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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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에 한 번씩 꾸는 꿈은 주로 20XX년의 준결승전이었으나, 이따금 다른 장면이 보일 때도 있었다. 가령 열여덟 살의 지옥 같았던 시절이라던지.
한 주임의 첫 번째 지옥은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찾아왔다.
역대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었던 대한민국은 동메달 딱 하나 차이로 아쉽게 4위에 만족해야만 했고, 사람들의 안타까움은 곧 원망을 쏟아 낼 타깃을 찾아냈다.
‘대한민국 아쉽지만 잘했다! 4위 탈환’이라는 타이틀의 포털기사 댓글이 그 시발점이었다.
-한송이가 5점 쏴서 3위 말아먹음ㅋㅋ
└ 이제부터 오송이라고 부르자.
└ 고딩한테 심하네요. 한 선수가 이런 건 안 봤으면.
└ 송이야 댓글 달 시간에 훈련하자~
* * *
-내 친구랑 ㅎㅅㅇ 같은 학굔데 성격도 완전 ㅈㄹ 맞다고 함. 친구 0명ㅋㅋㅋ
└ 째진 눈탱이 봐라. 인상은 사이언스다.
└ 살도 괜히 찐 게 아닌 듯 급식 다 뺏어먹나ㅋ
* * *
-걍 죽었으면. XXX.
누군가 욕을 하기 시작하자 비난의 강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중엔 아홉 시 뉴스에까지 심각한 인터넷 악성 댓글에 대한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예시는 물론 한송이의 것이었다.
한송이는 뉴스를 통해서 모르고 있었던 악플들까지 전부 봤다.
한송이의 담당 코치는 본인이 더 역정을 내면서 이런 것들은 죄다 감방에 보내 버려야 한다고 당장 고소하자며 난리를 쳤다. 협회에서도 양궁 전반으로 퍼지는 비난 여론이 부담스러웠는지 법적 조치를 은근히 종용했다.
어렸던 한송이는 어른들의 강요 아래 네티즌을 고소했고, 두 번째 지옥이 시작됐다.
<한송이 측, 악플러 대거 고소 예고>
<천재 소녀 한송이의 반격. 자비는 없다!>
<눈물로 호소했지만 무시당한 50대 가장, ‘한송이 선수 내가 잘못했어요.’>
그들은 신명이라도 난 것 같았다.
이 시절엔 유명인사가 네티즌을 고소하던 것이 지금처럼 빈번하지 않았던지라 사람들은 두 명 이상 모이기만 하면 한송이를 입방아에 올려 댔다.
한송이를 시작으로 연예인들이나 정치인이 너도나도 따라서 줄줄이 네티즌 고소에 박차를 가하자 다른 연예인에게 악플을 달았던 사람들마저 한송이를 욕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루머들이 확산되었지만, 혈혈단신인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었다.
자연스레 비난 여론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갔다. 경찰의 출석요구를 받은 악플러들이 연이어 커뮤니티에 소위 말하는 ‘인증’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불쌍한 사정과 악마 한송이의 무자비함을 과격하게 표현하는 행태는 모두가 똑같았다.
몇몇 고소를 당한 이들의 불우한 가정사를 다룬 감성적인 기사도 등장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동정 여론마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송이는 어느 날 숙소 앞으로 찾아온 한 젊은 남자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면전에 대고 동물에 빗댄 상스러운 욕을 들어 봤다.
아마도 그녀에게 고소를 당한 사람이지 않았나 싶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인이었다.
그녀의 자신감 넘치던 얼굴이 날이 갈수록 무표정해졌다.
활을 들면 그날의 야유 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려 과녁이 보이질 않았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그녀를 보며 코치는 이번에는 선행기사를 내자며 부추겼다. 한송이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개인전에서 딴 메달 포상으로 매달 주어지는 연금들을 일시금으로 받아 여덟 자리나 되는 금액을 전부 보육원과 소아병동에 기부했다.
코치 말로는 여론이 좋아지면 언제든 컨디션이 돌아올 테고 너는 아직 어리니 금방 재기할 수 있을 거라며 자신만만했으나, 두어 개 올라왔던 기부 기사에는 비아냥거리는 댓글 몇 개가 전부였다.
기부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언제나 그렇듯 금방 관심이 수그러든 것이다.
너무 심한 것을 제외하곤 고소 취하도 많이 했지만, 취하된 사람 중에 ‘인증’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인식에서 한송이는 여전히 ‘고소의 여왕’이었고, 코치는 돌연 지방에 있는 중학교 감독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거센 돌풍 속에 있던 때가 나았을 정도로 허무함과 쓸쓸함이 덮쳐 왔다.
다섯 살, 보육원에 버려졌을 때도 그랬지만 열일곱 한송이의 곁에는 정말로 아무도 없게 되었다.
이모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녀는 어딘가 닮은 것 같기도 한 얼굴로 목 놓아 울며 한송이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여동생은 미혼모였고 아팠으며, 좋지 않은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 맡겨야 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모는 이제부터라도 함께 살자고 하면서 집을 구하고 있는데 조금만 보태 달라 훌쩍였다.
한송이는 상금으로 모아 두었던 돈을 기쁘게 건네주었고 이모는 어느 날부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요양 병원에 있는 엄마를 보게 해 준다고 그랬는데.
