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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5화 (5/155)

5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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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임의 말에 박 차장은 모호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이방인이 마력이 없는 건 처음이었다고 하긴 하더라고. 근데 뭐 우리가 제 발로 온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끌고 온 놈들이 그딴 게 없으면 또 어쩔 건데. 안 그래? 생각하니까 괜히 또 열 받네.”

갑자기 화를 내는 박 차장을 보며 한 주임은 힘없이 웃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 혼자 뚝 떨어졌으면…. 상상만 해도 핏기가 가셨다.

한 주임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박 차장도, 나머지 사무실 사람들 모두가 그나마 동료들이 있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문이 다시 열리더니 조금 전에 나갔던 하녀가 금방 돌아왔다. 한 주임은 어색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녀의 뒤로 둥그런 욕조를 든 남자 하인 두 명과 뜨거운 물 주전자를 든 다른 하녀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들이 적당한 자리에 욕조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욕조로 주르륵 쏟아졌다. 다른 하녀 한 명이 여러 장으로 접혀 있던 파티션을 욕조 주위로 펼쳐 세우자 순식간에 조그만 욕실 하나가 완성되었다.

“모두 벗는 것이 불편하시면 입고 있으신 옷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다른 이방인분들도 처음엔 보통 그렇게 하셨습니다.”

욕조 안에 가득 채워진 물 온도를 확인한 하녀가 한 주임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한 주임은 여자들밖에 없다고는 하나 족히 다섯은 되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 잠옷 같은 원피스를 입고 머뭇머뭇 욕조로 걸었다.

“재인아, 나도 어젯밤에 겪어 봐서 아는데 여기 목욕 최고야.”

박 차장이 엄지를 척 올리며 사뭇 비장하게 말했다.

망설이던 그녀는 소매 안으로 팔을 넣어서 속옷의 후크를 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치마 아래로 손을 넣어 남은 속옷을 벗었다.

벗은 옷들은 동그랗게 말아서 재빨리 침대 머리맡에 있던 에코백에 쏙 넣고 돌아왔다. 그러자 위아래로 허전한 느낌이 들어 두 팔로 팔꿈치를 감싸 욕조로 들어가 후다닥 주저앉았다.

의식적으로 목욕탕처럼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했던 한 주임은 아주 오랜만에 물속에 있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만 맞다가, 수면 위로 둥실 뜬 팔에서 느껴지는 부력감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때 소매를 걷은 하녀 두 명이 각각 물 먹은 스펀지를 들고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두 팔을 물 위로 올리고 있는 한 주임을 보고는 양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 주임은 제 몸을 향해 뻗어 오는 손들을 보고 기함했다. 팔을 올린 걸 보고 어서 닦으라는 뜻으로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무슨 대갓집 양반가 아씨처럼 행동한 것 같아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다급하게 하녀들의 손에서 스펀지를 뺏어 들었다.

“제, 제가 할게요. 안 도와주셔도 돼요.”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요!”

이런 융숭한 대접은 잘 나가던 한송이 시절 이후 처음이었지만, 찰나의 전성기 시절에도 누가 제 몸을 닦아 준 적은 없었다.

한 주임은 겸손이 아니라 극구사양을 하면서 하녀들의 등을 욕조 밖으로 떠밀었다.

억센 손길에 그녀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서둘러 파티션을 욕조 앞으로 바짝 끌고 와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빙 둘렀다.

사방을 가린 후에야 안심 섞인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잠깐 물 밖으로 나갔을 때 금방 식어 차갑게 달라붙은 네글리제를 벗고 다시 욕조에 앉아 몸을 덥혔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궁 안은 꽤 썰렁했다.

‘사무실에 있던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초여름이었는데…….’

정말로 다른 세계에 똑 떨어지긴 한 모양이었다.

이상한 복장의 사람들, 신기한 모양의 수정구슬, 원룸의 네 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침실…….

김유정이 봤다던 이세계가 어쩌고 하던 만화나 소설이 문득 궁금해졌다. 마력이 없는 게 그렇게 안 좋은 건가?

한율 씨는 현자라던데 도대체 무슨 기준인 거지? 그냥 랜덤인가?

