서 그만.”
“저런.”
노턴 1세가 혀를 끌끌 차더니, 이해한다며 막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들고, 황제와 총사령관의 만남에 열광했다. 그런데 이때 황제가 슬쩍 다가와 막스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진짜 총사령관은 어디있나?”
“!?”
“뭐, 자네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네. 나라를 위한 마음만 있다면, 자격은 충분하지.”
“......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노턴 1세는 피식 웃으며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