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저와 가실 곳이 있습니다
“잔뜩 판을 깔아놓고, 이제 와 도와주는 척하는 이유가 뭡니까. 고작 우리를 굴복시키기 위해 이딴 짓을 벌였습니까?”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위아태가 물었다.
모든 기반이 날아갈 위기였지만, 마지막 자존심은 남은 모양이다. 혹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던가.
막스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유 따위 물을 시간에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를 대답해야지?”
“...... 당신의 의도를 알아야 따르든 말든 할 것 아니요.”
“아직도 그걸 몰라? 보기보다 이해력이 많이 딸리는군.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차이나타운 내 도박, 매춘, 아편, 인신매매 금지.
“앞으로 내 밑에서 합법적인 일만 하라는 거야.”
“지금 당신이 저지른 일도 합법적인 일은 아니지요. 단 며칠 만에 식스 컴파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럼 믿지 말던가. 내가 선택을 강요했어?”
젠장, 애초에 선택지란 게 존재했나.
위아태의 입술이 씰룩거릴 때, 막스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알아서 내려갈래, 아니면 떨어트려 줄까.”
기겁한 위아태와 두 명의 보스는 눈알을 굴려 옥상 주위를 훑었다.
SFBC 대원과 핑커톤 탐정들은 언제든 자신들을 내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레스토랑은 응솅이 차지했고 주변으로도 놈들의 수하가 깔린 상황. 건물에서 떨어져 용케 살았다 한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핏기가 사라진 위아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따르겠습니다. 불법적인 일에 손을 떼고, 천지회와도 연을 끊겠습니다. 우리도 원하던 바였습으니까요.”
“좋다. 그 말을 믿지.”
특별한 계약서도 없이, 막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위아태에게 시선을 떼 SFBC 대원들에게 눈짓했다.
“가자.”
“옛 썰!”
막스가 옥상 문을 열어 사라지고 그 뒤를 대원들이 따른다. 남겨진 자들은 핑커톤 탐정들과 식스 컴파니 보스 셋. 그중 닝옌 컴파니 보스가 중국어로 속삭였다.
“진짜 그자 밑으로 들어갈 생각입니까?”
“글쎄요.”
위아태가 닝옌 보스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당장은 위기부터 모면해야지 않겠습니까.”
“역시 같은 생각이었구려.”
천지회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면 세력을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자금력이 따라야 한다. 합법적인 사업으로는 까마득한 일이었다.
더욱이 이미 불법적인 사업으로 돈맛을 본 자들이라 막스의 제안은 와닿지 않았다.
“당장 천지회, 자딘매시선과 척을 진다 해도 응솅이 제거되면 결국 그들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 거요. 오히려 그때가 되면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막스 조가 되려 우리를 도와준 셈이군요.”
“그건 속으로만 생각하고, 겉으로 티 내선 안 됩니다.”
“당연하지요.”
어차피 막스는 캘리포니아에 상주하지 않는다.
있는 동안만이라도 따르는 ‘척’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들의 입꼬리가 올라갈 즈음.
건물 아래쪽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위아태가 건물 옥상에 있다!”
“!?”
목소리의 주인공은 막스 조.
옥상을 내려다보던 핑커톤 수석 탐정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어이구, 엄청 몰려오는구만.”
위아태의 얼굴이 창백해질 때.
타앙! 타앙!
차이나타운의 밤을 깨우는 총성이 잇달아 울려 퍼졌다. 위아태는 자신을 미끼로 사용하는 막스의 전술에 몸을 부들거렸다.
‘망할 새끼.’
*
건물 2층.
계단으로 올라오던 놈들이 총에 맞아 연달아 쓰러졌다. 조용하게 연장만 쓰던 갱단들은 당황한 나머지 계단에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때 뒤쪽에서 나타난 천지회 소속의 무사들이 시체들을 앞세워 계단을 오르는데. 총탄도 그들에겐 무용지물이었다.
‘과연 살인병기!’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시체를 방패 삼아 길을 뚫다니. 갱단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들이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갈 즈음.
콰아아앙!
강력한 폭음에 건물 내부가 뒤흔들리고 3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폭사 주저앉았다. 폭발에 휘말린 살점과 피가 뒤섞여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가 먹먹해진 갱단들은 혼비백산해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가고, 총성이 다시 이어졌다.
“바, 방금 무슨 소리였지?”
레스토랑 앞에서 사태를 주시하던 응솅이 눈을 껌뻑거렸다. 샤오친은 이럴 때가 아니라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서 피해야합니다, 응 따거! 곧 SFPD가 몰려온다고요!”
SFPD는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조직의 명운을 건 싸움에서도 연장을 고집한 건 경찰을 두려워해서였다. 캘리포니아의 법은 백인들을 위해 존재할 뿐, 중국인에겐 냉혹하게 적용되었다.
그런데 상대는 총과 폭탄까지 닥치는 대로 사용해 차이나타운을 진정한 전쟁터로 만들었으니.
그게 누구인지 굳이 말이 필요할까.
피격당했다던 막스 조, 경찰보다 막강한 연방 보안관이 개입했다. 이를 깨닫는 순간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입술을 깨문 응솅의 시선이 주변을 훑는다.
