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잠에서 깨면 뭔가 바뀌어 있을까
“대체 무슨 생각이야?”
“콜록, 콜록.”
“당신 환자 아니지?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그게 왜 궁금한데, 콜록?”
“짜증나네. 이제 그만 솔직해지는 게 어때?”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춘 킹이 으르렁거렸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지만, 내 도움을 바란다면 포기하는 게 좋아. 절대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짧은 침묵 뒤에 막스가 입을 뗐다.
“그러는 넌,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안 그러면 소리친다?”
“마음대로. 참고로 그러는 순간, 넌 지옥을 보게 될거야.”
막스의 사악한 눈빛이 킹을 노려봤다.
할말을 잃은 킹은 침을 삼켰다.
“애초에 내가 의심스러우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벨 풀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말했겠지. 너부터 먼저 솔직해져 봐. 사실은 여길 벗어나고 싶은 거지?”
“.......”
킹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 청나라와 무역했던 아버지의 죽음, 뒤이은 형제들의 죽음. 어머니가 사업을 이어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킹은 시에라 산맥 탐사로 겨울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울증이 다시 도져 정신과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갱단 속에 섞인 것 자체가 킹에겐 견딜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여기에 더 있다간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킹의 눈동자를 바라본 막스가 악마, 아니 천사처럼 속삭였다.
“너 쟤들한테 벗어나고 싶지?”
킹은 대답대신 비웃음을 머금었다.
“꼭 그렇게 해줄 것처럼 말하네.”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잖아. 근데, 이제와서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야?”
“...... 난 벨 풀이 어떤 인물인지 몰랐어. 흑인, 인디언, 북군들을 닥치는 데로 잔인하게 죽였던 자라는걸 몰랐다고.”
“그런데 왜 같이 일한거야?”
지옥과 천국을 판단하려는 천사의 질문인가?
킹은 막스의 질문이 그렇게 느껴졌다.
“돈이 필요했어. 생계 때문은 아니고, 연방에서 지원해주기로 한 시에라 산맥의 탐사 자금이 끊겼거든.”
남북전쟁이 길어지는 바람에 연방은 지출을 줄이기위해 연구 자금부터 중단했다.
“어떻게든 돈이 필요해서, 함께 탐사하던 친구와 투자금을 마련하기로 했지.”
마침 계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갈 일이 생겼다. 킹은 그곳에서 투자를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토마스 벨 풀이 접근해 솔깃한 제안을 했다.
“하긴 살인이나 하던 자가 사업에 대해 뭘 알겠어. 납이 묻힌 광맥을 발견하면 3천 달러를 주기로 했는데, 벨 풀은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했어.”
“원래 사기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당한 놈이 바보인 거고.”
막스가 킹의 마음을 후벼팠다.
그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꼭 탐사는 시에라 산맥에서만 해야해?”
“이래 보여도, 난 학자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탐사하는 게 일이자, 사명이라고.”
“흠. 그렇다 이거지.”
팔짱을 낀 막스가 턱을 매만지며 말을 던졌다.
“너를 여기서 꺼내주면 나한테 뭐 해줄래?”
“해주긴 뭘 해줘. 나가는 즉시 뉴욕에서 탐사 자금을 마련해야지.”
“아, 그랬지 참. 그럼 조건을 바꿔서. 만약 내가 너를 꺼내주고 돈까지 지원해주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미친놈이야?
킹이 그런 눈빛으로 막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대답이 예상밖이었다.
“나도 미지의 땅을 조사하고 싶거든.”
“미지의 땅?”
“시에라 산맥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이지. 아, 물론 그곳 원주민들의 발자국은 있을 수도 있긴 하겠다.”
“......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킹씨! 또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진짜 병에 옮고 싶어서 그래요!?”
술집에서 나온 남자가 킹을 부른다.
인상을 찡그린 킹은 막스와 자신을 부른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막스가 나직이 말을 건넸다.
