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이번에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조슈번의 깃발은 붉은 색과 흰색을 사선으로 구분하여 알아보기도 쉬웠다.
전력을 파악한 막스가 수신호를 보내자 해리 선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뱃머리를 틀기 시작했다.
‘하,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영국 상선 세 척이 다가가자, 경계하던 수병들은 총을 내려놓고 손을 흔들기까지 한다.
영국과 미국 백인을 구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의심하지 않았다.
“콜린도 빨리 손 흔들어요.”
“진짜 나포하려는 건 아니지?”
“아니면 미쳤다고 이러겠습니까?”
콜린의 말에 막스는 고개를 숙인 채 코웃음 쳤다.
이윽고 대원들이 조슈번 수병들에게 자연스레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침을 꿀꺽 삼킨 해리 선장은 조슈번 선박에 배를 가까지 대고, 다른 두 선박은 포위하듯 둘러쌌다.
쿵!
배 하나를 세 척이 에워싸자, 조슈번 선장과 수병들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
그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할 때, 양쪽 영국 상선의 갑판 위에서 총구가 튀어나왔다.
타앙!
타앙!
순식간에 교전이 일어나고, 그 사이 로어와 분대원들은 배와 배 사이에 다리를 올려 두었다.
“고! 고!”
일방적인 교전, 방패를 앞세워 침범하는 모습에 조슈번 수병들은 경악을 토해냈다.
불과 40명밖에 되지 않은 병력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판 접수 완료!”
“나머진 선장을 붙잡아!”
막스의 외침에 로어는 분대원 셋을 이끌고 조타실로 가 선장을 인질로 잡았다.
조슈번 배를 나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사망자는 없고 일곱 명이 총상을 입었는데 전부 조슈번의 수병들이었다.
“조센징 따위가 감히!”
뒤늦게 막스의 정체를 깨닫곤 분노를 터트렸지만, 로어가 뒤통수를 후려치고 몸통을 즈려밟자 이내 잠잠해졌다.
막스는 부상자들을 치료한 뒤, 조슈번 수병들을 창고에 감금시켰다. 그런 다음 선장과 부선장에겐 총을 겨눠 다음 목적지를 말했다.
“대마도로 간다.”
막스가 해리 선장의 배로 오자, 그가 난색을 표했다.
“대마도엔··· 얼마 전 조선군 때문에 조슈번 수병들도 꽤 된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가는 겁니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지.’
어느 정도 막스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해리는 생각을 포기한 채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조슈번의 배를 꼭지점으로 영국 상선이 삼각 편대로 나아갔다.
*
대마도는 조선 입장에서 인구도 많고 농사짓기도 부적합해 점령해 봐야 계륵과도 같은 섬이다.
그 때문에 대마도 섬주는 조선의 신하로서, 일본의 다이묘라는 신분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상황과 맞물려 최근 몇 년간 극심한 혼란을 겪은 끝에, 대마도 섬주가 조슈번과 동맹을 맺었다.
막스는 도막파의 가담하려는 대마도의 움직임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조선과 청을 끌어들이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그 시작은 조선군이 대마도로 들어가는 명분을 만드는 것.
류큐에서 나포한 사쓰마번의 배를 해적으로 위장해 조선에 포격을 가한 다음 대마도로 도망치게 했다.
이를 빌미로 조선군이 대마도에 발을 들이자 섬주는 당황하고 대노한 일본 왕실과 조슈번은 즉각 조선에 칙사와 함께 열 척의 함선을 대마도로 급파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발을 빼던 조선은 청나라를 꼬드겼다.
[일본의 내란을 틈타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니,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언제 어느 때 피해를 볼지 알 수 없습니다.
하여 해적의 근거지인 대마도에 병사를 주둔해 원천 봉쇄하고자 하였는데, 일본이 이 뜻을 곡해하여 원성이 자자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들이 대마도를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설령 그들의 주장처럼 그동안 간접적으로 대마도를 지배했다면 해적들의 소행도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권리는 부르짖으면서 책임은 회피하다니요.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여하튼 우리 조선은 일본의 주장을 떠나 대마도를 점령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여 일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자 청나라의 주둔을 함께 요청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를 추가했는데, 몇 해 전 러시아가 대마도에 통상을 요구했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 한 일을 들먹였다.
청나라의 대마도 개입으로 일본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은 청과 영국의 관계를 교묘히 이용해 대마도에 수군을 파병하며, 이때를 맞춰 청도 다섯 척의 군함을 급파하도록 요청했다.
조공을 금으로 일부분 지급한다는 약조를 한 데다, 여러모로 청의 이익과도 부합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내전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도막파는 대마도 북쪽에 똬리를 튼 조선과 청나라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막스는 선장을 협박해 그나마 배들이 적은 선착장을 타겟으로 설정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대마도 남쪽 이즈하라.
조슈번과 대영제국의 깃발이 달린 네 척의 배가 유유히 항구로 진입한다.
그곳에 정착된 여섯 척의 목조선은 조슈번과 대마도의 함선들. 배를 정비하는 선원들 몇 명만 눈에 띄고, 나머지 선장과 선원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어촌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선착장으로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보였다.
배를 정박하고 닻을 내리기 전, 막스는 조셉 헤코를 전면에 내세웠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도록 헤코는 나무 상자 위에 우뚝 서서 배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오는 동안 막스가 일필휘지로 휘갈겨 쓴 종이를 부들부들 떨며 펼쳤다.
- 이거 읽으면서 적들을 한 군데로 몰아야 해.
종이에 적힌 내용은 단 한 줄.
조셉 헤코는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위엄이 깃든 목소리로 외쳤다.
