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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8화 (8/155)

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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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두 개 층을 빙빙 돌아 내려와서 메인 홀을 지나 쭉 걸어가면 멀리서도 보이는 커다란 아치형의 양 문이 나오고, 그 문을 열고 나가면 하얀 기둥들이 세워진 개방된 회랑이 네모난 뜰 전체를 에두르고 있다.

한 주임은 하얀 입김을 뱉으며 안뜰을 가로 지나 별궁 밖으로 나갔다.

바스러지는 잎사귀들이 스산하게 매달려 있는 큰 나무 아래, 공 대리가 혼자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망했다.

“한 주임!”

공 대리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그녀는 달갑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갔다. 뭉실한 담배 연기가 닿지 않을 정도까지만 가까이 간 그녀가 형식적으로 말을 걸었다.

“왜 혼자 나와 계세요?”

“염 부장님 담배 다 떨어졌대요. 나도 두 개밖에 안 남아서.”

두 개비면 하나는 나눠 줄 법도 한데, 공 대리는 그마저도 아까웠는지 치사하게 혼자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혼자 타고 있는 장초를 얼른 한 모금 더 소중하게 쭈욱 빨아들였다.

“여기도 담배는 있지 않을까요? 이방인 중엔 흡연자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현대식 모양을 한 칫솔을 떠올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어제저녁에 남자 하인한테 물어봤는데, 호박잎을 말아 태우라고 하더라고. 그 짓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서.”

“아, 네……. 그럼 마저 피우세요. 저는 이만….”

딱히 별다른 얘깃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진 않아서 몸을 돌리는데 등 뒤에서 어디 가요? 한다.

“유, 유정 씨랑 산책하기로 해서요.”

그가 따라붙지 않을 유일한 변명거리를 떠올려 말했더니 예상대로 걸쩍지근한 반응이 돌아왔다.

“같이 한 바퀴 돌려고 했더니. 씁. 주임님이 말 좀 잘해 봐요. 걔 지금 완전 막장이야. 쪼끄만 게, 어으.”

몸서리를 치면서도 여전히 등을 나무에 붙이고 있는 공 대리를 피해 한 주임은 다시 별궁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쫓아올까 봐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회랑 복도 끝에 있는 작은 오솔길로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급속도로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냥 방에 있을걸.

28살의 공지욱은 다른 중소기업에서 경력직으로 이직한 2년 차 대리였다.

듣기로는 전 직장에서 1년 정도 주임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일하는 걸 보면 3년 차 주임인 자신보다 업무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공 대리는 처음 입사하고 난 얼마간은 성가실 정도로 지분거렸다.

뜬금없이 손목이 왜 그렇게 가느냐며 덥석 쥔 적도 있었고 밤 열두 시에 뭐 하냐는 메시지도 두어 번 받았다.

주말 저녁에 집에서 티비를 보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무심코 받았더니 혀가 꼬인 목소리로 ‘야, 거봐. 내가 받는댔지. 얘도 관심 있다니까.’ 하며 주절거리는 것을 듣고 얼른 끊어 버렸다.

이 나이 먹도록 남자친구 한번 없었던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부끄럽지도 않았다. 별로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고.

카페에서 일할 때는 나이도 어릴 때고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연락처를 물어보는 남자들에게 전부 남자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본사에 들어간 후 거래처 사람들과 미팅하고 난 뒤에 개인적으로 따로 보자는 연락도 몇 번 받은 적 있었지만, 잠깐 고민하다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업무적으로 불편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공 대리가 한창 귀찮게 굴 때 박 차장이 남편 후배 한 명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는데, 첫인상도 나쁘지 않고 신사적이어서 세 번이나 만났다.

설레진 않았어도 편안해서 이대로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건 잠시뿐이었다.

세 번째 보던 날 이자카야에서 취기가 오른 그가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살피러 갔다가 벽 코너에서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한 주임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버렸다.

[아이 그럼. 형이랑 형수님한테는 내가 크게 쏴야지, 저렇게 예쁘신데. 근데 누구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낯이 익은데… 누구였더라?]

그날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한송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올까 봐 테이블 위에 오만 원짜리 한 장을 올려놓고 줄행랑을 쳤다.

전화도 메시지도 모두 차단하고 다음 날 박 차장이 누구 씨가 무슨 실수 했냐며 달라붙는데 끝까지 대답을 못 했다.

그 이후로 박 차장이 누구를 소개해 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한 주임은 의도치 않게 소위 말하는 ‘모쏠’이 되었다.

* * *

야닉은 별궁 3층에 있는 제 방에서 전서구에 영지로 돌아가는 일정이 적힌 쪽지를 매달아 창문 밖으로 날렸다.

잘 훈련된 흑비둘기가 수도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에서 대기 중인 그의 사병에게 도착하면 부대장이 영지로 다시 전서구를 날릴 예정이었다.

땅거미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먼 하늘을 보며 창문을 닫으려던 그는 문득 별궁 중정으로 뛰어 들어오는 여자를 발견했다.

방벽 위에서 저 멀리 날아가는 까만 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와이번의 종류와 머릿수까지 알 수 있는 그는 어렵지 않게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의 정체를 알았다.

어제 마력 측정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진 이방인이었다.

