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8화 (348/360)

#348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겁니까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가장 먼저 몸을 내뺀 인력거꾼들의 눈이 커진다. 입은 쩍 벌린 채 사건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습격한 낭인들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빨리 쓰러졌다. 칼은 왜 뽑은 건지 쥐고만 있고, 몸엔 두서너 개의 총탄이 박혀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털썩.

새로운 리볼버를 꺼내든 막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움직이는 놈들은 모조리 사살한다.”

침을 꿀꺽 삼킨 조셉 헤코가 일본어로 소리치자 현장은 쥐 죽은 듯 침묵에 휩싸였다.

분위기에 눌린 막부 군인들도 눈알만 굴려 시체들을 응시했다. 스멀스멀 몸에서 나온 낭인들의 피가 바닥을 적시며 번져갔다.

'고작 다섯이서···.'

순식간에 스무 명의 낭인을 해치웠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미국에서 밥만 먹고 총만 쐈나.'

놀랍도록 빠르고 정확하다. 소름 돋는 건 아무도 흥분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다는 거.

심지어 막스는 태연하게 인력거에 올라가 앉기까지 했다.

“에도성으로.”

“......”

인력거꾼들은 흠칫하며 헤코를 쳐다봤다. 움직여도 되는지, 눈빛으로 물어왔다.

잠시 후.

"이, 이쿠죠!"

막스 일행을 태운 인력거꾼들이 다시금 손잡이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

막부의 심장 에도성.

본성 혼마루의 어전에선 하루가 멀다고 회의가 열렸다.

상전에 앉은 남자는 도쿠가와의 당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에모치의 뒤를 이어 제15대 정이대장군이 된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말했다.

“미국이 우리 요청에 응답하긴 했는데, 고작 한 척의 배를 가져왔습니다. 번주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함선도 아닌 상선이라 들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생색내기에 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온 조선인은 총사령관에서 진작에 밀려난 자. 미국에서 막부를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해군 제독을 보냈어야 마땅하겠지요.”

아이즈번과 더불어 막부를 지탱하는 미토번.

도호쿠 지방의 센다이 번주가 차례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다른 번주들 역시 미국이 단 한 척의 배, 그것도 상선을 보낸 것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아이즈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생각이 달랐다.

“영국도 직접적인 병력 지원은 피하고, 반란군들에게 무기만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라고 다를 건 없지요.”

“아이즈 번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배에는 무기가 실려 있어야겠구려.”

“필히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예상이라···.”

미간을 찡그린 쇼군 요시노부가 물었다.

“총사령관에서 쫓겨난 조선인은 결국 무기상에 불과한데, 번주께선 그자의 역할을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건 직접 만나봐야 알 것 같습니다.”

“만약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면 그건 또 어떻게 대응할 생각입니까?”

“그것 또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요.”

“내가 원하는 건 정해진 결과를 듣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면 내가 그자와 대면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쇼군의 눈빛이 사납게 쏘아보지만 아이즈 번주는 담담하기만 하다.

현재 막부의 군사력은 아이즈와 구와나 번에 의존하고 있다. 아이즈 번주가 쇼군에게 밀릴 상황은 아니었다.

회의장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을 즈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쇼군께 아뢰옵니다! 미국인들이 오는 도중 도막파 낭인들에게 습격당했습니다!”

“뭐라!”

아이즈 번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쇼군은 인상을 찡그린 채 소리쳤다.

“자세히 보고하라!”

“대로에서 낭인 스무 명이 다짜고짜 미국인들을 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낭인 전원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 미국인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호위병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했구나.”

입술을 오물거리던 신하가 뜸을 들이곤 대답을 이어갔다.

“낭인들을 해치운 건 미국인들입니다. 다섯이서 순식간에 총을 쏴 낭인들을 몰살시켰다 합니다.”

“다섯이 스물을?”

쇼군의 눈이 커지고, 번주들의 입에선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도막파 낭인들의 죽음 따위야 아쉽지 않지만, 그들 또한 일본의 사무라이들. 습격하고도 몰살당했다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칼이 총을 이길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사건이었다.

