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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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임은 어릴 때 보육원에서 틀어 줬던, 키 작은 주인공이 동료들과 함께 절대 팔찌를 들고 모험을 떠나는 유명한 영화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내가 지금 <팔찌의 제왕> 세계로 들어왔다고? 무슨 이런 황당한 꿈이 다 있지?’
한 주임은 아직도 이곳이 꿈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차원 이동이니 뭐니, 처음 겪는 기상천외한 상황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만화는 고사하고 판타지 소설도 영화화된 두어 개만 본 적이 있는, 취미 생활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지독한 현대인이었다.
소환자들의 지루한 사담이 길어지자 말없이 있던 황제가 주름진 미간을 더욱 좁히며 손을 들었다. 즉각 붙은 시종장이 황제의 전언을 대주교에게 전달하자 그는 날랜 걸음으로 사제로부터 자수정을 건네받았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다른 이방인들은 나중에 ‘선구자’에게 설명을 들으시고, 각각 마나를 측정하도록 하지요.”
“저요! 저부터요!”
김유정이 손을 쭉쭉 뻗으며 기대감으로 발을 굴렀다.
대주교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녀의 곁으로 가서 자수정을 내밀었다. 근위병들은 이미 충분히 위엄을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멀찌감치 떨어졌다.
김유정은 설레는 마음으로 떨리는 손을 슬그머니 자수정 위에 올렸다.
이윽고 수정 안에 요동치던 물결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더니, 맞닿은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하얀빛이 수정 안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엥?”
빛은 수정 내부를 삼 분의 이 정도까지 채우고는 더 커지지 않았다. 본인의 생각보다 미적지근한 크기에 김유정이 당황한 듯 손바닥을 문질러 댔다.
“제법 훌륭한 편입니다. 이곳의 백성들은 보통 손톱만 한 크기니까요.”
대주교의 말이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는지 김유정은 아쉬운 입맛만 다시고는 물러났다.
다음은 김유정과 가장 가까이 있던 공 대리의 차례였다. 공 대리는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몇 번 바지춤에 문지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아 대박! 공갈 대리 나보다 작아. 으하하.”
김유정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공 대리의 얼굴이 귀까지 시뻘게졌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다른 거 없어요? 근데 유정 씨, 방금 뭐라고….”
수정의 절반 정도 차오르는 크기의 빛을 보며 공 대리가 역정을 냈지만, 대주교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박 차장이 손을 댔을 때 금화보다 조금 더 큰 빛이 생기는 것을 보며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빠르게 넘기고, 이제 염 부장의 차례였다.
“뭐, 여기다가 손을 올리라고, 요.”
앞서 직원들이 하는 것을 빤히 봤으면서도 굳이 또 한마디를 얹는다. 대주교의 싸늘한 표정에 염 부장은 금방 입을 다물고는 얌전히 손바닥을 갖다 댔다.
“오, 오오.”
대주교의 푸른 눈에 하얀빛이 크게 비쳤다. 자수정을 가득 메우는 빛은 구형을 거의 꽉 채우며 처음부터 흰 수정이었던 것처럼 변해 있었다.
늙은 황제의 뒤, 왼쪽에서 두 번째에 서 있던 밝은 금발의 남자가 유쾌하게 소리쳤다.
“갈록과 비슷한 수준이군요!”
갈록이라는 이름의 대주교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영 꽝은 아닌 모양이다.
저와 비슷한 마력 양을 가진 소환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황실 마법사로서 제 역할을 차고 넘치게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대주교는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남은 두 사람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한 주임의 심박수가 점점 빨라졌다.
“제가 먼저 할게요, 주임님.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한율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저도 약간 손을 떨었다.
그가 손을 올린 후 몇 초 사이에 주변이 눈부시게 환해졌다. 한 주임은 어두운 방에서 형광등을 켠 것처럼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지는 느낌에 눈을 흐렸다.
빛은 수정 내부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밖으로 환하게 번져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를 정면에서 본 것처럼 눈이 부셨다.
누군가 ‘현자 급입니다!’ 하고 외치자, 근위병들이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쿵쿵 찍으며 우람하게 소리쳤다.
“임파우 레비탄!”
“임파우 오웬!”
‘위대한’이라는 뜻의 고대어인 ‘임파우’를 외치는 성난 함성과 바닥이 울리도록 쾅쾅거리는 소리가 귀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한 주임은 그대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12년 전 준결승전의 그 날, 온몸을 덮치듯 쏟아 내리던 관중의 함성이 근위대의 목소리와 겹쳐지고 있었다.
바닥을 찧는 파동이 느껴질 때마다 동시에 뒤통수가 강하게 지끈거렸다.
반동으로 크게 휘청이자 이한율이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격하게 흔들어 댔다. 앞뒤로 이리저리 휘두르는 통에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임님, 괜찮으세요? 주임님! 정신 차려 보세요!”
이한율은 자꾸만 아래로 쏠리는 그녀의 양팔을 부여잡아 겨우 세워 놓고 있었다.
근위병들의 반복적인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딘가에선 휘파람 소리도 들리고 여자들의 웃음소리도 날아들었다.
