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7화 (327/360)

#327 순수하고 마음이 여렸던 히콕

노예주로서 연방을 배신한 텍사스.

비록 조기에 탈환되었지만, 주에 속한 백인들은 노예제 옹호론자인 데다 텍사스 독립까지 꿈꿨다.

반면 캔자스의 백인들은 미주리주와 치열한 전쟁을 거듭하며 자유주의 상징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캔자스인들은 텍사스에 대한 편견, 이를테면 텍사스인들을 무식하고 폭력적이며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고집쟁이들로 여겼다.

게다가 술집에 캔자스인들의 쪽수가 많아서인지, 대놓고 텍사스 카우보이들을 비아냥거리는데···.

“전쟁 때 텍사스에 가서 한바탕 싸우고 싶었는데, 그렇게 빨리 점령당할 줄 누가 알았겠냐.”

“땅덩이만 오지게 컸지, 원래 앵글로 텍시안 새끼들의 간이 콩알만 하거든.”

“근데 앵글로 텍시안이라고 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지 않냐? 걍 TexASS가 어울린다고.”

텍사스에 초기 정착한 백인들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인이다. 그들은 인디언과 자연에 맞서 싸워 땅을 개척하고 농장과 목장을 경영해, 사람들은 이들을 앵글로 텍시안으로 불렸다.

이는 WASP(백인-앵글로색슨-기독교) 상류층과는 개념이 달라 비아냥거리는 말로도 쓰였다.

탁!

조롱과 비아냥 속에 텍사스 카우보이 한 명이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하여간 모자만 있고 소는 없는 놈들이 말만 많다니까. 정작 텍사스엔 무서워서 발도 못 들이는 인간들이.”

탁. 탁.

“방금 뭐라고 씨부렸냐.”

“이거 뭐 소귀에 성경 읊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말해 줘? 모자만 쓴다고 카우보이가 아니란 얘기다, 겁쟁이들아.”

“이 개자식이!”

드르륵.

흥분한 캔자스 백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술집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젊은 텍사스 카우보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곱상하게 생긴 얼굴만큼 여유를 보였다.

“너희들이 텍사스에서도 이럴 수 있다면, 내가 사과하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애초에 갈 용기가 없을 테니까.”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네.”

화가 치민 남자가 홀스터에서 총을 뽑으려 했다.

막스의 눈짓을 받은 히콕이 드르륵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블린에서 총싸움은 허용하지 않는다. 뽑는 순간 구멍 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

가슴에 반짝거리는 배지.

목소리의 높낮이 없이도 충분히 위협적인 말투.

와일드 빌 히콕이라는 이름의 무게감.

하지만 억울한 캔자스 카우보이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보안관도 들었잖아. 우리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그리고 이 새끼. 눈빛, 말투만 봐도 알 수 있어. 남군 찌끄레기라는 거.”

“솔직히 보안관도 북군이었잖아? 그런데 이런 새끼를 그냥 놔둔다고?”

캔자스 백인들의 성토가 여기저기 터져 나오자, 히콕이 손을 들어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곤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전쟁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남군 북군 타령이야. 다시 말하지만 내가 보안관인 이상, 마을에서 총을 뽑는 건 허락하지 않아.”

“역시, 보안관은 말귀가 통하는구만. 상식이 있어.”

히콕은 이죽거리는 젊은 텍사스 카우보이를 응시하며 말을 내뱉었다.

“너도 주둥아리 닥쳐. 겁대가리 없이 나대다 뒈지지 말고.”

“쳇. 당신도 텍사스에 오면 별 수···.”

“그 텍사스에 몇 번 가봤는데, 별거 없더라. 아무튼, 내 총에 너 같은 애송이들 여럿 죽었다는 것만 알아 둬.”

“......”

히콕은 청년에게 시선을 거두며 두어 번 손뼉을 쳤다.

“상황 종료. 모두 주님의 말씀대로 평화를 사랑하도록. 피스.”

장내를 정리한 히콕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나 괜찮았어, 보스?”

“이게 정의고 보안관의 역할이지.”

자유주와 노예주를 선과 악으로, 적과 아군으로 정의 내리는 시대는 끝이 났다. 텍사스든 캔자스든, 싸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일 뿐.

막스가 미소를 머금으며 잔을 들었다.

둘이 잔을 부딪힐 때, 누군가의 잔이 불쑥 끼어들었다. 젊은 텍사스 카우보이였다.

그는 생글거리며 막스에게 물었다.

“술 마실 땐 그 스카프 벗을 거지?”

막스는 코웃음 치며 스카프 속으로 잔을 넣은 뒤 입에 털어 넣었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남자는 이내 술잔을 들이킨 뒤 히콕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안관한테 잘 보였어야 했는데, 시작이 별로였네. 난 텍사스 브라조스에서 온 존 베이커 오모훈드로. 사람들은 날 ‘텍사스 잭’이라고 부르지.”