“덴노께서 친히 그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윤허를 내리셨도다!”
“오오!”
일왕의 칙령이라는 말에 흩어져 있던 선장과 선원들이 선착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조슈번 깃발이 달린 배로 적들을 안심시키고, 일왕의 칙령으로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니.
철컥, 철컥.
갑판 위에서 백여 개의 총구가 드러나는 순간 조슈번의 병사들은 경악을 넘어 의아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대다수는 아직도 왕의 칙령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조셉 헤코는 그들의 희생을 줄이고자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순순히 협조에 따르면 험한 꼴은 피할 수 있다! 우린 너희를 죽이러 온 게 아니다! ”
하지만 헤코의 경고가 무색하게 막스가 잇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총소리에 놀란 이들은 몸을 움츠리고, 이마에 구멍이 난 시체 둘이 바닥에 쓰러져 피를 뿜어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헤코에게 막스가 지시했다.
“선장들과 선원들만 배에 오르라고 해.”
곧 적들이 몰려올 텐데, 항구를 점령하는 건 의미가 없다.
SFBC 대원들은 열 척의 배로 흩어져 선장과 선원들을 협박해 배를 출항시켰다.
항구의 병사들이 뒤늦게 총을 쏘지만 배에는 작은 구멍만 남을 뿐이었다.
“······ 이번에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에 해리 선장이 체념한 듯 물었다.
막스는 미소를 머금으며 목적지를 알려 줬는데, 생각보다 꽤 정상적인 곳이었다.
“류큐로 돌아갑시다.”
*
교묘하게도 나하 항구에 들어설 즈음, 막스는 영국 파크스 영사를 의식해 대영제국 깃발을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고기 잡으러 간답시고 항구를 떠난 세 척의 배가 일곱 척의 배를 나포했다는 매직은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갔다.
항구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이들 중엔 도막파와 좌막파도 뒤 섞여 있었다.
내전 중인 두 집단이 함께 있음에도 칼부림이 나지 않은 건 류큐가 사쓰마번의 입김을 벗어나 완전한 중립국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본 내전을 비켜 열강의 깃발을 내건 상인들과 외교관들이 모인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막스는 도착하자마자 나포한 배들을 막부에 팔아치웠다. 가격은 한 척당 일만 달러.
도막파들의 거센 항의가 있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영국 영사 파크스도 입에 게거품을 물고 항의했다.
“아니, 제정신입니까?! 대영제국의 깃발을 내걸고 배를 나포하다니요!”
“처음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기나 잡을까 하고 나갔는데, 하필 조슈번 배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금이 저려서 고기를 잡을 수가 있어야지요. 한창 대치하던 끝에 하는 수없이 선공을 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내 비록 막부의 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 정도로 막돼먹은 놈은 아닙니다. 대영제국에 누를 끼쳤다면 사과를 드리죠. 만약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곧바로 배를 반납할뿐더러, 위약금으로 6천 달러 역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막스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작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해서 영국 영사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막스는 조선에 요청하여, 백인들이라면 눈이 돌아갈 아름다운 백자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뇌물은 먹히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스는 또다시 배를 몰고 일본 부근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이미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다가가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마도는 청과 조선군이, 바다에는 대영제국과 조슈번의 깃발을 내건 배들이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니. 막스가 노리는 건 조슈번의 배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아군의 배조차 경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6개월 동안 임대한 배는 그 역할만으로도 충분했다.
*
해가 바뀐 1869년 3월.
비교적 따뜻한 류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일본 내전은 교토를 두고 한층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주목할 사건은 사쓰마의 번주 시마즈 히사미츠의 암살 시도.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사쓰마 번내에서 존왕양이를 주창하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빠르게 번을 장악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막스가 갑판 위에서 냉수를 뜨고 기도한 게.
- 2개월 내로 조슈번과 동맹하면 그날로 사쓰마번을 지도상에 지워버리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 기도를 누가 그렇게 해. 그건 협박이지.
- 1년 동안 사쓰마번을 묶어 두기로 하고 백만 달러를 걸었습니다. 신께선 다 알아들으실 겁니다.
- 이제 별다른 작전이 없나 보네.
- ······
콜린의 말처럼 막스의 계획은 1년짜리다.
이는 얼추 미국 상황과 맞물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늘이 보우하사, 딱 1년 보름 뒤에 사쓰마번이 도막파에 합류했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던 3대 웅번, 조슈, 도사, 사쓰마번이 전부 막부를 척살하기 위해 힘을 모으게 되었다.
원 역사의 보신전쟁이 1년 늦게 시작된 셈이었다.
물론 달라진 점은 있다.
보신전쟁 초반에 패배를 시인했던 쇼군이 갈수록 전쟁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는 아이즈번 번주가 첩자를 숙청하고 사무라이들을 미국 무기로 무장시킨 것과 조선, 청의 움직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막부의 정통성을 주장한 것도 한몫했다.
이는 일왕에게 칼을 겨눈 막부에겐 꽤 중요한 명분이었다.
일본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되던 3월.
마침내 막스가 기다리던 서신들이 한꺼번에 도착했다.
링컨 대통령 재선 성공.
대륙횡단열차 완공.
콜로라도 요새 내 전화기 설치 및 테스트 성공.
WCBS의 두드러진 성장.
그리고 존 브라운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이었다.
막스는 직접 홍콩에 들러 배를 돌려주기로 한 계획을 바꿔, 포로인 듯 포로 아닌 선장과 선원들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막부에게 제2차 무기 공급을 약속하고 콜로라도호 배에 올랐다.
“갑시다, 캘리포니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