이번 일에 동조한 힙캣, 응우 컴파니의 보스들은 부하들을 데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약아빠진 놈들!’
자신의 부하들이라고 다를 건 없다.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머리가 있는 놈들은 이미 몸을 내빼고 있었다.
위아태를 제거하지 못했고, 연방 보안관 막스 조까지 개입된 이상.
응솅이 살 방법은 하나.
“항구로 간다.”
현재로선 캘리포니아를 벗어나 홍콩으로 돌아가는 게 유일한 탈출구.
응솅과 샤오친은 미로 같이 얽힌 차이나타운의 골목을 빠져나가 항만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도착했을 땐 자신들을 기다린 듯 자딘매시선 상선은 모든 출항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갑판에 서서 자신들을 쏘아보는 윌리엄 캐즈윅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꼴을 보아하니 실패한 모양이군.”
“망할 막스 조가 개입했소! 내 홍콩에 가면 다시 조직을 정비해 복수를 할 거요!”
“과연 천지회 무사들을 버리고 달아난 놈을 그냥 놔둘까?”
윌리엄 캐즈윅의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 있던 자들이 라이플 총구를 겨눈다.
“응솅. 네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동양인 총사령관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비, 빌어먹을 윌리엄 캐즈윅!”
탕!
탕!
털썩.
바닥에 쓰러진 응솅과 샤오친. 둘의 몸은 항구에서 멀어지는 자딘매시선의 배를 응시한 채 싸늘히 식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항구를 감시하던 핑커톤 탐정들이었다.
“기다리면 응솅이 올 수도 있다더니, SFBC 보스의 예측이 맞았네.”
“대신 자딘매시선이 저렇게 뒤통수치고 도망가는 건 예측 못 했잖아.”
“그것까지 맞추면 신이지.”
차이나타운에서 항구까지 거리는 불과 1km.
자딘매시선의 윌리엄 캐즈윅은 총성이 들려오자마자 출항 준비를 지시했고, 폭발음이 들려올 땐 일이 실패했음을 확신했다. 중국인끼리 싸우면 절대 저런 소리가 들려올 리 없을 테니까.
윌리엄 캐즈윅은 담담한 얼굴로 작아지는 항구를 응시했다.
‘손해가 막심하구만.’
천지회 무사 열을 잃고, 차이나타운 시장까지 축소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캐즈윅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지 않았다.
‘막스 조가 천지회의 공적이 된 것만으로 충분하다.’
천지회가 막스를 제거하면, 조선, 일본, 미국 사업을 가로막던 장애물은 저절로 제거될 터.
캐즈윅은 천지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만들었다.
이는 무력집단이 아닌 자딘매시선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차이나타운.
“시신 파악하고, 붙잡은 놈들은 전부 감옥에 처넣어!”
샌프란시스코 경찰의 대응 덕분에 사건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막스와 주지사, 경찰국장이 사전에 합의를 본 상황이라 복잡할 것도 없었다.
“건물 수리 비용은 연방 정부에 청구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자들을 진짜로 잡아둘 생각입니까?”
경찰국장이 위아태와 다른 두 보스를 가리켰다.
사실상 이번 사건의 피해자 같은데 그들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고, 황당한 눈빛은 막스를 향하고 있었다.
‘왜 우리를 잡는 거야?!’
막스는 위아태의 따가운 시선을 흘리며 경찰국장에게 말을 건넸다.
“차이나타운이 어느정도 정리될 때까진 잡아두는 편이 낫습니다. 대신 다른 갱단들과는 분리해서 가둬야 해요. 암살당할 수도 있으니까.”
뒤처리는 경찰에게 맡겨두고. 막스는 SFBC 대원들과 핑커톤 탐정들과 함께 호텔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들과 1층 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길고 긴 하루를 끝마쳤다.
*
샌프란시스코의 파이크 스트리트 골목.
“마담! 큰일 났습니다!”
“손님들 있는데 시끄럽게 웬 호들갑이야!”
“죄, 죄송합니다. 그게 알렌이 또 찾아왔거든요.”
빅토리아 양식의 화려한 옷을 입은 중국 여인이
신경질적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찾아왔는데 뭐 어쩌라고. 내쫓으면 되잖아! 어디 한두 번이야?”
“그런데 이번엔 좀 달라요. 알렌은 밖에 있고, 잔뜩 무장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뭐?”
식스 컴파니 보스가 줄줄이 제거된 때, 불길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는 미스 아 토이. 수이 린을 데리고 있는 매춘 업소 사장이었다.
아 토이는 손톱을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알렌 차오와 함께 왔다는 건 분명 수이 린 때문일 터. 비싸게 사 온 만큼 수익을 보려면 한참을 더 굴려야 했다.
‘절대 그냥 내줄 수 없지.’
이럴 때 필요한 건 그동안 쌓아둔 인맥들.
마침 막강한 직위를 가진 고객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넌 얼른 가서 찰튼 의원을 모셔와! 이왕이면 홀렌 부장도!”
“아,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남자가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고, 곧이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등장했다.
