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딱 사기꾼이네요
"안토니오 무치씨."
스테인웨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힐끔 뒤를 돌아본다.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남자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누구시오?”
“당신이 만든 발명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자기 음성 전송 특허를 갖고 있죠?”
“그렇소만.”
무치의 눈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내 특허를 어찌 알았소?”
“공연이 끝나면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당신에게 투자하고 싶습니다.”
“투자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저쪽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막스는 극장 반대편에 있는 작은 바를 가리켰다.
잠시 고민하던 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이야?”
막스가 대기줄에 합류하자 마크 트웨인이 물었다.
"내가 찾던 사람이거든."
"호오. 갑자기 흥미가 생기는군. 위대한 분께서 평범한 사람에게 관심 가질 리도 없고."
“나중에 알려줄게."
입맛을 다신 마크 트웨인은 찰스 디킨스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영국의 위대한 문호를 현재뿐 아니라 과거에 관해서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24년 전, 뉴욕을 방문했던 찰스 디킨스가 영국으로 돌아가서 ‘아메리칸 노트’라는 에세이를 썼는데. 뉴욕을 돼지우리 같다며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지. 뭐, 사실 런던도 그다지 깨끗하진 않지만, 뉴욕이 심하긴 했지. 그땐 도로에 있는 쓰레기를 어떻게 치웠는지 알아?”
20년 전만 해도 말과 마차들이 지나다니는 맨해튼 도로엔 똥들과 오물로 가득했다.
뉴욕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300마리의 돼지를 사육자들과 함께 거리를 청소하게 했다.
이를 본 찰스 디킨스는 뉴욕방문 에세이에 온갖 비판을 퍼부은 것이다.
심지어 그는 미국 언론사에도 적대적이었다.
“상상력, 악의적인 모든 발명품과 스캔들, 부패들이 모인 시궁창이라는 표현을 썼지. 난 이번에도 찰스 디킨스가 뉴욕에 관해 똑같은 생각일지 굉장히 궁금해. 뉴욕도 꽤 변했잖아?”
“글쎄. 얼마나 변했는지 감이 안 오네. 그나저나, 소설을 집필한다더니 잘되어가?”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좋은 소재가 있으면 말해 줘.”
막스는 당연히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 엄청난 소재 있잖아."
마크 트웨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막스 자네가 특별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근데 특별해도 너어무 특별해.”
“주인공으로 딱이네.”
“전혀. 내가 바라는 건 누구나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주인공이야. 설령 나이가 어린 주인공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라야 하지. 그래야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을 수 있거든. 여자라면 한 번쯤 남자가 되어보는 경험도 할 수 있고. 근데 자넨 너무 비현실적이야.”
“원래 소설이 그런 거 아닌가.”
마크는 모르는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소설이 허구라 해도 손에 닿는 현실이야말로 최고의 감동을 끌어낼 수 있지. 아, 물론 현실 자체도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내 책을 읽는 독자는 주로 백인과 흑인이야. 동양인 독자는 거의 없다···.”
말을 멈춘 마크 트웨인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호흡이 빨라지고, 눈동자에 일렁이는 동요는 설렘이었다.
막스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피부가 새하얀 미모의 여인이 문에 들어왔다.
옆에는 한 남자가 서 있는데, 마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찰스 랭던과 여동생, 올리비아야."
"찰스 랭던이 누군데?"
"내가 퀘이커 시티호를 타고 지중해를 여행했을 때 배에서 친구가 된 남자지. 그때 여동생 사진을 내게 보여줬는데··· 맙소사!"
"왜?"
"사진은 올리비아의 절반도 담아내지 못했어. 작은 얼굴에 완벽하게 자리 잡은 눈과 코, 입. 기품있는 자태를 보라고! 막스, 자네도 그랬어?"
"뭘"
"자네 부인을 만났을 때 말야."
'흠. 첫인상이라.'
- 땅이 없으면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야. 특히 서부에선.
솔직히 뜬금없이 그 말을 했을 땐 미친년인 줄 알았다. 피치의 미모가 눈부시다는 것도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알게 되었고.
피치와의 만남을 회상하던 막스는 그때의 추억을 포장하며 입을 열었다.
"...... 나도 그랬어. 첫눈에 사랑에 빠졌거든."