대주교가 혼잣말처럼 던진 ‘쓰레기’라는 말이 가슴을 괜스레 쿵쿵 뛰게 한다. 저 아래 어딘가에 잠들어있던 자존심이 ‘누구보고 쓰레기라고?’ 하면서 발끈하는 것 같았다.

“재인 씨, 너무 늑장 부리진 말고. 다들 기다리고 있어.”

가림판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박 차장이 재촉했다.

“아, 네!”

현실로 이끄는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들어 얼른 몸을 일으켜서 온몸을 벅벅 문질렀다. 발끝까지 씻고 거품이 묻은 몸을 헹구어 내니 틈 사이로 색이 다른 비누 하나가 쑥 들어왔다.

“머리 비누입니다.”

하녀는 친절하게도 용도를 설명해 주고는 깨끗한 물동이 두 개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눈치가 빠른 여성이었다.

“…….”

한 주임은 비누로 머리를 감아 본 적이 없어서 손에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정수리에 문질렀다.

신기하게도 마찰이 생기는 부분에서 금방 풍성하게 거품이 일었다. 거품 양도 상당히 많아서 더 문지를 필요도 없이 재빠르게 머리를 감고 새 물로 깨끗하게 헹구어 냈다.

소리만 듣고도 목욕이 끝난 걸 알았는지 눈치 빠른 하녀는 이번에는 조그만 솔 하나를 건네주었다.

생김새만 봐도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하얀 가루 같은 것이 솔 위에 뿌려져 있었지만 머리 비누의 효과를 본 직후라 이번엔 망설임 없이 입 안에 넣었다.

약간 짭짤하면서도 상쾌한 맛이 나면서 비누와 마찬가지로 몇 번의 칫솔질에 거품이 일었다. 깨끗한 물로 입까지 헹구자 언제 올려놨는지 가림판 위엔 뽀송뽀송한 수건과 목욕가운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하녀의 떡 벌어지는 센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 당장 사무실에 데려가서 일을 시켜도 공 대리보다 잘할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친 한 주임은 하녀들의 안내에 따라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번에는 처음 보는 하녀 한 명이 곁에 붙었다. 이윽고 젖은 머리 옆으로 조금 떨어진 손에서 살랑대는 바람이 불어왔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바람을 쐬어 준다. 하녀는 투명한 드라이기를 들고 있는 미용실 베테랑 원장님처럼 능수능란한 손짓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야무진 손끝에서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머리가 기분 좋게 매만져졌다. 바람이 불어오는 손을 한 주임이 연신 힐끗거리자 하녀가 상냥하게 웃었다.

“손톱만 한 마력으로도 누구나 부릴 수 있는 초급마법입니다. 사자님에 비하면 초라하겠지만요.”

머리를 말리던 하녀는 어제 중앙 홀에 없었기 때문에 한 주임의 측정 결과를 모르고 ‘아주 쉽죠.’ 하는 얼굴로 웃었으나 그녀는 차마 따라 웃지 못했다.

그 손톱만큼의 마력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머리를 말리지. 한 주임은 아주 잠깐 우울했다.

박 차장은 어느새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침대에 누워 살구잼이 들어간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자기, 내가 말했지? 여기 목욕 최고라고.”

* * *

한 주임은 얼굴을 세차게 가르는 찬바람을 느끼며 발목까지 오는 두꺼운 양털 로브를 더욱 세게 여며 쥐었다.

아으으, 우는 소리를 내며 질색하는 박 차장과 함께 마차에 오르자 그녀가 익숙하게 커튼을 걷어 올렸다.

궁 밖은 날이 따뜻했으면 탄성이 흘렀을 정도로 호화롭게 가꾸어져 있었다. 하지만 초겨울의 황량한 날씨 속에 자리한 정원은 어딘가 음울하고 선득한 기운이 맴돌았다.

편편한 돌길을 둘러싼 네모난 뜰 안에는 푸르른 초목 대신에 온갖 역동적인 자세의 역대 황제 조각상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뜰 모서리마다 보석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천사상은 성스럽기보다는 비싸고 촌스러운 장식품처럼 보였다.