안 그래도 야닉은 내일부터 시작되는 마나 운용 훈련을 앞두고 마력이 티끌만큼도 없던 저 이방인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 중이었다.

마법을 잘 부리지 못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황실의 노골적인 차별을 지켜봤기에 어떻게든 그녀는 제 역할을 할 수 있어야만 했다.

중정으로 달음질치듯 들어온 여자는 연신 뒤를 돌아보다 뒤뜰로 금방 사라졌다.

무척이나 수상쩍은 행동에 금안이 의심스럽게 번뜩였다. 뛰어내려서 뒤를 밟을까 생각하며 창틀에 손을 짚던 중, 문득 그가 동작을 멈췄다.

“공 대리…랬나?”

한 주임이 뒤뜰로 사라지고 금방 사내 하나가 중정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앞서가던 한 주임을 뒤쫓는 모양새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야닉은 어제 소환 장소에서 과할 정도로 여자의 옆에 달라붙어 있던 이한율과 지금 짜증 어린 표정의 공 대리를 번갈아 떠올렸다.

아무래도 치정극인가 싶다. 뭐, 그럴 만한 생김새를 가진 여자였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시 볼 테니.’

그는 작은 여흥 거리 하나가 생긴 듯 피식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포도주잔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그 옆에 있던 종을 가볍게 흔들자 금방 하녀장이 들어 왔다.

“씻을 테니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그는 양팔에 있는 구속구를 풀었다.

테이블 위에 하나씩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동시에 몸속 깊은 곳에서 급격하게 화기가 솟구쳐 오른다.

야닉은 긴 숨을 내뱉으며 스멀거리는 힘을 심연으로 계속 끌어 내렸다.

찬물로 몸을 식히는 것이 그나마 제일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지만 종일 물을 맞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시방편으로 채워 놓은 자잘한 구속구들은 요동치는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사흘에 한 번꼴로 부서지기 일쑤였고, 그것들이 모두 박살 나기 전에 하루에 두세 번씩 얼음장 같은 물로 몸을 씻어 내야 했다.

춥고 험난한 북부에 있을 때야 주기적으로 사냥에 나서서 마음껏 힘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만, 4년에 한 번 이방인들을 데리러 입궁하면 한 달은 꼬박 궁에 틀어박혀 지도해야 했다.

그로서는 쌓여 가는 마력들이 폭주하지 않도록 온갖 짓을 다 해야 했다. 마력은 4년 전보다 더욱 기세가 커져서 몸에 달아야 하는 구속구의 숫자가 두 배는 더 늘었다.

이번에 마물 숫자가 늘어 예정보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핑계였다.

예상치 못하게 마력이 늘어난 야닉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북부로 돌아가야 했다.

[갑작스럽게 발현한 마력이 몸을 태워 버리기 전에 주기적으로 힘을 분출하셔야 합니다.]

영지에 있는 고위 신관 알리온이 그가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자 해 준 조언이었다.

그는 10년 전부터 돌연 몸에서 마력이 솟구쳐 오르는 기이한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제때 분출하지 않으면 그것은 기어이 몸 밖으로 흘러나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까맣게 태워 버렸다.

귀에 달린 구속구까지 모두 떼어 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하인들이 욕조와 물동이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따르던 어린 하녀 하나가 얼음덩어리들이 담긴 물을 욕조에 붓기 위해 앞으로 나오다가 다른 하녀에게 곧장 제지당했다.

“새로 온 이인가 보지?”

야닉이 고개를 돌려 묻자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 화들짝 놀란 그녀가 바닥에 물을 조금 흘리고 말았다.

“예, 옙.”

귀까지 달아오른 얼굴로 바닥이 뚫어질 듯 땅만 보고 있는 이에게 그는 야단 대신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야닉은 씻을 준비를 마치고 모두 나가라고 한 뒤 남은 옷가지들을 하나씩 풀썩풀썩 벗어 던지고 욕조 안으로 발을 넣었다.

물동이 안에 가득 들어 있던 얼음들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단단한 팔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졌다.

천천히 머리 위로 붓기 시작하자 볕에 그을린 보기 좋은 몸 위로 치익, 하고 액체가 기화되는 소리가 났다. 몸에선 끓어오르는 열기에 의해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얼음물을 들이부은 뒤에야 열기가 가라앉아 차가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욕조에 차오른 미지근한 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빠르게 목욕을 끝내고 가운을 둘렀다.

풀러 두었던 구속구들을 하나씩 끼우고 있을 때 달칵 문이 열렸다. 열기가 남아 있는 욕조 때문에 보통은 목욕이 끝나고 한참 후에나 치우러 오는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녀장일 리가 없다.

아까 홍당무가 되었던 그 어린 하녀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더니 뜻밖에도 이방인의 하얀 얼굴이 열린 문 사이로 반쯤 보였다.

얼굴의 절반을 드러낸 이방인은 틈새로 야닉을 보자마자 빛의 속도로 문을 닫고 문틈에 대고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방을 착각해서……. 쉬, 쉬세요.”

암살자처럼 무척이나 날랜 행동이었다. 아까 뒤뜰로 사라지더니 언제 별궁으로 돌아왔는지 방을 잘못 찾은 모양이다.

불규칙적으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못내 신경을 긁어 댔다.

‘또 픽 쓰러지는 거 아닌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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