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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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온 한 주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착각을 해도 이런 착각을 하다니. 이곳에 와서 완전히 멍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은 한국과 달리 지면부터 1층이 아니라 바닥 다음에 1층, 그다음 2층 이런 식으로 층수를 불렀다.
숙소가 2층이니 한국으로 치면 3층인지라, 계단 입구에서부터 ‘한 층 더 올라가자.’라고 중얼거렸는데 아무 생각 없이 숙소를 지나 한 층 더 올라왔던 것이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하필이면 3황자가 가운만 입고 홀딱 벗고(?) 있을 줄이야.
‘황족 모욕죄 같은 거로 처벌받는 거 아닌가.’
언뜻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빠르게 걸었다. 계단까지 올라오느라 가뜩이나 기진맥진한 상태인데 자꾸만 하체에 힘이 풀렸다.
은퇴하긴 했어도 매일같이 훈련했던 과거 덕에 남들보다 체력이 좋은 편이었는데도, 어제오늘 한 주임은 이상하리만큼 맥을 못 추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소환되었던 어제 오후 6시쯤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다. 만 하루를 꼬박 굶었으니 기운이 없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도 축축 늘어지는 팔다리와 오싹한 한기에 어디 탈이 나도 제대로 났다 싶었는데, 원인을 찾고 나니 아픈 게 아니었다는 안도의 한숨이 짙게 터졌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인데 이 낯선 곳에서 아프면 저만 고생이다.
온종일 굶은 것치곤 이상하게 전혀 배고프진 않았지만 하녀들에게 부탁해서 주전부리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판단을 마친 그녀가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 앞에 섰다.
갑작스럽게 어지럼증이 인 것은 그때였다. 비틀대던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리더니 난간을 잡을 새도 없이 그대로 기울어졌다.
“아!”
한 주임은 찰나의 순간에도 눈 앞에 펼쳐진 기다란 계단을 보고 못 해도 전치 5주라고 생각하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조심…!”
고꾸라지던 몸이 일순간 멈췄다. 강한 힘이 허리를 확 감싸 올리는 느낌에 한 주임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본 적이 있던 팔찌가 채워진 남자의 팔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에게 매달려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두 다리가 대롱거렸다.
“후……. 이방인, 괜찮아?”
귓가에서 가깝게 들리는 저음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녀는 공중에 뜬 몸이 불안해서 손을 뻗어 단단한 팔뚝을 잡았다.
남자의 팔이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느낌과 동시에 오한으로 가득 찼던 몸에 순식간에 열기가 퍼져 나갔다.
“!”
야닉은 순간 영혼까지 빼앗길 듯 자신의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어떠한 구속구도 이처럼 강하고 방대하게 힘을 흡수한 적이 없었다.
이방인은 마치 거대한 회오리로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몸에서 빠져나가는 화기를 느끼다가 넋이 나간 얼굴로 천천히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몸이 떨어지자 설원 한가운데서 그리즐리베어 스무 마리를 전부 잿더미로 만든 직후에 느꼈던 때와 비슷한 감상이 찾아왔다.
“……?”
“가, 감사합니다.”
한 주임은 목욕가운 하나만 입고 있는 야닉을 보지 않으려고 그가 서 있는 방향에서 몸을 틀어 엉뚱한 곳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싹했던 한기가 사라지고 손에선 갑자기 온기가 맴돌았다. 그녀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머릿속에는 온통 황족 모욕죄에 대한 처벌 생각뿐이었다.
“잠깐, 잠깐만.”
야닉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성큼 내려가 한 주임의 앞을 가로막았다.
“예?”
몇 계단 아래인지라 한 주임보다 시선이 낮아지는 바람에 대충 여민 허리끈 안으로 단단한 복근이 슬쩍 보였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들어 황자를 쳐다봤다. 가까이서 본 얼굴이 남자다우면서도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무례를 용서해.”
말과 동시에 야닉이 한 주임의 두 손을 잡아 올렸다. 그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아, 또 훈기가 돈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두 손을 꼬옥 감싸 쥐는 느낌이 신기했다. 아까 팔을 잡았을 때처럼 따뜻한 열기가 발끝까지 잔잔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하…….”
기분 좋은 따스함이 온몸을 녹일 듯이 에두르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손이 툭 떨어졌다. 한 주임은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가 방금 제가 몹시도 민망한 소리를 낸 것 같아서 입을 틀어막았다.
황자는 두 손을 그대로 들고 있는 채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일 때, 어디선가 꼬르륵거리는 민망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원초적 욕구가 조용한 공간에서 적나라한 소리를 내자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배를 감쌌다.
“아. 그게…….”
공 대리였으면 아마 석 달 열흘간은 놀려 먹었을 거다. 그런데 눈앞의 황자는 정신을 차린 듯하더니 웃기는커녕 금방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주위를 살피다가 멀리서 걷고 있던 하녀를 곧장 불렀다.
“이방인을 방으로 안내하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걸 준비해 줘.”
“네, 황자님.”
“그대는….”
한 주임에게 시선을 돌린 야닉은 잠시 관찰하듯 그녀를 보다가 조금 이따 보자며 짧게 인사를 하고 성큼 사라졌다.