“어서 들어가 봐. 그리고 오늘 밤. 소란이 일어나거든, 방에서 절대 나오지마.”
“뭐?”
“도망가다간 오히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시발, 몇 번을 말합니까! 풀씨가 찾는 다고!”
남자가 재촉하자 막스를 쳐다보던 킹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그는 남자의 거친 욕설을 속에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끌려갔다.
벨 풀은 테이블에 합석한 킹을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봤다.
“환자 새끼는 뭣 때문에 자꾸 찾아가는 거야?”
“호기심이 생겨서요. 내가 알던 병하고 비슷한 것 같더라고요.”
“지질학자라더니, 의사였구먼. 그래서 무슨 병 같은데?”
“...... 문둥병이요.”
여기저기 탄식과 시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둥병, 즉 나병 환자는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도 언급될 만큼 오래된 병이다.
피부는 저주받은 듯 썩어들어가, 흉측한 몰골 때문에 혼자 살아가다 쓸쓸히 죽는 게 문둥병 환자들의 운명이었다.
“그냥 죽여버리는 게 낫지 않아요?”
“이러다 우리까지 옮으면 다 같이 좆되는 거라고요.”
“그러보니까 그 조카년놈들이 안 보이네? 문둥병 새끼 던져주고 어디로 튄 거 아냐?”
갱단들이 질겁하며 소리치자 킹은 피부만 닿지 않으면 괜찮다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소란은 수그러들었지만, 문둥병 환자가 된 막스는 다른 의미에서 위험인물로 인식되었다.
화제를 전환할겸 벨 풀이 입을 뗐다.
“일단 그건 그렇고. 오늘 투자자들 반응 보니까, 주변 인디언 마을 몇 개만 더 없애면 적극적으로 주머니를 열겠더군. 정리하는 데 며칠 필요해?”
“한 사흘?”
머리가 희끗희끗한 인디언 사냥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장교였다.
“캔자스 남부에 정착한 인디언들은 오클라호마에서 피난 온 난민들이지 전사가 아니야. 잔인하고 흉폭한 인디언들이라면 모를까 그들을 제거하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하지. 풀, 당신은 돈만 준비하면 돼.”
“광산이 가동되면 그깟 돈은 문제도 아니지.”
미국의 광산법은 최초 발견자에게 채굴권을 보장한다. 땅 주인이 아니더라도, 채굴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사는 주택과 농장, 밭을 건드리는 경우엔 반드시 협조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땅 주인에게 무상으로 사는 주제에, 쓸데없이 넓게 퍼져 땅을 차지한 인디언은 광산 사업의 방해꾼들이었다.
“참, 그 소문 들었어? 며칠 전 오클라호마 서쪽에서 들은 건데, 콜로라도에서 무장한 자들이 오클라호마로 넘어왔다더군.”
“콜로라도?”
인디언 사냥꾼의 말에 몇몇 사람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벨 풀은 땅 주인이 하필 콜로라도 사업가라 뜨끔했고, 제임스-영거 갱단은 특수부대의 전신인 SFBC를 떠올렸다.
제시 제임스가 물었다.
“혹시 그 새끼들 SFBC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장한 놈들 열 댓이 이동하다 마주친 갱단 하나를 박살냈다는데, 콜로라도에서 그럴 놈들이 누가 있겠어? 망할 동양인 밑에서 빌어먹는 놈들이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날뛰고 있는 거지.”
벨 풀과 제시 제임스의 눈이 마주쳤다.
며칠 전 죽은 인디언 사냥꾼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따져봤다.
SFBC가 콜로라도 인디언과 우호적인 관계라는 건 이미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게다가 리노 갱단을 잡을 때 SFBC가 개입했다는 것도 제시 제임스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래저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요.”
“여기 모인 인원이면 대대급 병력이 와도 끄떡없겠구먼, 뭘.”
인디언 사냥꾼이 웃으며 말했다.
