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 이름이 너무 길다
"자네가 이씨 성이었다는 걸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조선에 한 번 가보세요. 돌 던져서 맞으면 십중팔구 김, 이, 박 중 하납니다. 전부 왕가 혈통이죠."
하지만 이막산은 확실히 아니다.
안타깝게도 왕가 혈통은커녕, 조부모까지 최소 3대까지는 몰락한 양반이 아닌 천민이었다.
게다가 막스는 흥선대원군에게 자신을 노비라 밝힌 바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왕가의 혈통이라.'
일반 백성들이 그런 소문을 낼 리는 없고, 양반들이 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위정척사를 외치는 양반들은 되려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막스를 증오한다. 굳이 막스를 높여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났다면 의심 가는 인물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나를 이용해서 뭘 얻으려는 걸까.'
막스는 조선의 상황을 따져봤다.
일단 최근 조선에서 벌어진 가장 큰 사건은 왕비 간택.
흥성대원군은 여흥 민씨 민자영을 배제했다.
뒤틀린 조선의 역사에선 민비가 사라지고 안동 김씨 김우근의 여식이 왕비가 되었다.
여우를 피해 호랑이를 택한 격인데, 막스는 흥선대원군의 선택을 긍정적으로 봤다.
아들을 왕으로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안동 김씨는 지금 이대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 되고, 간택되지 않은 풍양 조씨와 여흥 민씨의 반발은 기껏해야 찻잔 속의 태풍.
안동 김씨와 손잡은 흥선대원군에게 감히 적개심을 드러내진 않을 것이다.
'왕비 간택에는 문제가 없어.'
그런데 굳이 막스를 왕가 혈통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그만큼 위기에 처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흥선대원군을 위협하는 세력은 세족이 아닌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역시 양반들이겠군.'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백성들에겐 호응을 얻었지만, 양반을 적으로 돌렸다.
서원 철폐와 양반들에게 세금을 걷는 호포제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천주교는 유교 사회를 파고들어 가치관을 뒤흔들고, 서양으로부터 강제 개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사절단과 도착한 서양인들이 조선 팔도에 땅을 파면서 자원을 탐사하는 걸 눈엣가시로 여겼을 터였다.
막스를 풍양 조씨가 아닌 전주 이씨로 둔갑시킨 것도 그렇고. 흥선대원군은 미국의 힘을 얻기 위해 막스를 조선의 왕가 혈통으로 만드는 전략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이같은 결정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내가 다른 마음을 품으면 위험할 텐데.'
미국을 등에 업고 왕위를 빼앗으면 무슨 수로 막으려고 무리수를 두었을까.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막스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그 모습을 살펴보던 링컨의 가는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왕가의 혈통은 진짜 아닌가 보군."
"그랬다면, 조선을 강제 개항할 게 아니라 나라를 빼앗아야죠."
"자네 야망이 그 정도였나?"
"왕의 혈통이면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뭐, 자네 능력이라면 불가능은 아니겠지."
링컨은 순수한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 날아온 보고서를 훑어본바, 조선이란 나라는 캔자스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왕가와는 상관도 없는데 왜 그런 소문이 난 거지?"
막스는 자신이 추측한 바를 이야기했다.
위기에 빠진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막스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야기를 듣던 링컨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조선이나 미국이나. 정치는 복잡하기 짝이 없군."
"확실한 건 가봐야 알겠죠."
"직접 갈 생각인가?"
"내년이 대선 아닙니까."
"또 빠져주려고?"
링컨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다가올 21대 대통령 선거는 남부 재건법에 따라 아프리카계 미국인, 즉 흑인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 최초의 선거다.
원 역사에선 율리시스 그랜트가 나와야 할 선거지만, 존 브라운이 끼어들어 차례가 밀리게 된 셈이었다.
정치 지형으로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은 공화당 내에서도 인기가 많지 않았다. 홈스테드법, 인디언 영토 축소 및 이전과 같은 법안을 번번히 가로막혀 내부에서도 반발이 극심하다.
민주당의 경우 정권을 되찾기 위해 링컨과 공화당에 흠집을 내려 혈안이 되어 있다.
민주당은 현 정부의 알래스카 매입, 남부 재건 중에 생겨난 각종 문제점 등을 공격하며 반대 세력을 규합할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 대선을 어떻게 보나?"
"민주당은 흑백 대결로 몰고 가려고 하겠죠. 여기에 휘둘리면 끝입니다."
민주당은 흑인에게 투표권을 준 링컨을 '검둥이' 후보로, 자신들은 '백인' 후보로 프레임을 짤 것이다.
여기서 링컨이 택해야 할 전략은 남북 전쟁의 가치를 이어가는 것. 미국 독립 선언문의 첫 구절, 천부인권설을 주구장창 외치면 될 일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무난히 재선에 성공할 거라 보고 있습니다. 다만 상대에게 공격당할 빌미는 주지 말아야죠."
