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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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차장은 약간 살집이 있는 편이었는데, 가슴 바로 아랫부분에 오목하게 묶인 끈 아래로 고풍스럽게 늘어 떨어뜨린 시폰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렸다.
“셀카 생각이 간절하네. 나 이런 드레스는 결혼할 때 입어 보고 처음이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치맛자락을 날리는 박 차장이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한 주임은 그녀가 가족 생각으로 우울해하지 않도록 연신 머리나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조금 뒤엔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의외로 과감한 차림새를 한 김유정이 나타났다.
복장 규정이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에 평소 맨투맨이나 펑퍼짐한 스트릿 패션을 즐기던 김유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깊이 파인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박 차장과 한 주임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오… 유정 씨, 보기보다…….”
박 차장은 감춰져 있던 입체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 김유정의 상체를 보며 연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160cm가 조금 안 되는 김유정은 푸른 머메이드 드레스에 높은 굽을 신고 머리까지 틀어 올려 평소보다도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매일 쓰고 있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도 벗어 던졌다.
“아, 핸드폰 진짜! 인간적으로 카메라 정도는 작동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 * *
세 여자는 마차를 타고 어둑해진 정원을 지나 본궁으로 이동했다.
하녀들의 안내에 따라 1층에 마련되어 있는 화려한 홀의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염 부장과 공 대리, 이한율이 보였다.
남자들은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모두 비슷한 형태의 고전 의상을 입고 있었다.
“엥? 뭔 모차르트예요?”
김유정이 폭소하며 예의 없는 손가락질로 가리킨 곳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나폴레옹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공짜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항변했다.
“우리가 고른 거 아니거든!”
그는 곧바로 억울하다는 얼굴을 하며 뻔뻔하게 앉아 있는 염폴레옹을 쳐다봤다.
“원래 이런 데 오면 이렇게 입어 줘야 하는 거야.”
염 부장은 기대감에 고른 의상이 너무 튀는가 싶어, 평범한 복장을 하고 온 공 대리와 이한율을 굳이 저처럼 비슷하게 갈아입힌 참이었다.
오십 평생 처음으로 신어 본 하얀 타이즈의 감촉이 너무 신기해서 다리를 긁는 척하며 몰래 슬슬 문지르기도 했다.
이토벤은 귀까지 빨개져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나마 준수한 얼굴과 피지컬을 가진 그가 제일 봐줄 만한 정도였다.
“야, 김유정. 그러는 너는 무슨 베르사르의 장미처럼 입은 거 아니냐?”
“베르사유요, 대리님.”
“어디 봐봐!”
공 대리가 이한율의 지적을 무시하며 두툼한 모피를 두른 세 여자를 향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김유정은 한쪽 입꼬리를 픽 틀어 올리며 거만한 자세로 코트 단추를 풀었다.
“기절하지나 마요.”
김유정이 고고한 얼굴로 모피를 벗어 뒤로 건넨 것을 한 주임이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문 앞에 있던 시종이 냉큼 다가와서 정중하게 코트를 가져가자 박 차장과 한 주임도 본인들 것을 벗어 공손하게 건넸다.
“와, 다들 진짜 예쁘세요…….”
이한율은 멍한 얼굴로 ‘다들’이라고 했지만, 박 차장은 들어올 때부터 한 주임만 보고 있던 그를 진작 알아채고 있었다. 저, 저 귀여운 녀석. 박 차장이 속으로 웃었다.
“이야, 늬들 완전히 환골탈태했다? 아주 몰라 보겠는데? 야, 김 사원아 너는 평소에도 이렇게 좀 입고 다니지. 허구한 날 티샤쓰 쪼가리만, 얘는 또 왜 이래? 야, 공 대리!”
염 부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는 공 대리의 등을 퍽퍽 쳤다. 박 차장이 그런 공 대리를 보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부장님, 공 대리 유정 씨한테 완전 뿅 간 것 같은데요?”
“네? 차장님 무슨 그런 심한 말을 하세요?”
김유정이 날파리를 쫓아내듯 손짓하며 펄쩍 뛰는 데도 공 대리는 아직도 충격을 받은 얼굴 그대로였다.
“제2황자 저하이신 시즈 오베라 님 드십니다.”
아직 홀 입구에 서 있는 여자들 뒤로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시즈가 웃으며 들어왔다.
“이런. 신사분들께서 숙녀분들의 에스코트를 잊으셨나 보군요. 부디?”
감청색 정복을 입고 목 부근에 에글릿이라 부르는 별 모양의 사파이어 브로치를 단 시즈는 백금발의 서글서글한 미남자였다.
그는 숙녀들 한 명 한 명의 손등에 모두 입을 맞춘 후 매력적인 미소를 흘리며 제일 연장자인 박 차장에게 팔을 들어 올렸다.
놀란 것도 잠시, 박 차장은 상기된 얼굴로 어머! 하고는 다소곳이 손을 올렸다. 에스코트를 받은 채로 그녀는 2황자가 손수 빼 준 의자에 앉았다.
