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쇼군이 되고 싶습니까?
회의가 끝나고 막스는 접객실에서 쇼군과 대면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일이 있으셔서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신 결과물을 가져왔습니다.”
아이즈 번주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쇼군 직인이 찍힌 인주는 아직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쇼군께서 사쓰마번을 묶어 둔다는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황당하지만 손해가 아니라는 걸 파악하셨군요.”
“정말 방법이 있는 겁니까?”
“이것저것 해 봐야죠.”
막스는 속내를 감추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만큼 은밀한 작전이라 생각하고. 아이즈 번주는 입맛을 다시며 화제를 돌렸다.
“무기는 상태를 확인하고 대금을 지급하라 하셨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결정이 빨라서 좋군요.”
“전쟁상황이니까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긴히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이즈 번주가 은밀히 막스에게 독대를 청한다.
막스는 조셉 헤코와 함께 밀실로 장소를 옮겼다.
탁자에 앉자마자 아이즈 번주가 물었다.
“대체 속셈이 무엇입니까?”
“속셈이라니요? 보다시피 난 전쟁에서 막부가 이기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이유는요? 혹시 영국과 미국의 알력 싸움입니까?”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다.
열강들이 밥그릇을 두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으니.
막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미국이 영국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지요. 개인적으로 조슈번이 득세하는 꼴을 보기 싫다, 정도로 생각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긴 아이즈 번주가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쇼군께서 귀하를 만나지 않는 진짜 이유를 아십니까?”
“그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겠지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죠. 귀하가 전쟁에 큰 영향을 줄 것 같아서 피하는 겁니다.”
“흥미롭군요.”
“맞습니다. 지금의 쇼군은··· 꽤 흥미로운 인물이지요.”
아이즈 번주의 목소리에 짙은 실망감과 허무함이 묻어났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어떤 인물인가?
막스가 전생의 기억을 뒤적거려 찾아낸 쇼군의 정보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보신 전쟁 당시 몇 차례 야반도주하여 막부의 사기를 떨어트렸다는 것.
막부의 편을 들었던 번들이 처참하게 몰락해갈 때, 정작 본인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며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는 정도였다.
다만 이 두 가지 정보만으로도 요시노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즈 번주의 반응을 봐선 그 역시 쇼군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1년 전, 요시노부 쇼군께선 즉위한 직후 조정과 무가의 분리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치고자 했습니다.”
조정은 왕실, 무가는 막부. 일본의 이원화된 정치구조를 하나로 합쳐 공무합체(公武合体)라 불렀다.
요시노부는 조슈번, 사쓰마번 같은 존왕양이파들의 공세를 피하려 공무합체를 시행했다.
“이게 끝은 아니지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쇼군께서는 막부 통치권을 일왕 덴노에게 넘겨주는 대정봉환까지 실행했습니다.”
“왕정복고를 이룰 셈이군요.”
“맞습니다. 막부의 쇠퇴를 직감한 쇼군이 적들과 타협을 시도한 거라 봐야지요.”
얼핏 현실감각이 뛰어나고, 냉철하며, 임기응변에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즈번 번주의 생각은 달랐다.
번주의 목소리가 조금은 격해졌다.
“말이 좋아 대정봉환이지, 쇼군은 통치권을 일왕에게 넘긴 다음에 벌어질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막부 대신들은 어디로 갈 것이며, 막부를 따르던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슈번에 숙청당하겠지.’
가문은 피를 뿌리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될 테고. 아이즈 번주가 이를 깨물며 물었다.
“일전에 저한테 해준 조언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막스는 이런 말을 했었다.
- 도쿠가와에 진 도요토미 일족을 잊었습니까? 전쟁의 패배는 가문의 처참한 몰락입니다. 쇼군이 싸우지 않고 권력을 내준다면 결국 혼자 살겠다는 뜻이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놀랍게도 막스 말은 현실이 되어 쇼군은 막부를 더 빠른 속도로 쇠퇴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에도성의 주인임에도 쇼군은 줄곧 왕이 있는 교토에 머물렀다. 1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는지 번주의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쇼군은 오로지 자기 살 궁리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사카를 버리고 야반도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절대 쇼군으로서 할 행동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듣던 막스가 눈을 반짝이며 아이즈 번주를 응시했다.