“윌리엄 히콕이다. 꺼져.”

“...... 너무 그러지 말아. 근데 설마 내가 아는 그 히콕이 맞아?”

오모훈드로는 과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껌뻑거렸다.

“서부 최고의 총잡이 와일드 빌 히콕. 그 히콕이 맞냐고.”

서부 최고라는 부분에서 히콕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슬쩍 막스를 쳐다봤다.

‘뭐, 어쩌라고 새꺄.’

막스가 무시하며 넉살 좋은 젊은 카우보이, 오모훈드로를 쳐다봤다. 그 이름이 흔치 않기 때문에 막스는 전생의 기억 어딘가에서 오모훈드로의 정보를 들춰낼 수 있었다.

텍사스 잭 오모훈드로.

남군 정찰병에서 카우보이로, 다시 배우로 유명해진 인물. 그 자체만으로 보면 별 주목할 게 없지만, 와일드 빌 히콕과 버팔로 빌 코디의 친구라는 점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특히 버팔로 빌 코디가 만든 ‘와일드 웨스트 쇼(Wild West Show)’의 주인공이 되면서 텍사스 잭은 엄청난 인기를 얻는 쇼맨이었다.

또한 목재 펄프에 인쇄되어 전 세계에 팔려나간 불후의 명작, ‘다임 소설’의 첫 번째 소설 주인공이 될 만큼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는군.’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뒤틀린 역사에서 버팔로 빌 코디는 ‘와일드 웨스트 쇼’를 만들 수 있을지.

서부 시대와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백인 중심으로 포장한 쇼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런데, 이 자식···.’

술집에 들어오면서 텍사스 잭은 이미 히콕의 존재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용기 있는 행동과 도발은 보안관이 나선다는 확신이 들어서 한 것일 테고.

‘영악하거나, 혹은 위험한 장난을 칠만큼 실력도 괜찮으려나.’

막스의 오묘한 시선을 의식한 텍사스 잭은 ‘이 새낀 대체 뭐지’라며 입을 삐죽거렸다.

이때.

삐걱, 삐걱.

또다시 일단의 무리가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열 명의 무장한 사내. 그 선두에 있던 남자는 장내를 훑어보더니, 이내 시가를 문 채 히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랜만이야, 덕빌.”

“덕빌?”

텍사스 잭이 히콕을 쳐다봤다.

화살촉 코는 그렇다 치고, 히콕의 입 역시 평범하진 않았다. 수염에 교묘히 가려졌지만, 오리처럼 입이 툭 튀어나왔으니까.

가히 덕빌이란 별명이 어울렸다.

텍사스 잭은 고개를 숙여 웃음을 참고.

막스 역시 스카프 위 눈가를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어금니를 깨문 히콕의 가뜩이나 각진 턱이 더 각져 보였다.

“요즘 한창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데, 덕빌.”

“닥쳐.”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닥치라니, 덕빌. 그동안 이름 좀 알려졌다고 내가 만만해 보여?”

남자는 한 걸음 다가와 히콕의 보안관 배지를 응시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없던 용기가 생겼나, 덕빌?”

“오히려 이게 네 목숨을 붙여준 거야, 맥캔스.”

“맥캔스? 네브래스카 총잡이 맥캔스?”

“그럼 맥캔스 갱단인거네?”

술집 안이 술렁거린다. 반응으로 보면, 맥캔스는 캔자스와 인접한 네브래스카의 유명한 총잡이인 듯했다.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영광이군, 덕빌.”

“한 번만 그런 식으로 더 부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흠.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무섭군, 덕빌.”

“......”

히콕은 총을 뽑지 말라고 했던 자기 말이 족쇄가 되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맥캔스의 도발에 넘어간 히콕은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잠시도 손가락을 그냥 두지 않았다. 본능처럼 홀스터를 향해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막스는 언젠가 버팔로 빌 코디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 히콕 별명이 뭔 줄 알아요, 보스?

- 화살촉? 얌생이 수염?

- ...... 아뇨. 입이 튀어나와서 덕빌에요, 덕빌.

별명을 지어준 사람은 데이비드 맥캔스.

지금 히콕을 도발하고 있는 놈이었다.

- 맥캔스란 새끼가 히콕을 엄청 놀렸어요. 어린 저랑 노니까 만만하게 본 거죠. 근데도 히콕은 꾹 참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순수하고 마음이 여렸거든요.

...... 어찌됐든. 막스보다 한 살 어린 히콕은 코디보다는 아홉 살이 많았다.

물론 성인이라면 나이 차이는 의미 없다. 하지만 당시 열 살 된 코디와 친구를 맺은 히콕은 남들 보기엔 조금은 비정상적으로 보일만도 했다.

