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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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청소를 하고 오긴 했는데, 마물의 숫자가 늘어난 모양이라 예정보다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그대들에겐 미안하지만 조금 빠듯하게 일정을 잡았으니 잘 따라와 주면 고맙겠어.”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말을 마친 그는 운영팀을 잠시간 검토하듯 훑어보다가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종 하랑이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아, 하더니 몸을 돌려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 저녁에 황태자 전하를 포함한 황자, 황녀들과 만찬이 예정되어 있으니 다들 기대해도 좋아. 그쪽 표현으로는 환영식이라고 하던가?”
야닉은 마지막에서야 근사한 미소를 하사해 주고는 긴 상의 자락을 날리며 밖으로 나갔다.
뒤따르던 하랑이 갈색 주근깨가 빽빽한 광대뼈를 한껏 올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주인님께선 이방인들이 쓰는 표현을 무척 잘 아세요. 십 년이나 그들과 어울리셨으니까요! 우리 영지 안에는 여러분들과 같은 출신들이 많이 살아요!”
“하랑.”
계단을 내려가던 야닉이 재촉하듯 부르자 하랑은 이크, 하며 호들갑스럽게도 뛰어나갔다.
마탑 안에는 기획운영팀 여섯 명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봤지? 내 말 맞지? 3황자도 스물아홉 살이래. 재인 씨랑 동갑이야. 웬일이니, 진짜.”
“그냥 미쳤다…. 얼굴이 미쳤다. 심지어 북부 대공이야.”
뚜벅거리는 소리가 멀어지자 박 차장과 김유정이 거의 동시에 흥분을 쏟아 냈다.
그들은 함께 열광해 줄 사람을 모집하듯 한 주임의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난리였지만, 그녀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내며 응답할 뿐이었다.
“아…. 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두 여자는 김이 샜다. 옛날부터 한 주임은 연예인에 별 관심이 없었다.
“와꾸 그거 얼마 안 간다니까요? 아 진짜 두 분이 뭘 모르시네. 남자는 와인이라고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려요. 안 그래요, 부장님?”
공 대리가 한심하다는 듯이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올리고 삐딱하게 등을 기대자 김유정은 그런 공 대리가 더 한심하다는 얼굴을 했다.
“대리님. 황자님은 나이 들어도 꽃중년이겠지만, 대리님은 초콜릿처럼 줄줄 흘러내릴 상이에요….”
“뭐?”
손바닥으로 얼굴 앞을 훑어 내리는 시늉까지 하는 김유정을 황당하게 보던 공 대리가 벌떡 일어났다.
“와. 내가 참아 보려고 했는데 유정 씨, 아니 김유정. 너 어제부터 은근히 막 나가더라? 부장님한테 큰소리치질 않나, 나한테도 뭐? 공갈 대리 어쩌고 하지 않았냐? 이게 평소에도 버르장머리 없는 거 봐줬더니만 지 혼자 신나 가지고 이젠 위아래도 안 보여? 야. 직급 떼도 내가 너보다 네 살이나 많은 건 아냐?”
높아진 언성에 김유정이 지지 않고 매섭게 노려보며 따라 일어났다.
“직급 떼면 뭐! 뭐 어쩔 건데요, 공지욱 씨? 나이 들어서 XX 좋겠네요. 그렇게 나이 따질 거면 한 주임님한테 누나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뭐? 공지욱 씨? 너 말 다 했어?”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한 주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박 차장이 선수를 쳤다.
“둘 다 그만해. 둘이 싸우면 누구 손해야, 너네 여기 있는 사람들 말고 의지할 사람 더 있어?”
날 선 목소리에 공 대리와 김유정은 한 풀 기가 꺾여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염 부장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기 젖먹이 떼놓고 온 박 차장보다 속 끓는 사람 있으면 계속 성질들 내 봐, 어디.”
“!”
박 차장을 제외한 모든 직원이 일동 숙연해져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가장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였을지도 모른다.
염 부장은 드물게도 어른다운 모습을 보이곤 쯧, 하고 고개를 돌렸다.
기가 팍 죽은 공 대리와 김유정을 보던 이한율이 박 차장에게 어색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도 아예 못 돌아간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니라고 하니까요. 돌아갈 수만 있다면 소환됐던 당시로 간다고도 했고….”
“한율 씨. 위로해 주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희망은 품지 마. 깨진 석판에 한 줄 쓰여 있던 거라며.”
박 차장이 오히려 이한율을 다독이듯 힘없이 웃었다.
그때 침체한 분위기를 돌파하고자, 화제 돌리기의 달인인 한 주임이 번뜩 장기를 발휘했다.
“근데 부장님 어제 안 씻으셨어요…? 옷이….”
“뭐? 씻었어! 옷만 똑같은 거 입은 거야. 어디서 재롱잔치 같은 옷만 들이밀어 가지고….”
염 부장이 풀쩍 뛰는 걸 본 공 대리가 소매가 나풀거리는 남성용 블라우스를 풀풀 흔들어 댔다.
“부장님한테는 좀 부담스러운 디자인이긴 하죠. 레이스 잘 받는 남자가 어디 흔합니까. 저 정도는 돼야….”
“공 대리, 차차차 대회 나가는 댄스스포츠 선수 같애. 머리는 또 왜 그래, 어디서 혼자 비 맞고 왔어?”
향유를 과하게 발라 번들거리는 공 대리의 머리를 보며 김유정이 코를 먹으며 웃어 대고, 이한율은 자기도 저렇게 보이나 하고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운영팀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한 주임은 빙긋 웃으면서 이 웬수 같은 사람들이라도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새삼 안도했다.