이를테면, 남부를 휘젓고 다녔던 연방 보안관의 활동을 줄여야 한다. 필요하면 대폭 인원 교체가 불가피했다.
"사실 민주당에서 그 일로 단단히 벼르고 있긴 하네. 남부를 도륙한 특수부대원들이 연방 보안관이 되어 또다시 남부를 도륙한다고 말일세."
"도륙이라. 자극적인 단어 선택이 선동에 걸맞는 군요."
막스는 예상했던 일이라 담담했다.
자고로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잘 알아야 길게 가는 법이니까.
“올해를 끝으로 SFBC 대원은 연방 보안관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혹시 일본으로 데려갈 생각인가?”
“SFBC 태생 자체가 민간군사기업입니다. 막부가 의뢰했으면 받아들여야죠.”
히콕의 일본 활동은 맛보기였을뿐, 막스는 이번 해외 원정을 시작으로 SFBC 활동 범위를 넓혀갈 생각이다. 더간과 제인 외에 새로운 피를 채우는 것도 그 일환이었고.
“전부 연방 보안관을 그만둔다 이거군.”
"그게 깔끔하죠. 대신 선거가 끝나면 일부는 연방 보안관으로 복직시켜 주십시오."
"오히려 내가 부탁할 생각이었네. 복직은 물론이거니와, 재선에 성공한다면 자네가 일전에 말했던 새로운 연방 수사 조직도 만들 생각이네."
링컨에게 막스란 가장 든든한 정치적 동지이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인물이다.
대통령이 된 링컨은 비로소 존 브라운과 막스의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링컨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갈 때, 막스가 물었다.
“참, 일본에 납품할 무기는 어떻습니까?”
“알다시피 남부연합에서 회수한 무기들이 넘쳐나네. 게다가 연방 군인들의 무기가 새롭게 바뀌는 추세라, 오래된 것들은 전부 처분했으면 싶네. 전쟁장관이 대포와 기병 라이플 중 거래 목록을 전해줄 걸세.”
“거래 금액은 제 임의로 정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받아오게.”
막스는 또다시 무기상이 되어 무기를 일본에 내다팔게 되었다.
정부 입장에선 창고에 자리만 차지하는 무기를 팔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자네 계획대로면 막부와 일왕의 싸움이 치열할 것 같은데.”
'그게 내가 바라는 거지. 일본이란 족속은 힘이 생기면 망상에 사로잡히거든.'
조선을 시작으로, 중국, 러시아까지 집어삼켜 아시아의 중심이 되려는 망상.
막스는 목구멍까지 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
"전쟁이 치열해지면 무기는 더 많이 필요하겠죠. 막부는 더 많은 빚을 지게 되는 거고, 행여 막부가 지더라도 그 빚은 일본 왕실이 갚게 될 겁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일본에 미국 함선 열 척을 끌고가면 된다.
자국 기업이 돈을 못 받으면 미일 통상 조약에 근거하여 국가가 개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반대로 왕실이 밀리면 막부는 영국에게 빚을 갚아야 할 처지가 되겠죠. 이래저래 일본은 회생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 소름끼치는 전략이군."
"영국이 조슈번에 무기를 공급하던 때부터 계획했던 겁니다."
막스는 당시에도 링컨에게 말했었다.
일본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겠다고.
“막부가 자네에게 손을 내민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군. 미국에 있으면서 태평양 너머의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네.”
링컨은 고개를 절레 저으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모든 계획에는 변수가 생기게 마련이다.
곧은 길로 가면 좋겠지만, 더러는 진흙탕에 빠질 수도 있었다.
막스가 신경 쓰는 건 영국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는 자딘 메시선. 그들과 이리저리 엮인 게 많다 보니, 놈들의 타겟이 일본인지 막스인지 분명치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
백악관 집무실을 나선 막스는 프리덤 에코 워싱턴 지부를 찾아갔다.
"이 물건을 의회에 납품할 생각인데."
막스는 콜로라도에서 가져온 묵직한 기계를 책상에 올려 두었다.
에디슨이 만든 자동 투표 장치였다.
용도를 설명하자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막스와 같은 이유로 판매 가능성을 낮게 봤다.
"의회에서 굳이 그 기계를 사려고 할까요?"
"일단 의회 의장한테 컨택해봐. 안 팔리면 그만이니까, 부담 없이 해."
"아, 알겠습니다."
막스는 진심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직원들이야 어디 그런가. ‘부담 없이 하라’는 말도 가슴을 턱턱 막히게 했다.
막스는 에디슨이 만든 쓸모없는 장치를 프리덤 에코 직원들에게 던져주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
뉴욕 맨해튼의 프리덤 에코.
막스의 깜짝 방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편집장 모리스 디캠은 새로운 직원들을 소개하고 데이비드 러셀은 그동안 뉴욕에 있던 일을 짧게 브리핑했다.