한송이 시절 한 주임은 그 흔한 친구 한 명 없었다.
보육원 출신의 그녀는 빵빵한 배경을 가진 양궁부 동기들에게 기죽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타고난 승부욕으로 남들보다 두 배는 덜 자고 더 많이 연습하며 이를 갈아왔다.
온갖 대회에서 상금을 휩쓸고 지난 올림픽 영웅들이 대거 섞인 살벌한 선발전과 평가전에서 그들을 누르고 당당하게 태극기 마크를 달았을 때는 한송이의 이름 앞에 ‘천재 소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녀는 혹독한 훈련의 성과보단 천재라고 불리는 것이 좋았다.
돈과 명예가 따라오고 모든 사람이 받들어 주는데 고작 친구 따위가 대수랴. 오히려 친구가 없어서 이처럼 완벽하게 과거를 세탁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이후 한송이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학교를 자퇴하고 선수촌을 나와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으로 단칸방을 얻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죽기 살기로 살을 빼고, 쌍꺼풀 수술을 한 뒤 개명까지 마쳤다.
그녀가 알기로, 12년이 지난 지금 한 주임이 과거에 그 유명했던 ‘한송이 선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아마도 성형외과 원장님, 개명 담당 법원 직원, 판사, 신분증 재발급을 도와준 행정복지센터 공무원 정도?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한 직장인으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주임은 돈도 명예도 없이 차라리 평범하게 사는 지금이 차라리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생애에 걸쳐 맞이하는 풍파를 일찌감치 겪었으니, 이제는 지루하고 평온한 나날만 남은 줄 알았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이상한 세계로 떨어져 버린 건 당연히 꿈이어야 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는 그런 꿈 말이다.
* * *
“재인아, 정신이 드니? 나 보여?”
가느다랗게 새어 들어오는 빛에 한 주임은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 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완전히 떴을 땐 박 차장의 근심 어린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장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나는 약한 쇳소리에 박 차장이 후, 하고 긴 한숨을 돌렸다. 하룻밤하고도 대여섯 시간이나 더 지났다고 전하며 그녀는 기가 막힌 어투로 물었다.
“자기 무슨 병 있어? 무슨 잠을 그렇게 많이 자?”
마음이 놓였는지 곧바로 원망 섞인 투정이 날아든다. 한 주임은 캐노피가 살랑거리는 낯선 침대의 감촉과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쓰러지기 전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정말로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꾸욱 한참이나 눌렀다가 떼어 봐도 여전히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 아니, 심지어는 지구인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지구든, 다른 행성이든, 어쨌든 갑옷 입은 사람들을 보면 현대는 절대 아니었다.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깜짝 카메라 같은 건가?’
당연한 순서로 드는 생각이었지만 사무실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 이동을 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얼떨떨하긴 해도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한 주임은 빠르게 상념에서 벗어났다.
지나치게 푹신한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낯선 옷을 입고 있는 마른 몸이 드러났다.
가로로 널찍하게 파여 어깻죽지까지 살을 드러내는 하얀 원피스 형태의 잠옷이었다. 잠옷이라도 이렇게 하늘하늘한 공주님 같은 옷은 그녀로선 처음 입어 보는 것이었다.
가만. 스스로 입은 기억이 없는데.
둥그스름한 옷소매를 들어 의아한 얼굴을 하자 박 차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기 어제 쓰러지면서 토했어. 나랑 유정 씨가 옷 갈아입혔고. 아니, 철야에 주말 출근도 밥 먹듯이 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픽 쓰러지느냔 말이야. 진짜 내가 어제 놀란 거 생각하면. 어휴.”
“아… 왜 그랬지. 죄송해요.”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남의 실수를 수습하느라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더니 누군가 조금이라도 화를 내는 기색이면 입 밖으로 ‘죄송’이 먼저 튀어나오는 버릇이 들었다.
그런 한 주임에게 박 차장은 더욱 인상을 썼다.
“누가 사과받고 싶대? 아이고, 이 답답아! 일은 똑 부러지게 잘하면서 사람이 이래 물러요! 됐고. 한 주임 깨면 부르라고 했으니까 거기 뒤에 있는 종 좀 흔들어 봐.”
한 주임은 박 차장이 턱짓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워 있던 침대 머리맡엔 주먹 크기만 한 금종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손잡이를 들어 살짝 흔들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침대에서 열 걸음도 넘게 떨어져 있는 커다란 문에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검은색 치마에 하얀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메이드 복장을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짧게 고개를 숙여 한 주임과 박 차장에게 인사를 한 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3황자님께서 한 주임님이 정신이 드시면 채비를 하시고 마탑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한 주임이 대답도 하기 전에 하녀가 제 할 말만 하고 빠르게 물러났다.
“다들 아침부터 마탑에 가 있어. 내가 자기 일어나면 데리고 가겠다고 했고. 자기도 어제 봤지? 내 앙증맞은 마력 크기. 흐흐흐…. 내가 자원 안 했어도 나보고 가라고 했을걸? 에잇. 더러븐 세계.”
박 차장이 팔짱을 끼고 자조적으로 킬킬댔다.
한 주임은 수정구슬에 자그마하게 피었던 박 차장의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빛을 기억해 냈다가, 문득 정신을 잃기 전에 구슬에 손을 올렸던 자신의 모습을 반추했다.
“저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