* * *
방한복을 입은 하녀 두 명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운영팀을 맞이했다.
한 주임을 모시러 왔다는 그녀들은 어제 그녀가 쓰러져서 부득이하게 제일 가까운 본성 침실로 모셨으며, 오늘부터 머물 별궁 숙소를 안내하겠다고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었다.
운영팀은 앞서가는 하녀들을 따라 별궁으로 걸었다.
오후가 되자 희뿌연 구름에 해가 가려져 아까보다 더 쌀쌀했다. 한 주임은 마탑 안엔 별다른 난방 도구도 안 보였는데 꽤 훈훈했던 것을 떠올리다가 이내 재채기를 했다.
마차가 지나온 길을 따라 걷다가 사자 모양의 석상을 끼고 하녀들은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
본궁 앞 정원에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정돈된 길을 따라 걸으면 나오는 별궁은 본궁의 삼 분의 일가량 되는 크기의 성이었으나 그마저도 충분히 크고 화려했다.
“별궁에는 2황자님과 3황자님, 그리고 7황자님께서 머물고 계십니다. 사자님들의 숙소도 이곳 2층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녀 중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이가 설명하자 김유정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속살거렸다.
“황태자는 본궁에 있대요. 어제 황제 뒤에 있던 첫 번째 금발 꽃중년이요.”
“어…….”
첫 번째와 두 번째 남자가 금발이었던 것이 기억났지만 흐릿한 얼굴은 가물가물했다.
3황자를 너무 쳐다봤나. 약간 민망해졌다.
잠시 후 별궁에 들어선 일행은 가운데에 있는 계단을 올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남녀가 갈라졌다.
내부구조는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처럼 계단을 올라 반대편까지 걸으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똑같은 모양의 계단이 하나 더 나오는 현대식이었다.
ㅁ자 형태로 양쪽에 똑같이 생긴 계단이 있어서 좌우 구분이 헷갈렸고, 심지어는 모든 층이 전부 비슷하게 생겼다.
한 주임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따라가는 방향과 소요 시간을 기억하려 애썼다. 별궁은 백화점처럼 친절하게 층마다 표지판이 붙어 있지도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그녀는 지독한 방향치였다.
선수 때부터 늘 정해진 이동 경로로 인솔자의 뒤만 단체로 졸졸 따라다녔으니 주위를 살피는 습관을 들이질 못한 탓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카페에 출근할 때는 낯선 길을 헤맬까 봐 익숙해질 때까지 한 시간씩 일찍 출발하기도 했다.
마탑에서 별궁까지 오는 길에도 그녀는 부단히 암기 중이었다. 석탑에서 3분 직진, 오른쪽으로 2분 직진, 사자 석상을 끼고 오른쪽으로 5분 직진….
평소에도 중간에 감을 잃으면 왔던 길을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는 수준이었으니, 이쯤 되면 말 다 한 것이다.
앞서 걷던 나이 든 하녀가 두리번거리는 한 주임을 보고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혼자 나가지 말고 종을 울려 달라는 배려를 해 주었다.
한 주임은 일정한 간격마다 똑같이 생긴 문 중에 제일 안쪽에 있는 방을 안내받았다.
배정받은 방 옆으로는 박 차장과 김유정의 방이 나란히 있었다. 두 사람은 어제 한 번 왔었다고 조금도 망설임 없는 날랜 걸음으로 각각 쏙 들어갔다.
“…….”
한 주임은 딱히 내일이 되어도 저들처럼 잘 찾아 들어갈 자신은 없었다.
“쉬고 계시면 본궁으로 가시기 전에 치장을 도와드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이계의 옷은 미리 방 안에 두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종을 울려 주세요.”
하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방은 오늘 눈을 떴던 화려한 침실보다는 좀 더 작고 담백한 축에 속했으나 어지간한 5성급 호텔과 맞먹을 정도로 충분히 고급스러웠다.
그녀는 문 옆에 있는 고리에 에코백을 건 뒤, 방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연결된 모든 문을 열어 보고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감상에 빠졌다.
선수 시절 원정을 다닐 때나 회사 출장 때마다 묵었던 호텔에 온 기분이었다. 물론 그보다는 넓고 고풍스러웠지만.
“하아…….”
방을 전부 둘러본 뒤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안온한 평화를 느끼고 있던 것도 잠시, 어디선가 거칠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으로 봐서는 박 차장 방인데 쓰러진 저를 보살피느라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내가 챙겨 드려야지.’
죄송한 마음에 한 주임은 굳게 다짐했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느지막할 때까지 기절해 있었으니 그다지 잠이 오진 않았다. 그녀는 문득 길을 외우느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별궁 풍경이 궁금해졌다.
해외에 갔을 때도 호텔과 버스, 연습장과 경기장 외에 다른 곳은 구경도 못 했다.
다른 선수들이 까르륵거리며 삼삼오오 모여 저녁 관광을 하러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한송이는 창문으로 호텔 밖 야경만 실컷 봤었다.
미성년자에 유아독존이었던 그녀를 데리고 나갈 사람은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한 주임은 이곳에서까지 망연하게 창밖만 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잠든 박 차장이나 소란스러운 김유정과 함께 나가긴 껄끄럽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협탁 위에 놓인 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곧 거두었다. 조금 전에 인사를 하고 나간 하녀를 다시 불러 성가시게 만드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직 해가 떠 있고 열심히 길을 외웠으니 제 머리를 한 번쯤은 믿어봄직도 하지 않을까?
의문은 어느새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변해서 기어이 혼자서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