맥캔스의 경우 남을 괴롭히는데 타고난 놈이라 히콕을 가만 놔두질 않았다.

‘아직도 그때의 히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맥캔스의 활동 지역이 캔자스 위쪽인 네브래스카라 정보에 뒤처진 것도 한몫했을 테고, 뒤에 있는 갱단도 자신감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그게 뭐가 됐든.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에 발목을 잡힌 이상.

부하가 당하는 모습을 볼 수야 있나.

‘내가 나서야겠군.’

막스는 히콕을 돕기로 결심했다.

“남자끼리 말로 싸우지 말고, 차라리 깔끔하게 결투해.”

“!?”

순간 술집 안의 이목이 막스에게 집중되었다.

심지어 히콕도 황당한 얼굴로 막스를 쳐다봤다.

‘보스가 나를 사지로 모는 거야?’, ‘왜, 자신 없어?’라는 서로의 눈빛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 막스를 신기한 동물 보듯 쳐다본 맥캔스가 입을 뗐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덕빌 친구들은 하나같이 모자란 구석이 있어.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제 분수도 모르고.”

“그러니까 말로 지껄이지 말고, 싸우라고.”

“너.”

막스를 가소롭게 쳐다본 맥캔스가 한 걸음 내디뎠다.

“차라리 네 놈이 나와 결투를 벌이는 건 어때?”

“나?”

막스가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트릴 때, 히콕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마····. 보스의 의도가 이런 거였나.’

결투로 도발한 다음, 자신에게 시비를 걸게 하려는 전략. 히콕은 막스의 수법에 감탄하는 한편, 찐한 감동도 느낄 수 있었다.

당황하고 어이없어하는 막스의 표정 역시 전부 계산된 행동일 터.

‘보스의 마음만 받도록 하지.’

드르르륵.

자리에서 일어난 히콕이 맥캔스에게 다가갔다.

“대충 몸 어디에 구멍 날래, 아니면 이마 정중앙에 구멍 날래.”

“뭔 개소리냐.”

“나랑 싸우는 게 낫다는 소리야, 병신아, 그러고 보니 네 놈이 애블린에 왜 기어왔는지 이제야 알겠군.”

히콕이 한 걸음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조셉 맥코이에게 사업장을 헐값에 넘기라고 협박 편지 보냈던 게, 네 놈이었어.”

“....... 미친 덕빌새끼.”

“그 입에서 다시는 그 말이 안 나오게 해주지. 따라 나와.”

모자를 눌러쓴 히콕이 먼저 스윙도어를 밀고 밖으로 나간다. 눈을 가늘게 뜬 맥캔스는 이내 부하들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이거 엄청난 구경을 하게 생겼구만!”

“어이, 자네. 아주 볼거리를 제대로 만들어 줬어.”

서부 최고의 총잡이 와일드 빌 히콕.

네브래스카에 나름 이름을 떨친 갱단 두목이자 총잡인 데이비드 맥캔스.

둘의 대결에 흥분한 사람들은 판을 깔아준 막스에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텍사스 잭은 의외로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히콕의 명성이 아무리 자자해도 그렇지. 이걸 결투로 몰아간 건 친구가 할 짓이 아니야. 저러다 히콕이 죽으면 네 책임이야.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 거라고. 아,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가? 쳇.”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막스가 텍사스 잭을 힐끔 쳐다봤다.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다.”

“......”

밖으로 나간 막스는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공정한 결투를 위해 동료들의 총은 여기에 두는 거로!”

행여 둘 중 하나가 죽었을 때, 즉각적인 보복을 막기 위한 제안이었다.

당연히 개소리하지 말라며 맥캔스의 부하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막스의 의도대로 공정하고 보복이 없는 결투를 응원하고 있었다.

보란 듯이 막스가 먼저 가지고 있던 리볼버들을 목재가 쌓인 넓은 판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그 수가 꽤 많았다.

“이 새끼, 대체 몇 정을 들고 다니는 거야? 무기상이냐?”

맥캔스의 부하들은 여섯 정의 리볼버를 꺼낸 막스를 기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 숫자가 어찌 됐든.

“그쪽도 총을 내려놔라!”

“신성한 결투에 개입하지 마라!”

사람들의 채근에 맥캔스 부하들은 결국, 리볼버, 샷건, 라이플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이때 텍사스 잭과 일부 캔자스 카우보이들이 끼어들어 막스와 그들의 몸을 수색했다.

널빤지 위에 널린 총들이 수북이 쌓아 두고.

애블린 거리 중심에서 선 히콕과 맥캔스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거리는 대략 70야드(64m).

곧 서부 전역으로 뻗쳐나갈 결투 문화의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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