반면 미국인들이 무사하다는 말에 안심한 아이즈 번주는 자리에 정좌하며 물었다.

“미국인들은 어디까지 왔지?”

“지금쯤 본성에 도착했을 겁니다.”

“귀한 손님이다. 도착하는 대로 오히로마에 모시거라.”

“알겠습니다.”

신하가 나가자 쇼군은 굳은 얼굴로 번주들을 응시했다.

“무사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일본 땅에서 벌어진 일. 그대들은 성난 미국인들을 달래고 협상에 만전을 기하십시오.”

‘자신은 끝까지 뒷짐 지고 있겠다는 말이군.’

아이즈 번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쇼군은 전쟁에 소극적이다. 머릿속은 자신이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라는 걸 인식하고 위기를 타개할 궁리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그 궁리 속에 주변은 존재하지 않지.’

쇼군은 자신의 안위만 걱정할 뿐, 막부를 지탱하는 번주들을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쇼군에게 허리를 숙인 아이즈 번주는 다른 번주들을 이끌고 외교 사신들을 접대하는 오히로마 전각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다들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대원들은 접객실에 남고, 막스는 조셉 헤코와 함께 안내자를 따라갔다.

헤코는 가는 도중 안내자에게 정보를 얻었다.

“회의장에 무기 구매 관련 각료들과 번주들이 모여 있답니다. 아이즈 번주를 중심으로 미토 번주와 오우에쓰 열번 번주들이 함께 있다고 하네요.”

"오우에쓰 열번?"

"일본 북부 도호쿠 지방의 번 연합체죠."

일본 혼슈 동북부에 있는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아키타현, 야마가타현, 후쿠시마현이 도호쿠 지방이다.

원 역사에서 오우에쓰 열번은 끝까지 막부 편을 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원자력 시설은 이곳에 집중되어 건설된다.

음모설이지만 꽤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쇼군은 참석을 안 한 모양이네.”

“협상을 끝낸 뒤에야 나오지 않을까요.”

오히로마는 거대한 방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번주들과 각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즈 번주는 몇 년 전 봤을 때보다 더 말라 있었다.

“오자마자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내전 중에 겪은 일입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막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미토 번주가 대뜸 물어왔다.

“총사령관에서 경질되었다고 들었는데. 귀하의 정확한 직분이 어떻게 됩니까?”

조셉 헤코는 통역하지 않고 직접 답을 했다.

“경질이라니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스스로 물러난 것이고, 여전히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SFBC라는 민간군사기업의 대표고요.”

“히코조 하마다. 자네도 이제 미국인이 다 되었군.”

“......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 말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길···.”

“그만. 여긴 자네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가 아니야. 통역에나 신경 쓰라고.”

조셉 헤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았다. 이를 본 막스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길게 끌 필요가 없겠군. 헤코 무기 리스트를 건네줘.”

“알겠습니다.”

헤코가 아이즈 번주에게 서류를 건네줬다.

일본어로 리볼버와 라이플, 대포의 모델과 간략한 성능, 수량이 적혀 있었다.

라이플의 경우 전장식, 후장식 활강 머스킷에서부터 레버액션 방식의 스펜서 7연발 라이플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미국 내전에서 사용했던 총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즈 번주의 눈가에 실망감이 들어설 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목록이 있었다.

다름 아닌 개틀링 기관총.

수량은 10문으로 딸린 탄약만 5만 발이었다.

“이 무기들이 전부 배에 실려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이즈 번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번주들에게 서류를 돌리자 탄성이 흘러나왔다.

“가격은 영국이 조슈번에게 제공한 무기보다 비싸진 않을 겁니다.”

현재 막부군은 프랑스의 군복과 무기에 의존하고 있다.