"역시 지금 가슴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건 바로 사랑이었군."
오그라드는 손을 펴며 막스는 마크 트웨인의 행동을 지켜봤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마크는 용기를 내어 올리비아라는 여인에게 성큼 다가갔다.
'독서 강연은 그냥 핑계였구만.'
막스는 마크 트웨인을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표정을 세심히 살펴봤다.
부유하고 교육을 잘 받은 여인은 12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거친 서부에서 자란 마크, 아니 새뮤엘 클레멘스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입꼬리는 예의상 올라가 있을 뿐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오빠가 아니었다면, 말을 섞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분 뒤, 돌아온 마크 트웨인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하길.
“자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네. 순간적이지만, 자네 이름을 빌러 올리비아에게 환심을 사려 했거든.”
“호오. 내가 그 정도야?”
“올리비아는 노예제 폐지론자이자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자야. 만약 북군 총사령관인 자넬 소개해주면, 나를 달리 볼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반응이 없었어?”
“말 안 했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거든.”
‘그래서 결국 대차게 까이긴 했지만.’
마크 트웨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첫 만남에 아름다운 여인이 반할 만큼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다는걸 말야.”
“그래서 포기하려고?”
“네버! 말 그대로 첫 만남이었어. 끊임없이 내 진심을 알리다 보면, 닫힌 그녀도 마음의 문을 열 거라고.”
그렇게 마크 트웨인은 올리비아의 마음을 얻기까지 180통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어찌 됐든, 우울했던 마크 트웨인의 얼굴은 다시금 긍정의 에너지로 넘쳤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구만.’
막스는 다채롭고 시시각각 변하는 마크 트웨인의 표정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날 저녁 8시, 막스는 스테인웨이 홀에서 찰스 디킨스의 독서 강연을 관람했다.
마크 트웨인은 이날의 감상 리뷰를 프리덤 에코에 실었다.
[키가 크고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노신사가 박수를 기다리지 않고 무대에 등장했다.
셔츠 왼쪽 가슴엔 선홍색 꽃을 꽂고 회색 수염과 콧수염, 턱수염은 강풍 앞에 쓸려진 것처럼 모든 걸 빗어넘겼다. 바로 찰스 디킨스였다!
영국의 노신사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모든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지 않으며 무대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짙은 황갈색의 무대 배경과 가스 조명 시스템, 특별히 설계된 책상에 앉은 찰스 디킨스는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읽는 것이 서툴렀다.
발음은 날카롭지 않고, 음절을 깨끗이 자르지 않아 음절들이 이어지기 전에 죽어 버렸다.
사실 찰스 디킨스의 독서에 크게 실망했다.
다른 비평가들은 열광했을지 모르나, 디킨스는 자신의 소설에 담긴 풍부한 유머와 감동, 황홀함은커녕 단조롭고 건조한 목소리로 두 시간을 채웠다.]
올리비아에게 거절당한 여파일까.
마크 트웨인은 찰스 디킨스의 독서 토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이 하나둘 홀을 떠나갔다.
인부들은 쓰레기를 치우고, 자리를 정돈했다.
무대 조명과 각종 장비들을 정리하던 안토니오 무치는 마음이 초조했다.
‘갔으면 어떡하지?’
자신의 발명품에 관심을 보인 남자.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투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도 무치는 일을 서둘러서 끝내야 했다.
막스가 안토니오 무치를 만난 건 공연이 끝나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헐레벌떡 달려온 무치는 펍 구석에 앉아있는 막스를 발견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합니다. 무대를 정리하느라 늦었네요."
무치는 어설픈 영어로 미안함을 표현했다.
무대 기술자에게 가장 바쁜 시간은 공연 전과 후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한 건 명백히 막스의 실수였다.
"제가 오히려 미안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도 그렇고. 사정도 모르고 약속을 정했군요."
막스는 스카프를 벗으며 악수를 청했다.
얼굴을 확인한 무치의 눈이 커졌다.
"도, 동양인?"
"막스 조라고 합니다."
"...... 혹시 북군 총사령관이었던 그 막스 조가 맞습니까?"
막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치의 눈이 더욱 커졌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맥주 두 잔이 올려졌다.