“최근 듀폰과 화이자, 웨스턴 유니온의 지분을 0.5% 내외로 추가 확보했습니다. 그 외에 철도, 철강, 석유 회사도 꾸준히 늘리고 있습니다. 리스트는 내일까지 작성해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막스의 초기 사업부터 함께 해온 러셀은 윌슨 섀넌과 막스의 특허를 관리하고, 인수합병 할 회사를 사들이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하는 일이 워낙 많아 최근 몇 년 동안은 사업부를 확장하면서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특허는? 내가 말한 전선 기술 쪽 말야.”
“아, 며칠 전에 말한 거라면 있습니다.”
러셀이 손가락을 튕기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책상에서 꺼낸 서류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전자기 음성 전송(electromagnetic voice transmission)에 관한 특허인데요, 아마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면은 특허청에서 보관하고 있어 빼내기가 힘들고, 간단한 개념과 원리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막스는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안토니오 산티 주세페 무치.
그레이엄 벨에게 특허를 빼앗긴 자의 이름이 맞는다면 한 번쯤은 기억이 날 법도 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름이 너무 길다.’
막스는 이름을 지나 날짜에 주목했다.
특이하게도 특허는 일 년 단위로 지불하는 갱신형이었다.
막스의 시선이 고정된 부분을 정확히 캐치한 러셀이 설명을 이어갔다.
“보통 이런 경우엔 일시불로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택하는 방법이죠. 아마 이런 갱신형 특허들이 더 많을 겁니다.”
대게 발명품을 특허로 등록하려면 돈이 들어가는데, 특허법상 미국 시민 혹은 거주민들은 30달러, 영국인은 500달러, 기타 외국인은 300달러의 비용을 내야 특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돈이 없는 발명가는 특허를 내기 위해 투자자를 찾고, 되려 그들에게 도용당하기도 했다.
특허권 분쟁 소송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름 보니까 이탈리아 쪽 같은데, 어때?”
“주세페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쓰죠. 보스의 생각이 맞을 겁니다.”
“소재지는?”
러셀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이 사람 행방을 추적해 봐.”
“알겠습니다.”
“비슷한 특허가 있으면 또 알려주고.”
“옛 썰!”
러셀이 나가고 편집장 디캠이 커피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뉴욕엔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마크 트웨인이 나를 초대했거든. 그런데 정작 보이질 않네?”
“자유로운 영혼은 한 곳에 얽매이는 법이 없죠. 아마 이틀 후에나 올 겁니다.”
마크 트웨인은 뉴욕 붙박이가 아닌 프리덤 에코의 특파원이다. 기삿거리를 찾아 미 전역은 물론, 얼마 전엔 유럽까지 다녀온 탓에 마크 트웨인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
모리스 디캠의 말대로 마크가 막스를 찾아온 건 이틀 뒤. 정확히 찰스 디킨스의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호텔 로비로 찾아온 마크 트웨인은 막스를 발견하곤 환한 미소로 포옹했다.
“마이 프렌드! 생각보다 일찍 왔구만!”
“초대를 해놓고 사람을 기다리게 하다니.”
“설마하니 자네가 이렇게 빨리 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세상에서 가장 바쁘 사람이잖아.”
“바쁘긴. 아무튼 얼굴이 더 좋아진 걸 보니 잘 지낸 모양이네.”
“나야 자네 덕분에 호사를 누리고 있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월급은 물론 미 전역을 여행하는데 드는 경비를 프리덤 에코에서 지급하는 덕에 마크 트웨인은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의 독서 강연(Public reading)은 어디서 하는 거야?”
“브로드웨이 스테인웨이 홀에서 열려. 좀 빨리 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야.”
“기다리는 거 딱 질색인데.”
“무려 찰스 디킨스야. 그 양반 나이를 생각하면 생에 마지막 강연일 수도 있다고.”
마크 트웨인은 사람을 만나는 걸 즐긴다.
시인, 문학가, 역사가, 음악가, 발명가, 사회 운동가 등. 특파원을 하면서 마크 트웨인이 만난 인물 중 유명한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리고 오늘도 마크 트웨인은 새로운 만남을 이끌었다.
스테인웨이 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였다. 입구에서 거대한 물건을 나르던 남자에게 누군가 지시를 내렸다.
“어이, 무치씨! 가스 조명 시스템이 작동 안 한대. 얼른 손 볼 수 있도록 해.”
“Devi dirmi da che parte stai(어느 쪽인지 말을 해줘야죠).”
“시발,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먹으면 어떻게 해. 미국에 온 지가 언젠데!”
"나, 알아 들었고. 어느 쪽인지 말 하라고."
무치라는 남자는 리스닝은 되는 데 스피킹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짧은 문장도 힘겹게 내 뱉었다.
막스가 빠르게 마크 트웨인에게 물었다.
“방금 저사람이 한 거 이탈리아어였지?”
“아마도? 왜?”
“나 잠깐 좀 갔다 올게.”
막스는 무치라는 남자를 뒤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