박 차장이 정원수 위로 솟아난 눈부시게 하얀 석탑을 내다보며 고개를 내둘렀다.

“살다 살다 내 평생 마탑이라는 곳을 직접 가 볼 줄이야.”

“마탑이요?”

아, 참. 한 주임이 이런 걸 알 리가 없지.

박 차장은 무어라 입을 달싹였다가 곧 관자놀이를 긁었다. 막상 설명하자니 자신도 애매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마법사들 전용 사무실 같은 거? 왜 꼭 탑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보통 그래. 아우, 발 시려. 여긴 털신 같은 건 없나.”

그녀는 대충 둘러대고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까 재인 씨 씻을 때 썼던 머리 전용 비누랑 칫솔 있지. 그런 것들이 전부 먼저 왔던 이방인들이 만들어 놓은 거라더라. 우리가 몇 번째 소환이랬지, 서른다섯 번째? 4년에 한 번씩 대여섯 명이 소환된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가만있어 봐….”

“다섯 명이라고 치면 음, 140년 동안 175명이요.”

1초도 안 돼서 튀어나오는 대답에 박 차장이 혀를 내둘렀다.

이런 머리 좋은 애가 무슨 사연이 있어서 검정고시를 봤는지 궁금했지만, 한 주임보다 늦게 입사한 그녀로선 면접 때 물어볼 기회도 없었거니와 굳이 물어본 적도 없었다.

이직한 후에 부하 직원들 경력 확인차 봤던 이력서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회사의 1호점 매니저였던 한 주임은 대표가 줄줄이 오픈시키는 가맹점들의 모든 교육과 관리를 떠맡았으나,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회사에 다니는 최고참에 속하는 직원이었다.

외부에서 영입해 온 염 부장이 그런 한 주임을 휘어잡으려고 얼마나 닦달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대표와 친해 보이는 한 주임을 살살 꼬드기며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한 주임은 유독 뻣뻣하게 굴었다. 저처럼 누구에게나 살가운 성격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염 부장은 대표가 한 주임을 딱히 예뻐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난 뒤로는 툭하면 대놓고 부려 먹었다.

박 차장은 스스로를 사무실이 적당히 굴러가도록 돕는 윤활제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일 잘하는 한 주임에게 자연스럽게 업무를 몰아주되, 과할 때는 적선하듯 거들어주고 고마움을 받는.

‘무능한 상사의 자존심도 세워주고 유능한 부하 직원의 고충도 들어주는 눈치 빠른 중간 관리자.’

자신을 평가한다면 그것 말고 더 정확한 건 없었다.

공 대리 그놈이 입사하고 얼마 안 있어 한 주임한테 치근덕대면서 전공이 뭐였냐 물어봤을 땐 저도 모르게 공 대리를 불러 필요도 없는 일을 시킨 적도 있었다.

이 미련한 곰탱이 같은 애가 이런 내 배려를 알려나 몰라. 박 차장이 남몰래 눈을 흘기면서 샐쭉 웃었다.

“하여간 암산 귀신이라니까. 아무튼, 먼저 왔던 사람들이 나라를 발전시켰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이것저것 엄청난 공을 세웠다나 봐.”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글쎄…. 나도 물어봤었는데 3황자가 대답을 안 해주더라고. 아, 3황자가 누구냐면, 이따 봐봐. 참고로 유정 씨는 핸드폰이 먹통이라서 사진을 못 찍는 게 천추의 한이라고 하더라.”

“잘생겼나 봐요.”

한 주임은 안 봐도 알 것 같은 김유정의 분노에 찬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박 차장이 자못 심각하게 한 주임의 어깨를 눌렀다.

“나 결혼한 거 비밀이다?”

“네?”

“아이, 농담이야. 그 정도로 탐나게 생겼다 그거지.”

“…….”

반은 농담이었건만 가만히 저를 쳐다보고 있는 한 주임과 눈이 마주쳤다.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농담이라니까, 하는데 한 주임의 표정이 금방 먹먹해졌다.

“왜?”

“우리… 돌아갈 수는 있는 거래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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