주변에 있던 자들이 수군대며 막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파이브 포인츠를 단숨에 정리한 뉴욕의 전설.
막스 조의 등장은 바에 있던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발명품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만."
'목소리의 전기적 전송'은 이미 프랑스와 독일 과학자들에 의해 이론은 정립된 상태로. 무대 기술자인 무치는 그들의 이론을 발전시켜 전화기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흥미로웠다.
"몸이 아픈 아내와 쉽게 소통하기 위해서 집 안에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아내가 있는 2층 침실과 지하 실험실을 연결했죠."
무치의 어눌한 영어를 이해하기 위해 막스는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틀린 문장과 단어가 수두룩한데, 급기야 무치는 자신의 과거까지 말하기 시작했다.
"17년 전, 쿠바에서 모은 돈으로 미국 스태튼 아일랜드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국의 망명자 동지들을 고용해 양초 공장을 운영했죠."
서로마 제국 붕괴 후, 1300년간이나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던 이탈리아는 나폴레옹에 의해 남부와 북부로 분리되게 된다.
이에 저항해 이탈리아반도 전역에 혁명이 일어나고 영국까지 개입하면서, 불과 6년 전인 1861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는 통일 왕국을 이뤄낼 수 있었다.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은 이 통일을 완성한 주역으로, 한때 그와 혁명 동지들은 유럽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안토니오 무치는 자신의 양초 공장에 그들을 고용하여 생계를 지원했다.
"그런데 사업이 쫄딱 망했습니다. 빚을 지고 결국 맨해튼에서 다시 무대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죠. 특허를 취득할 돈도 없었어요."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었습니까?"
"그동안 단점을 보완한 기계를 계속 만들고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투자받을 생각이었습니다."
안토니오 무치가 찾아가려던 곳은 미국 전신을 독점한 웨스턴 유니온.
원 역사에서 웨스턴 유니온은 전화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안을 거절. 이 결정으로 거대한 공룡기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막스는 빙그레 웃으며 기다리는 동안 작성한 제안서를 내밀었다.
"조건이 마음에 들면 저와 일하시죠."
서류를 훑어가는 무치의 눈동자가 몇 번이나 요동쳤다.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콜로라도에 실험실과 가족들이 머물 주택을 제공하고, 급여는 월 200달러에 특허 취득은 안토니오 무치의 이름으로 등록된다.
또한 전화 관련 회사를 설립하여 사업을 진행하고, 특허 만료가 될 때까지 10%의 로열티를 지불한다.]
안토니오 무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지만, 중요한 건 이를 실행할 능력이 있는가였다.
무치의 미심쩍은 표정을 캐치한 막스가 미소를 지었다.
"돈에 관한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콜로라도 금광 말고도 여러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으니까."
"그, 금광이요?"
"가보면 알겠지만, 콜로라도에 과학자들이 모여 있는 연구실이 있습니다. 다들 재정적인 문제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있죠."
잠시 머뭇거리던 안토니오 무치가 물었다.
"...... 혹시 병원도 있습니까?"
"부인 때문에 그렇습니까?"
"몸이 좋지 않습니다. 뉴욕에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병원 시설과 의사 때문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존 브라운 전 대통령도 있거든요."
“콜로라도에요?!”
그 정도 인물이 있는 병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안토니오 무치는 당장에라도 계약서에 사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급작스럽고 파격적인 조건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계약서는 천천히 살펴보고, 결심이 굳어지거든 여기로 찾아오시면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무치는 아내에게 막스와 나눈 대화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딱 사기꾼이네요.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겠어요? 양초 사업도 그런 사기꾼한테 걸려서 망한 거잖아요.”
“...... 설마 북군 총사령관이었던 사람이 나한테 사기를 칠까?”
“당신은 그 사람의 신분을 어찌 확신하나요? 동양인은 파이브포인츠 뒷골목에도 많다구요.”
따지고보니 부인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다음날 안토니오 무치는 고민 끝에 막스가 머무는 호텔을 찾아가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곳 로비에서 막스를 발견한 무치는 그의 신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막스와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물들이었다.
‘밴더빌트, 제이 굴드, 뉴욕시장까지!’
안토니오 무치는 로비 구석에서 미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손에는 잉크가 마르지 않은 계약서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