술집에 모인 50명의 무장한 사내들도 전투 경험도 풍부한 게릴라들이다. SFBC 전원이 달려들지 않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누군가 카드를 꺼내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여자도 없고, 음악도 없는데 긴긴밤을 뭐로 보내겠습니까. 경계는 교대로 서고, 나머지는 카드 게임이나 합시다. 그래야 시간도 잘 가지.”
“술은 적당히 마셔. 총 쏠 때 아군도 몰라보면 되겠어?”
술집에 웃음이 퍼지고, 분위기를 살핀 킹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과음해서 일찍 자야겠습니다.”
“어이구, 잘 생각했어. 킹씨도 하루 정도는 쉬어야지.”
“어제처럼 굴면, 오늘은 총을 쏘려고 했는데 눈치 빠르네, 우리 킹씨.”
킹의 주사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키득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이층 계단을 오르던 킹이 위에서 술집을 내려다봤다.
일부는 무기를 챙겨 밖으로 나가고, 남은 자들은 카드 게임과 술을 테이블에 늘어놨다.
‘잠에서 깨면 뭔가 바뀌어 있을까.’
제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며.
킹은 방으로 들어갔다.
*
시간은 밤 9시.
마을을 순찰하는 갱단을 차갑게 응시한 막스가 천천히 수레에서 내려왔다.
오그라든 손에는 보위 나이프를 쥔 채, 절뚝거리는 발을 끌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는 순찰자들에게 위기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큰 대로를 걸으며 주변을 대충 훑어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두 명의 순찰자가 허름하게 지어진 교회를 지나칠 때였다.
“저거 뭐지?”
교회 안에서 작은 불빛이 일렁였다.
“누가 기도하나?”
“우리 중에 그럴 놈이 누가 있냐? 일단 가보자.”
리볼버를 꺼내 든 순찰자들이 아치형의 교회 문으로 진입했다.
내부엔 낡고 부서진 신도석이 폐기물들과 뒤섞여 있었고, 전면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나무 상자 두 개를 겹쳐 만든 단상 위엔 작은 기름 등잔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순찰자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등잔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뒷 벽에 붙어있던 그림자에서 뭔가가 떨어져 나왔다. 잔뜩 웅크린 그림자 덩어리가 길쭉하게 늘어났을 때. 날카로운 칼끝은 한 사람의 목을 긋고, 이내 옆에 있던 남자의 목을 꿰뚫었다.
털썩.
막스는 시체를 끌어다 어두운 그림자에 감추고, 자신 또한 그 안에 숨어들었다.
잠시 후. 또다시 불빛을 발견한 순찰자가 교회 안에 들어서고 이들 역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그렇게 일곱을 제거한 막스는 교회 첨탑으로 올라 주변을 둘러봤다.
술집만 빼면 마을은 고요하고 적막하며 근근한 달빛을 받아 건물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막스는 품속에 망원경을 꺼냈다.
약속된 포인트로 시선을 옮긴 때, 지평선 위로 모하비 사막에서나 볼 법한 선인장 같은 그림자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림자들이 갈라지듯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점차 늘어난 그림자는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거리는 대략 2km.
교회 첨탑에서 내려온 막스는 숨겨둔 기름을 건물에 뿌렸다. 언젠가 콜린에게서 받은 싸구려 시가를 잎에 물고는 한손 엄지를 벨트에 끼웠다.
다른 한 손으로는 딱성냥을 벽에 긋고,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교회에서 등을 돌리며 성냥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화르르르.
교회에 불이 붙고, 막스는 도로가 아닌 건물들 틈으로 이동해 마구간 뒤쪽으로 옮겨 둔 수레로 돌아갔다.
잠시 후.
술집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오고, 동시에 사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곧이어.
탕! 탕!
인디언들의 포효, SFBC 대원들의 총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며 갱단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막스는 수레 위에 고정한 판자를 뜯어내 윈체스터 라이플 쥐고, 각종 보조 무기가 든 가방을 챙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