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4화 (354/360)

#354 이 정도면 몇 번 죽이고도 남지

SFBC 대원들은 배와 선착장을 잇는 좁은 다리를 빠르게 올라가 갑판을 점령했다.

계절이 여름이라 선원들은 갑판 위에서 배를 까고 누워 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누, 누구야!”

느닷없이 들이닥친 무장 괴한들. 혼비백산한 선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만, 총구 앞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철컥.

철컥.

“선원들은 죽이지 않는다. 전부 감금해.”

“!”

SFBC 대원들은 동시에 세 척의 배를 점령.

조타실과 화물칸까지 배를 샅샅이 뒤져 선원들을 색출해내고. 그들을 화물칸에 감금했다.

“아, 드디어 잘 수 있겠구만.”

순식간에 배를 탈취한 대원들은 곧바로 갑판 위에 너부러졌다. 불침번을 제외하곤, 눕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칠 주야 동안 전투를 벌인 탓에 막스조차 밤하늘의 별을 잠깐 쳐다보곤 이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하역장이 인부들로 붐비고, 국가와 인종도 다양했다.

그들 사이를 뚫고 영국 대사 파크스가 배를 찾아왔다. 그런데 배와 선착장을 잇는 다리가 보이질 않는다.

파크스가 선착장에서 배를 향해 소리쳤다.

“어젠 왜 나를 찾아오지 않은 거요!”

두 번을 소리쳐도 아무도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배벽을 두드리고 작지만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깁니다, 여기! 용병들이 우리를 가둬 놨어요!”

“!”

파크스가 입을 쩍 벌릴 때, 항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용병들이 선원들을 가뒀다고?”

“무슨 용병?”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세 척의 배를 올려다본다.

파크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눈만 껌뻑거렸다.

이때 누군가 배 위에서 고개를 쓰윽 내밀었다.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남자.

잠에서 막 깼는지 눈을 비비곤 양팔을 갑판 외벽에 걸친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정신이 든 파크스 영사가 소리쳤다.

“다, 당신은 뭔데 그 배에 타고 있는 거야!”

“뭐긴. 새로운 배 주인이지.”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막스는 잠을 떨치려 머리를 한차례 흔든 뒤, 파크스 영사를 응시하며 말했다.

“뭐가 터무니없어. 오늘부로 이 선박들은 우리 SFBC 소유다.”

“SFBC!?”

항구에 모여든 사람들이 탄성을 터트리고 이내 소란이 일어났다.

소수의 인원으로 열 배의 전력을 이기고, 그것도 모자라 세 척의 선박까지 나포했다는 건데.

너무나 강렬하고 충격적이라 믿기조차 힘들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투는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거 보면 몰라?”

“진짜 백 명이 천 명을 이겼단 말입니까? 그럼 나머지 대원들은 어딨는데요?”

이때 생존 신고를 하듯 배 위에서 하나둘 머리가 솟아올랐다. 잠에서 깨운 게 못마땅한지 대원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누가 못 믿는다고?”

거구의 근육 덩어리 로어가 묻자, 질문을 던진 사람은 황급히 사람들 뒤로 숨어들었다. 그래봤자 위에서는 다 보였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이 뒤섞인 군중들은 감탄과 경외 어린 시선으로 대원들을 쳐다봤다.

머릿속엔 ‘SFBC’라는 존재가 강렬하고 선명하게 각인되고. 저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갈 소문들은 SFBC를 전 세계에 알리게 될 터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파크스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배 위로 보인 머리통 수를 헤아려도 얼추 백은 되어 보였으니까.

‘혹시 조선군이 몰래 도움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인파 속엔 조선군들도 상당수 있었고, 하나같이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SFBC의 전투력이 이 정도였나.’

파크스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갈 때. 막스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대영제국의 일본 영사요.”

“호오, 영사셨구나. 그래서 나한테 볼 일은?”

상대가 뻔뻔하게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파크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SFBC의 전투력은 둘째치고, 당장은 선박을 되찾는 일이 급선무다.

파크스가 돛대에 걸린 깃발을 쳐다봤다.

‘감히 대영제국의 배를 탈취하다니.’

속마음과 달리 파크스는 차마 이 말을 입 밖에 꺼내진 못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 대영제국 운운하는 순간 영국은 일본 내전에 개입한 셈이니까.

여유롭게 자신을 쳐다보는 SFBC 수장의 눈빛을 보면 그걸 노렸을 가능성이 컸다.

냉정을 되찾은 파크스가 입을 열었다.

“저 배는 용병들을 실어 나른 것뿐.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 단순한 수송 활동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배를 탈취할 이유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그럼, 왜 우리 주둔지를 포격했을까요?”

“...... 용병들의 협박이 있었거나, 혹은 다른 거래가 있었을 모르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원 개개인의 문제고, 선박 자체는 대영제국 회사 소속의 평범한 상선입니다!”

파크스는 일본 내전에 선을 긋고 선박으로 문제를 축소했다. 노련한 대처였다.

‘안 넘어오네.’

막스는 쓸데없이 침착한 영국 영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스카프 속에 가려 보이진 않았다.

영국 깃발이 걸린 상선을 탈취하는 건 확실히 리스크가 큰 일이었다. 자칫 말릴 수도 있는 상황이라, 적당히 타협을 봐야 했다.

“평범한 상선이라 치고. 주둔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면 응당 대가는 받아야지요. 영사께서 보상을 해주시던가, 아니면 선박 회사 관계자들과 자리를 주선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선박 소유주는 동인도 회사다.