하녀를 따라 방으로 돌아온 한 주임은 민망함도 잠시 급격하게 밀려드는 공복감에 로브를 벗을 생각도 없이 축 늘어졌다. 그 와중에도 손은 여전히 따끈했다.
신기하게도 그와 닿은 뒤부턴 오싹거림이 싹 사라지고 말초부터 피가 도는 느낌이 생생했다.
‘체온이 높은 사람인가…?’
이상한 나라에서 생기는 이상한 일들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됐기에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고심에 빠질 기운도 없었다.
다행히 방까지 데려다주었던 하녀가 금방 쟁반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손잡이가 금색으로 장식된 은쟁반 위에는 어제 박 차장이 맛있게 먹던 살구잼 쿠키와 고풍스러운 무늬의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하녀는 침대 근처에 있는 자그만 원탁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식전이라 간식으로 준비했다는 말을 남긴 뒤 물러났다.
한 주임은 주저 없이 얼른 의자에 앉아 쿠키를 한입에 넣었다.
달콤한 것이 입에 들어오자 금세 식욕이 확 돈다. 열심히 오물거리며 주전자 도기를 열자 다채로운 베르가모트 향이 코를 찔렀다.
그녀는 충분히 우러나온 붉은 찻물을 확인한 뒤 거름망을 빼고 잔에 가득 따랐다.
“아. 좋다.”
얼그레이는 그녀가 카페에서 일할 때부터 즐겨 마셨던 제일 좋아하는 홍차 종류였다.
눈앞의 홍차는 완벽한 얼그레이는 아니었지만 제법 풍미가 좋았다. 진하게 우러난 찻물에 코를 가까이 대고 여운을 즐기며 쿠키를 모두 먹어 치웠다.
장장 십여 년간 길들인 절식 습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찻물 한 모금까지 깨끗하게 비우니 포만감이 밀려온다.
그녀는 아쉬움 없이 테이블 근처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모아 접시 구석에 다소곳이 모았다.
잔부스러기만 남은 빈 접시를 보며 너무 먹었나 약간 걱정하고 있을 때 밖에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다 싶어 한 주임은 얼른 쟁반을 밖에 내놓고 들어왔다.
꽤 많은 인원이 분주하게 걷는 것 같은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옆방부터 차례대로 문이 열고 닫힌다.
가만히 문을 보고 있으니 곧 한 주임의 방에도 짧은 노크와 함께 하녀 셋이 들어 왔다.
“로브를 벗고 이쪽으로 오세요.”
한 주임의 또래로 보이는 그녀들은 각자 들고 온 꾸러미들을 차례대로 드레스룸으로 가져가 척척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드레스룸 앞에서 서성거리는 등을 가볍게 안으로 밀어 넣고 몸에서 하나씩 옷을 벗겨냈다. 익숙지 않은 손길에 그녀의 온몸이 뻣뻣해졌다.
저녁 만찬을 위한 치장이 시작되었다.
한 주임은 고개를 빠끔 내밀어 창문 밖으로 아직 푸르스름한 하늘을 확인했다.
가뜩이나 해가 짧은 계절이라 초저녁도 안 된 것 같은데 하녀들의 움직임은 벌써 늦었다는 것처럼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황녀님들께선 점심 식사 직후부터 단장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녀 하나가 나무라는 말투로 한 주임의 몸을 바로 세우며 말하는 모습이, 꼭 이방인들이 늑장을 부려 준비가 늦어졌다는 것처럼 퉁명스러웠다.
“…….”
한 주임은 이곳에 온 지 이제 겨우 이틀인데 치장에 얼마큼의 시간이 드는지 알 리가 있겠냐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똑똑.
준비를 마친 그녀는 바스락거리는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잡고 박 차장의 방문에 노크했다.
“차장님, 끝나셨어요?”
몇 번 노크해도 응답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드레스룸 쪽에서 박 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어머!”
막 단장을 끝낸 박 차장이 밖으로 나오다가 한 주임을 발견하고는 열띤 반응을 보였다.
한 주임은 가느다란 목선이 돋보이도록 쇄골 바로 아래까지 일자로 드러난 샛노란 벨라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 꼭 맞게 조여진 등의 매듭 덕분에 래시가드를 입은 것처럼 상반신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허리 아래로 풍성하게 펼쳐진 치마가 상체와 대조되어 사랑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찰랑거리는 머리는 반으로 나누어 윗부분을 동그랗게 말아 올린 후 아랫부분은 향유를 발라 차분하게 떨어뜨렸다. 동그란 머리 부분에는 우윳빛 진주알들이 앙증맞게 나란히 박힌 크라운이 꽂혔다.
그녀는 일자로 뻗은 어깨와 허리를 편 곧은 자세 덕분에 말라 보이기는커녕 진열장에 전시된 마네킹처럼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재인 씨, 완전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주인공 같애! 옷도 어쩜 딱 맞네?”
치장을 해 주던 하녀 중 한 명이 ‘황녀님의 드레스가 꼭 맞네요.’ 하며 미소 짓던 것이 생각났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매우 어색했었는데 박 차장 반응을 보니 약간 부끄러워졌다.
“차장님도 너무 예뻐요. 음.”
화답하듯 꺼낸 말을 잇지 못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다가 그냥 엄지를 척 내밀었다. 이럴 때면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살가운 말 한마디 못 하는 성격이 원망스럽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