“원래는 여성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키스를 하는 건데, 그대들은 전부 속았어.”
곧바로 들어 본 적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한 주임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곧장 걸어오고 있는 야닉을 보고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맹세코 아까 슬쩍 봤던 탄탄한 복근 때문이 아니었다.
“제3황자 저하이신 야닉 리버스 님 드십니다.”
그 역시 한 주임의 옆으로 다가와 손을 내어달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으나 시선은 노란 실크 장갑을 낀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머뭇거리던 손을 잡아 제 팔에 올렸을 때 야닉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피부접촉으로만 마력이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저는, 저는요?”
야닉과 함께 자리로 가는 한 주임을 보며 김유정이 울상을 지었다.
모차르트 옷을 입은 공 대리가 삐걱거리며 주춤대는 사이, 7황자의 입장을 알리는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 대리는 멀리 보이는 마지막 황자마저 꽃미남인 것을 목격하고는 모두 포기한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김유정은 제게 오는 연갈색 머리의 아이돌 같은 미소년에게 사르르 마음이 녹아 그가 손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팔짱을 끼고 끌어안았다.
이든 와이어트라는 이름을 가진 7황자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다가 큭큭거리는 시즈를 보자마자 서둘러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뒤이어 여섯 명의 황녀들이 각자 시종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줄줄이 들어섰다.
그녀들이 입은 드레스들은 모두 현대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시대가 마구 섞인 디자인이었는데, 개중에는 연말 시상식에서 볼 법한 요즘 스타일의 여배우 드레스 비슷한 것도 있었다.
한 주임은 포토라인 앞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 대는 기자가 된 기분으로 그들을 구경하다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황녀들은 하나같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마르고, 또 냉랭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중년의 황태자와 황태자비였다.
다른 황자들이 모두 짙은 남색의 제복을 입은 반면, 황태자는 양쪽 어깨에 금장이 달린 하얀색 제복을 뽐내듯 드러내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입장했다.
황태자 체이스는 평소에는 하지 않는 금색 커머밴드까지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 기분을 만끽 중이었다.
“레비탄 제국의 고귀한 황태자 전하와 비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가 등장하자 자리에 있던 전원이 일어나 예를 표했다. 운영팀 6명의 주춤거리는 인사를 받으며, 황태자 부부는 상석으로 이동해 시종이 끌어 준 의자에 우아하게 앉았다.
숨도 쉬기 어려운 압박감은 황태자가 아닌 옆에 있는 황태자비의 서늘한 분위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비탄의 황자, 황녀들이 모두 모인 자리는 매우 화려한 공간에서 본 적도 없는 요리들이 즐비한 만찬회였으나,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가족답지 않은 거리감이 만연했다.
“이방인분들 덕에 우리가 이렇게 식사를 다 하네요.”
박 차장보다 좀 더 연륜이 있어 보이는 1황녀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상하게 스테이크를 잘랐다.
누군가의 답변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곧바로 입에 고기 조각을 넣고 포도주를 마신다. 그에 박 차장이 화답하듯 조심스럽게 예의를 차렸다.
“저희는 배려해 주신 덕에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나, 그렇게 느끼셨나요? 세상에. 상냥도 하셔라.”
1황녀는 고전 영화 속에 나오는 귀부인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어색하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관전하던 2황자 시즈가 박 차장에게 선뜻 말을 걸었다.
“야닉에게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앞으로 가실 곳은 무척이나 고되고 위험한 곳입니다. 머지않아 저희를 원망하게 될걸요.”
“시즈.”
황태자가 싸늘한 얼굴로 그만하라는 듯 눈치를 주자 시즈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이죽거렸다.
“아리따우신 분들께서 고생하실까 봐요. 전하.”
“2황자께선 기어이 열네 번째 정비를 들이시려고 하는군요. 별궁에 그녀들의 침실 말고도 빈방이 더 남아 있던가요?”
황태자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은 말엔 다분한 혐오가 담겨 있었다.
한 주임은 이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아까 쿠키로 배를 채워 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은 훌륭했지만 여기 있는 황족들의 인성은 그다지 훌륭해 보이진 않았다.
날 선 비난에도 시즈는 일말의 타격도 없었다. 아마도 쇠심줄 같은 철면피거나, 익숙해서거나.
“비 전하께서 제 부인들을 이렇게 생각해 주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방이 모자라면 저도 야닉을 따라 아크만 요새로 갈까요?”
“……먼저 실례하겠어요.”
황태자비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탁 소리가 나도록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자 동시에 황녀들이 전부 식사를 멈추고 따라 일어섰다.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황태자비의 뒤로 시녀들처럼 줄지어 나가는 황녀들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시즈. 자주 있는 자리도 아닌데, 식사 시간만이라도 얌전히 있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럼 아무쪼록 즐거운 저녁들 되시길.”
황태자가 시즈를 형편없다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자 커다란 식당 홀 안에는 별궁에서 온 사람들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운영팀은 서로 눈만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황태자까지 나간 뒤 문이 닫히자 시즈가 돌연 푸! 하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