“네가 미스 아 토이인가?”
“...... 그, 그런데요.”
“내가 찾아온 이유 알지?”
막스가 스카프를 내리자, 아 토이의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그리고 이내 최근 차이나타운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방 보안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아 토이가 고개를 저었다.
“모, 모르겠는데요.”
“몰라? 영리하다더니 머리가 나쁘구나.”
막스가 응접실을 스윽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다 박살내줘?”
“...... 그러지 말고 앉아봐요.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계약해서 고용한 거라고요.”
“10초 준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아 토이는 이내 앙칼진 표정으로 막스를 노려봤다.
“연방 보안관이면 다에요? 엄연히 법이 있는데 절차는 따라야죠!”
“7초 남았다.”
“......”
초조해진 아 토이의 얼굴이 시뻘게질 때, 계단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다다다.
“백주 대낮에 어떤 놈이 여길 처 들어와!?”
이들은 방패막이로 아 토이가 부른 샌프란시스코의 나름 고위직 관료들이었다.
그런데.
“!”
막스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빛의 속도로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입을 쩍 벌린 아 토이에게 막스가 다시금 말을 건넸다.
“3초.”
“자, 잠깐만요!”
“2초.”
“알았어요! 데려올게요!”
잠시 후, 데려온 수이 린은 초점 없는 눈빛에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상 막스와는 상관도 없는 여자였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아편에 중독된 건가?”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죄, 죄송합니다.”
생존본능인지 아 토이가 넙죽 엎드렸다.
그러면서 지껄이길 자신은 더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캘리포니아 최초의 중국인 창녀다.
다만 차이점은 분명히 있다.
아 토이는 골드러시에 편승해 홍콩에서 남편과 함께 캘리포니아 행 배에 올랐고, 도중에 남편은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
이후 배 선장의 정부가 된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해서는 중국인 여자가 단 7명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몸값을 깨닫게 된 아 토이는 스스로 매춘부가 된 케이스였다.
막스의 손이 느릿느릿 홀스터를 향한다. 그 모습을 힐끔거린 아 토이의 몸이 경직되었다.
“서, 설마 여자를 쏘는 건 아니죠?”
“여자는 뭐가 다른가?”
차가운 막스의 목소리에 아 토이가 몸을 부들거렸다. 그리고 그 떨림이 멈췄을 때.
타앙!
아 토이의 손바닥에 구멍이 뚫리고, 감추고 있던 리볼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가 작아 숨기기에 좋은 스미스앤 웨슨 넘버1 모델이었다.
고통과 함께 아 토이의 눈빛이 마구 요동친다.
눈물이 고인 눈동자는 삶을 갈구하지만, 막스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총소리에 놀란 손님들과 직원들이 가게를 뛰쳐나간다. 반대로 밖에 있던 알렌 차오가 황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는 난리통에도 멍한 자신의 연인을 발견했다.
“수이···.”
아 토이의 매춘업소를 시작으로, 막스는 SFBC 대원 세과 경찰 200여 명을 동원해 차이나타운을 휩쓸었다.
아편굴, 매춘, 도박, 노예를 매매하던 지하 업소들이 차례차례 사라졌다.
이와 함께 응솅과 동조한 두 명의 보스 역시 SFBC 대원들에게 암살당하고. 위아태와 나머지 보스는 여전히 감옥에 붙잡아 두었다.
자신들의 사업체가 하나둘 박살 나는 걸 알게 된 위아태의 야망과 의욕은 하루가 다르게 꺾여만 갔다.
사실상 막스는 급할 게 없었다.
며칠 뒤.
막스는 한 사람을 찾아갔다.
남자는 낡은 군복을 입은 채, 오늘도 하수구를 체크하는 노턴 1세였다.
특유의 인사를 끝낸 황제가 입을 열었다.
“마침 짐이 그대에게 내릴 지시가 있었느니라.”
“그 전에, 황제 폐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허락하노라.”
막스는 진짜 황제가 입을 법한 옷을 노턴 1세에게 선물했다. 눈알을 굴려 옷을 꼼꼼히 확인한 황제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체통을 위해 기쁨을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흠흠. 내일 백성들을 만날 때 이 옷을 입으면 되겠군.”
“그럴 게 아니라 당장 이걸 입고 저와 가실 곳이 있습니다.”
“짐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기꺼이. 그래서 그곳이 어디인가.”
막스가 웃으며 말을 전했다.
“조선 사절단의 환영식 행사이옵니다.”
마침내 조선 사절단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대규모 환영식이 열리기 직전 막스는 노턴 1세를 찾아온 것이다.
“...... 짐이 가도 되는 자리인가?”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고 그러십니까.”
“험. 그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런 것이니라.”
“전혀요. 얼른 갈아입고 갑시다.”
조선 사절단에게 노턴 1세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길거리에서 기품있게 옷을 갈아입은 뒤, 막스는 노턴 1세를 마차에 태웠다.
“그럼 환영식 행사장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허락하노라.”
마부가 된 막스가 힘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가는 동안 노턴 1세는 창문 밖으로 연신 손을 흔들며 백성들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