나폴레옹 3세가 막부에 군사 고문까지 파견하여 돕고 있지만, 무기는 구식 모델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도막파는 영국의 엔필드 라이플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기존 머스킷은 트랩도어 방식의 후장식으로 개조해 썼다. 트랩도어는 약실에 경첩을 달아 장전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국은 개틀링 기관총까지 도막파에 지급했다. 교토가 있는 오사카를 쉽게 내어준 것도 그들의 막강한 화력을 버텨낼 수 없어서였다.

무기 구매 담당 관료들은 리스트와 가격을 비교한 뒤 아이즈 번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에는 이의가 없다는 뜻이었다.

무기 거래 금액은 80만 달러.

쇼군의 승인이 떨어지면 금과 은으로 대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남은 건 SFBC와의 별도 계약인데.

막스가 먼저 아이즈 번주에게 제안했다.

“이곳에 무기만 팔려고 온 건 아닙니다. 막부의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조건으로 거래하고 싶습니다만.”

“골칫거리라면···?”

“번 하나를 최소 일 년 간 전쟁에서 배제 시키겠습니다.”

“!”

도막파의 핵심 조슈번과 그들에게 힘을 보탠 도사 번과 사가 번. 그중 하나를 배제 시킨다는 건 실성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고작 상선에 태워 온 병력으로 하겠다고?

번주들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숨겨둔 병력이 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겁니까? 알고 보니 허풍쟁이셨구려.”

아이즈 번주도 이때만큼은 막스가 사기꾼이 아닐까 의심했다. 가늘어진 눈은 배신당한 자의 눈빛이었다.

물론 막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막부가 내게 도움을 요청한 시점이 도막파에 오사카를 빼앗긴 시점이더군요.”

대략 넉 달 전의 일이다.

그런데 도막파는 기세를 몰아 에도성에 진격해야 했음에도 중간 지점에서 막부와 대치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야 사쓰마번 때문이겠죠.”

“약삭빠른 시마즈 타다요시 번주는 어느 편에 설지 저울질하고 있을 겁니다. 원래 사쓰마번이 그런 족속이거든요.”

번주들은 이를 갈며 분노를 드러냈다.

사쓰마번은 조슈번과 더불어 일본 최고의 군사력과 자금력을 가진 번.

원 역사와 달리 사카모토 료마의 암살로 역사적인 삿초동맹은 일어나지 않았다.

되려 조슈와 사쓰마는 서로를 의심하며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여기서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 건, 조슈가 사쓰마 대신 도사 번의 좃또동맹이 일어났다는 점이었다.

원 역사에서 도사번이 조슈번과 손을 잡은 건 보신 전쟁이 벌어질 때였다. 그런데 그 시기가 훨씬 앞당겨진 것이었다.

이는 사카모토 료마가 도사 번 출신의 사무라이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막스는 삿초동맹을 없애는 대신 좃또동맹을 앞당겨 사쓰마번을 중립으로 묶어둔 셈이었다.

막스가 말을 이었다.

“사쓰마번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빤합니다. 어쩌면 물밑에서 조슈번과 협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설마 사쓰마번을 배제 시키겠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미토 번주가 막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냥 던진 말에 막스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맞습니다. 앞으로 일 년 간, 사쓰마번을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묶어 두겠습니다.”

회의장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탄식 속엔 아이즈 번주의 한숨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하길.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돈은 원하는 대로 줘야겠지. 단, 거짓으로 꾸며댄 말이면 대가는 치러야지 않겠습니까?”

막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는 위약금으로 대신하기로 합시다. 사쓰마번을 일 년 묶어두는 데 드는 비용은 3백만 달러. 실패하면 위약금으로 1백만 달러를 지급하도록 하죠.”

“조건이 기가 막히지만,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 정도 비용이야 문제 될 건 없지요.”

비아냥거린 미토 번주는 다른 번주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우리야 뭐 손해 볼 거 있나요.”

번주들은 막스가 미국 함선을 끌고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사기꾼이 아니라면,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번주들은 SFBC와 계약하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미리 막스가 준비한 계약서를 들고 쇼군을 찾아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