“혹, 쇼군이 되고 싶습니까?”
*
에도 막부는 본래 도쿄항을 외국에 개방하지 않는다. 주로 국제 무역은 요코하마 항에서만 이루어졌다.
“원래는 그렇게 되어야 했습니다만. 내전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셈이지요.”
주일 미국 대사 로버트 브루스 반 발켄버그가 말했다. 전임자 로버트 프루인의 뒤를 이어 부임한 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배를 정박하고 무기를 내리고 검수하고.
꼬박 사흘을 에도 항에 머무르는 동안 막스는 주일 대사 발켄버그와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편지를 조선에 보내고 싶습니다만.”
“수신자가 대원군이군요. 혹시 내용이...?”
“비밀입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입맛을 다시던 발켄버그 대사는 여느 때처럼 남북전쟁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107 뉴욕 보병 연대장으로 복무할 때였습니다. 하퍼스 페리 부근에서 적들과 맞닥트렸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하퍼스 페리까지 밀고 왔으면, 스톤월 잭슨 장군이었겠군요.”
“맞습니다!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총사령관님께서 일부러 남군을 유인하지 않고, 교전을 지시했다면 꼼짝없이 포위당했을 겁니다. 잭슨 장군의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거든요.”
발켄버그는 공화당 의원 출신으로 남북 전쟁 땐 뉴욕 보병 연대를 이끌던 연대장이었다.
막스 휘하에서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맛본 덕분에 지금도 막스를 꼬박꼬박 총사령관으로 불렀다.
“참, 총사령관님. 스톤월 잭슨 장군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며칠 내로 CSS 스톤월이 요코하마 항에 도착할 겁니다.”
발켄버그의 말에 막스의 눈이 반짝였다.
CSS 스톤월은 남부 연합이 프랑스에서 몰래 건조한 1,400톤급 철갑선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CSS 스톤월은 워싱턴 해군 공창에 안치되었는데, 이를 막부의 주미 특사 대행이 발견하고는 40만 달러에 계약을 체결했다.
현재 CSS 스톤월은 코테츠(Kōtetsu)로 이름을 바꿔 일본으로 오는 중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박의 구매 시점인데, 일본 내전이 발발하자마자 발켄버그는 선박 인도를 중단해야 한다며 워싱턴에 편지를 보냈다.
이와 관련해 링컨 대통령이 막스에게 말하길.
- 발켄버그 대사가 미국은 중립 입장을 지켜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네. 양국의 통상 조약에도 내정은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습니다. 이번 원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SFBC를 어떻게 볼지 걱정했거든요.
자칫 미국의 개입으로 딴지를 걸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이 40만 달러짜리 철갑선 인도를 거부하고 중립을 고수했다?
- SFBC와 미국 정부의 관계를 확실히 선 긋는 일이죠. 어디까지나 기업활동에 머무는 겁니다.
- 흠. 그렇게도 활용할 수 있겠군. 그럼 이참에 일본에 선박을 인도하지 않겠다는 걸 대외적으로 알리겠네. 그나저나, 인도하지 않을 배를 어디에 둘지도 고민이군.
이미 배는 워싱턴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문제는 그 배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딘가에 정박해두어야 했다.
과연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 링컨과 막스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나라가 있었으니.
조선이었다.
흥선대원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스가 CSS 스톤월 철갑선을 생각하고 있을 때, 발켄버그 대사가 물었다.
“사쓰마번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러다 내일이라도 조슈번과 손잡는 건 아닌지, 제가 다 애간장이 된다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철갑선이 도착하는 대로 계획에 착수할 생각입니다.”
“설마···. 철갑선 타고 사쓰마로 돌격하는 건 아니시죠?”
“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요.”
“...... 총사령관니임!”
막스가 하면 농담이 농담같이 들리지 않는다.
남북전쟁에서 워낙 변칙적인 전략 전술을 구사했던 터라, 발켄버그는 진짜로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막스가 고개를 절레 저으며 물었다.
“제 이미지가 그랬습니까?”
“...... 모르셨습니까?”
“이미지를 바꿀 필요가 있겠군요. 아무튼, 전 일본 땅에서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총칼이 아닌 주변을 이용할 생각이거든요.”