애초에 일본 내란에 깊숙이 관여된 자들을 막부에서 고용한 용병들에게 소개해준다?

“허무맹랑한 소리요!”

“글쎄요. 우리 고급 인력들이 피땀 흘려 만든 주둔지가 그리 우스워 보입니까? 선박을 돌려받으려거든 관계자가 와서 직접 해명하고 보상을 해야 할 겁니다.”

눈을 가늘게 뜬 파크스가 막스를 노려봤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 일은 내 손에서 안 끝날 거요. 조만간 대영제국의 깃발이 걸린 상선을 탈취한 대가를 톡톡히 맛보게 될 겁니다!”

파크스가 목에 핏대를 올리는 때, 한 남자가 인파를 뚫고 튀어나왔다.

발켄버그 대사였다. 막스에게 눈으로 인사한 뒤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째 일부러 판을 키우시는 것 같습니다, 파크스 영사. 이 일은 우리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용병들을 실은 배가 포격까지 했다면, 응당 그들과 한 몸으로 봐야지요. 설령 그게 아니라면 진위를 따져보고 협박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걸 따진 겁니다. 미국 국기가 걸린 상선이 나포되어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일본에서 고용한 일개 회사와 용병들 일에 어찌 국가가 개입하겠습니까?”

파크스는 울화통이 터졌지만 꾹꾹 누르며 표정 관리에 힘을 썼다. 갈수록 사람들이 몰려들고 미국 영사까지 등장하자 부담만 늘어갔다.

‘젠장, 일단 여기서 빠지고 나서 생각해보자.’

“나는 오늘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할 겁니다. 우리 대영제국이 어떻게 대응하든, 그건 저쪽에서 자초한 거라는 걸 명심하세요.”

파크스는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

“일본 상황은 어떻습니까?”

갑판 귀퉁이에서 막스와 발켄버그가 마주했다.

그동안 가슴을 졸여서인지, 발켄버그는 배까지 나포한 막스를 괴물 보듯 쳐다봤다.

질문에 대답이 없자 막스가 되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요. 오늘따라 총사령관님이 같은 인간인가 의문이 들어서요.”

“난 또.”

발켄버그는 헛웃음을 흘린 뒤 말을 이었다.

“막부가 교토를 탈환하려고 총공세를 가하고 있습니다. 전세를 보면 서쪽으로 꽤 많이 밀고 갔더군요. 파크스 영국 영사가 초조해하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겁니다.”

발켄버그는 목소리를 줄여 말했다.

“그런데 사쓰마번을 오래 묶어두는 건 힘들 겁니다. 내부에는 존왕양이파도 많거든요. 그들이 탈번이라도 하는 날엔 지금 번주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사쓰마번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면 그 또한 반길 일입니다. 수습하는 것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사쓰마번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내전을 길게 끌고 가는 게 사쓰마번의 역할이다. 1년간 그들을 묶어두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파크스가 화제를 돌리며 말을 건넸다.

“그건 그렇고, 배를 탈취한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파크스 영사가 억지를 부리긴 했지만, 솔직히 총사령관님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렇게 보셨습니까?”

“주둔지에 포격 한 건 분명 문제가 있죠. 그런데 영국이 어떤 나랍니까? 양심 이딴 거 없습니다. 깡그리 무시하고 함선을 끌고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럼 도망가야죠.”

발켄버그가 허!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총사령관님. 대통령 선거가 불과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영제국을 건드리면 오히려 링컨 대통령께 피해가 갈 거라고요.”

“그런 일은 막아야죠. 내가 일본으로 온 것도 선거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선데.”

‘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

발켄버그가 힐난하듯 막스를 쳐다봤다.

이때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막스가 말을 던졌다.

“지난번에 나한테 그러셨죠. 자딘 매시선의 뒤를 더 조심해야 한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죠. 자딘 매시선은 동인도 회사의 한 지부에 불과하거든요. 그리고 이 동인도 회사는 그냥 회사가 아닙니다. 세포이 항쟁으로 회사는 청산절차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영향력은 막강하거든요.”

뭔가 생각난 듯 발켄버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 파크스 영사와 대화를 나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내전과 상관없이 총사령관님을 제거하려는 자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뭐, 그런 사람이 어디 한 둘입니까.”

“..... 물론 그렇긴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 아닌 가문입니다.”

막스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바로 베어링 가문이죠.”

지금은 밀려났지만, 베어링 은행을 소유한 영국 최고의 금권 가문.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일 수 있도록 개입했으며, 미국 채권을 직접 프랑스로 전달해 자금을 치르는 역할까지 한 가문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이 베어링 가문을 일컬어 말하길.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이어 ‘유럽의 여섯 번째 강대국’이라 부를 정도였다.

발켄버그는 베어링 가문이 막스와 적대적인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일단 남북전쟁 당시 남부를 지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륙횡단철도 지분도 가지려 했습니다. 그런데 존 브라운 대통령과 총사령관님이 계속 미루는 바람에 투자를 못 했죠. 그리고 또 하나.”

베어링 가문은 홀리데이가 추진하고 있는 AT&SF(애치슨, 토피카 및 산타페 레일웨이)의 지분도 가지려 했다. 하지만 홀리데이는 그들의 투자 유치를 5% 내외로 축소시켰다.

이는 막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베어링 가문은 동인도 회사의 이사였고 일본 내전까지 총사령관님과 엮였으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몇 번 죽이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

막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뗐다.

“내가 그래서 배를 나포한 겁니다. 자딘 매시선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인물과 접촉하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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