한 주임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힘겹게 다시 떴다. 대주교는 대놓고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현자 급이라니! 황제가 큰 상을 내릴 것이 틀림없다. 그가 탐욕스러운 침을 꿀떡 삼키며 한 주임 앞에 자수정을 들이밀었다.
‘이 여자가 얼마큼의 마력을 가졌든 별로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한 대주교는 바들거리는 마른 손이 답답해서 손목을 홱 잡아채 수정 위로 올렸다.
“…….”
수정은 고요했다.
홀을 가득 메우도록 소리치던 근위병들이 자수정을 보고는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하더니, 곧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 안에 수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맴돈다. 세 번째 서 있던 남자의 눈이 단박에 그녀에게로 꽂혔다.
“어… 이게 고장이 맞는 것 같은….”
“이런 일은 또 처음이군요.”
침묵을 깬 이한율의 목소리를 대주교가 가로막았다.
창백한 손이 올라가 있는 자수정에는 그 무엇도 올려놓지 않은 듯이 고요한 물결만이 사르륵거릴 뿐이었다.
“저, 주임님이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몸 상태와는 상관없습니다. 타고난 마력 양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니까요.”
대주교는 신기한 듯 수정구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어디서 쓰레기가 섞여 들어와서는…….”
어디선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가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뇌까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한 주임은 그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다.
수정구에서 손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툭 떨어지더니 곧 세상이 깜깜해졌다.
이건 도대체 무슨 악몽일까.
* * *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지.”
야심한 시각, 노크도 없이 조용히 열렸다가 닫힌 문으로 금발의 사내가 들어섰다.
시즈가 올 줄 알고 있었기에 야닉은 놀란 기색 없이 담담히 맞은편 자리로 턱짓했다.
“꼬리는.”
“아. 내가 편지에 그 이야길 안 적었구나. 더는 아무 감시도 없어. 평판을 버리고 얻어낸 자유랄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답변이었는지 야닉이 의심스러운 눈을 했다. 시즈가 테이블 위에 가져온 포도주병을 내려놓으면서 심드렁하게 어깨를 추켜세웠다.
“장장 십 년을 망나니로 살았으니 이쯤이면 의심을 거둘 때도 됐잖아.”
“…….”
“말인즉슨, 불청객은 이제 3황자 야닉 리버스 하나뿐이란 뜻이지.”
2황자인 시즈의 농담에 야닉이 설핏 웃으며 병을 기울였다. 은으로 만든 두 개의 술잔 안에 붉은 액체가 차례로 채워졌다.
그가 잔을 들고 천연덕스럽게 맞장구쳤다.
“실망하지 않게 더욱 정진해야겠네.”
“위대한 제국의 망나니와 불청객을 위하여 건배.”
우스꽝스러운 화답을 한 시즈가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가볍게 운을 띄웠다.
“이번 이방인들은 전부 아는 사이인가 봐. 서로 친해 보이던데.”
맛을 음미하던 야닉이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아크만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에 비하면 시즈가 가져온 것은 턱없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엄지로 입술 끝을 문지르던 그가 대꾸했다.
“소환 방법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탓이겠지. 아직도.”
한 모금 만에 잔을 내려놓는 야닉을 보고 시즈가 웃음을 흘렸다.
“뭐, 그렇다고 듣긴 했는데. 그래도 이번엔 현자까지 나왔으니 운이 좋은 편 아닌가?”
“특출난 하나보단 평범해도 균일한 게 나아. 개성이 강하면 강한 만큼 혼자 튀어버리니까.”
“흠.”
시즈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포섭은 잘 해봐. 현자면 분명 도움이 될 테니. 그런데 그 여자와는 무슨 사이일까?”
“여자?”
“갑자기 쓰러진 여자 말이야.”
“아.”
야닉은 곧장 갈색 머리칼을 가진 이방인을 떠올렸다.
‘한 주임’이라고 불리던 여자는 제법 키가 큰 편이었음에도 다른 황녀들만큼이나 비쩍 말라 있었다.
혈색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진 것을 보아하니 평소에도 비실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내 휘하에선 곤란한데.
“부부나 연인은 딱 봐도 아닌 것 같지? 현자 쪽은 투명해 보였지만.”
“글쎄.”
“어떻게 마력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미인이던데 아깝게 됐어.”
망나니 행세가 완전히 위장은 아니었는지 시즈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소 한심한 눈길로 보던 야닉이 잔에 남은 포도주 위로 손가락을 튕겼다. 달궈진 표면 위로 점화된 파란 불꽃이 황금색 눈동자에 오묘한 빛깔로 비쳤다.
현자와 마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함께 소환되다니, 이건 또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현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자 쪽은…….
“다시 봤을 땐 다른 재주가 있길 바라야지.”
그래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그나저나 네 마법은 왜 안 꺼지는 거야? 이렇게나 작은데 말이야.”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에 고갤 들자 시즈가 불꽃 위로 쪼르르 물을 붓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주전자를 들이부으면서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는 진지한 모습에 야닉이 황당한 웃음을 머금었다.
힘이 생긴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자신이 물어볼 것이다.
그는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게. 나야말로 궁금하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