“주변이라면···.”
‘조선?!’
깜짝 놀란 발켄버그가 손을 휘저었다.
“그거 진짜 위험한 생각이십니다. 내전 중인 일본을 조선이 침략하면 다른 나라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설마 그런 일이야 벌어지겠습니까. 단지, 사쓰마번의 지리적 특성과 대외관계를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막스는 간략하게나마 자신의 시나리오를 설명했다. 듣는 내내 발켄버그는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 솔직히 가능할까 싶군요.”
“의심스러울 땐 야수의 심장으로 일단 저질러 보는 겁니다. 우리야 손해 볼 거 있습니까.”
“흠. 갑자기 무서워지는군요.”
“뭐가요?”
“...... 총사령관님이요.”
사흘 뒤.
요코하마항에 무시무시해 보이는 철갑선이 도착했다.
선체 길이 57미터.
254밀리미터 주포와 두 개의 163밀리미터 부포로 무장. 2개의 증기기관 엔진에 배 전체는 철갑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심엔 증기가 배출되는 기다란 원통이 달린 배였다.
두 개의 돛대가 없었다면 영락없는 잠수함처럼 생긴 모습이었다.
막부 관료와 번주들은 배를 인도해 달라며 요구했지만, 막스는 권한 밖이라며 거절했다.
“SFBC와 미국 정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내리신 결정을 제가 무슨 힘으로 바꾸겠습니까.”
막스는 물론 발켄버그 대사까지 인도를 거부하자 막부는 철갑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깃발부터 교체하시죠.”
발켄버그는 철갑선 선장에게 코테츠라는 글자가 걸린 깃발을 내리고, 미국 국기를 걸어 두도록 지시했다.
막스가 콜로라도호와 미국 국기가 내걸린 철갑선을 끌고 항구를 벗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목적지가 조선이라는 사실을 알곤 에도성의 번주들이 막스를 비난하고 나섰다.
“우리에게 줘야 할 배를 가지고 뜬금없이 조선은 왜 가는 겁니까?!”
“오사카에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만났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는 판에 그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 모두 그자의 농간에 말려든 겁니다. 애초에 무기만 팔아먹고 조선으로 내뺄 생각만 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조선인이 달리 조선인이겠습니까!”
결국 막스를 끌어들인 아이즈 번주가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에도 항구에 도착했을 때, 막스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즈 번주를 본 막스는 그의 속도 모르고 미소를 지었다.
“번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을 텐데, 불만이라니요?”
막스가 너스레를 떨자, 아이즈 번주가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닙니다.”
“나도 장난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떠나기 전에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마침 잘 왔습니다. 사쓰마번을 묶어둘 방법이 궁금하셨지요?”
막스가 헤코를 쳐다보자, 미리 준비해둔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 담긴 종이에는 이런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는데.
[琉球王国(류큐왕국)]
‘갑자기 류큐왕국이라니?’
아이즈 번주는 이게 무슨 의미일까 고심했다.
류큐왕국은 일본 남부 해안에서 600km가량 떨어진 섬으로, 사쓰마번에 조공을 바치는 독립 국가다.
섬은 작지만,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의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고 여기서 얻은 이익은 사쓰마번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이거였나.’
의도를 파악한 번주가 막스를 쳐다봤다.
그는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뗐다.
“류큐왕국을 공격해서 사쓰마번의 발을 묶겠다는 말입니까?”
“공격이 아니라 보호지요.”
“..... 목적이 뭐가 됐든. 류큐를 점령해도 지켜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사쓰마번의 군사력은 해군에 특화됐다.
원 역사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육군은 조슈번, 해군은 사쓰마번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상선 한 척으로 지켜봐야, 하루면 빼앗길 겁니다. 사쓰마번을 너무 우습게 보셨군요.”
“그래서 도움을 받으려고요.”
“도움?”
막스가 아이즈 번주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류큐왕국에 조선 병력을 주둔시킬 생각입니다.”
쿵.
아이즈 번주의 눈동자가 미친 듯 요동쳤다.
원 역사에서 류큐왕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강제 합병. 훗날 미군 기지가 들어서는 오키나와였다.
일본 열도를 집어 삼키는 작업.
'이제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