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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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날아드는 수많은 시선을 느낀 야닉이 복잡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듯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운영팀을 데려왔던 기사에게 손짓해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사는 투구 안면부를 위로 올려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는 듯 둘러보다 철컹 소리가 나도록 닫고는 별궁으로 달려 나갔다.
야닉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운영팀을 향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짐짓 태평하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첫날이지만, 마탑에서 말했다시피 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3일 치 훈련을 진행한다. 마나의 속성을 익히고 오늘 안에 초급마법 3개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도록 해.”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작은 체구의 붉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 하나가 다가왔다.
“헤르미네.”
서늘한 인상의 소녀는 야닉에게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운영팀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오늘부터 이방인 여러분들의 교육을 담당할 황실 부설 제1 연구소 수석연구원이자, 취발론 변방 경계구역에 파견 중인 헤르미네 포라킨입니다. 이번에 야닉 황자님을 따라 임시로 마탑에 복귀했습니다. 그냥 단장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포라킨의 첫인상은 다른 것보다 굉장히 피곤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구불거리는 연노랑 머리는 제대로 빗질을 하지 않아 까치집으로 보이기 딱이었고, 누렇게 뜬 얼굴에 벌써 반쯤은 감고 있는 듯한 눈이 꼭 몽유병 환자 같기도 했다.
이든의 또래로 보이는 어린 여성이었지만 그 연령대 소녀가 가진 풋풋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권태로움마저 풍겼다. 높낮이가 없는 단조롭고 빠른 어조가 더욱 한몫했다.
“저희 교육은… 황자님께서 해 주시기로 한 게 아니었나요?”
너무 어려 보이는 외모를 보고 박 차장이 문의했지만 야닉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 가운데 특이사항이 있는 인원이 있어서 말이야. 기초마법은 나보단 여기 있는 헤르미네가 나을 테니 잘 따르도록 해.”
특이사항 인원이 누군지 콕 집어서 말한 것도 아니었건만 한 주임에게 은근한 시선이 몰렸다.
그녀는 아무 반응도 없었던 자수정을 상기하며 멋쩍게 웃었으나 혼자만 조금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이방인들을 잘 부탁해, 헤르미네. 너무 심하게 굴리진 말고. 그대는 나와 함께 가지.”
한 주임은 혼나러 집으로 끌려가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왜 나만 따로 데려가는 거지? 마력이 없어서 필요가 없어진 건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여러 가지 상상 가운데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일반 백성보다도 못한 마력으로는 차라리 성 밖으로 쫓겨나는 것이 제일 무난한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따라가는 와중에, 앞서 걷던 야닉이 돌연 뒤돌아 한 주임을 지나쳐 포라킨에게 돌아갔다.
한 주임은 그가 코앞까지 가까이 왔을 때 숨을 멈췄다가 두 걸음 멀어지자 뱉어 냈다. 없는 애가 다 떨어질 뻔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태초의 마나는 고대의 요정들로부터….”
“헤르미네. 실기 위주로.”
“…예.”
야닉은 짧게 한숨을 쉬고 이방인들과 포라킨을 한 번씩 번갈아 보다가 한달음에 훌쩍 돌아왔다. 그는 빨리 걷는다 싶다가도 금방 속도를 늦추어 주었기에 한 주임이 그를 따라잡기 위해 뛰어야 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이 무기고 앞에 다다랐을 때, 앞을 지키고 있던 위병 두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주먹 쥔 손을 왼쪽 가슴에 두 번 두드렸다.
“존엄하신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야닉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그대들이 한 짓이 무슨 행위인지는 아는 건가?”
떠보는듯한 물음에 위병 중 얼굴이 까맣게 탄 사내가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한 번은 제국! 두 번은 지도자를 뜻합니다! 레비탄 제국과 위대한 지도자에게 심장, 곧 목숨을 바치겠다는 의미로 쓰는 최상위 경례법입니다!”
“잘 알고 있긴 한데, 왜 나에게?”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저의를 가늠하듯 물었다. 위병은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담은 얼굴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2년 전 루드 고원 전투에서 황자 저하께서 제 형의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대 형이 아크만 부대 소속 기사인가?”
“아크만 기사단장님의 종기사입니다! 이름은 헥토르 아ㅅ….”
“아니, 아니. 됐어. 나한테 감사할 필요는 없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의 형이 무언가 크게 착각한 것 같아.”
“어… 착각이 아닙….”
야닉은 손을 들어 위병의 말을 재차 막고는 위병의 귀에 속삭였다.
“애초에, 나는 루드 고원을 간 적이 없거든.”
“……예?”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고 위병이 고개를 돌려 금안을 마주했다. 시선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순식간에 그의 온몸을 덮친다.
야닉이 툭, 위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을 때야 비로소 몸에 달라붙어 퍼지던 살얼음이 깨지면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그가 떨리는 손으로 아직도 차가운 것 같은 손등을 문질렀다.
“이방인이 쓸 무기를 하나씩 시험할 테니 우리가 나올 때까지 근처에 아무도 얼씬 못 하게 해. 그대들도 문에서 좀 더 떨어져 있으면 고맙겠고.”
“예, 예. 존명!”
한 주임은 곧장 화색이 돌았다.
제가 마력이 없으니 다른 것이라도 가르쳐 줄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뺨이 기대감으로 붉어졌다가 조금 뒤 휘둥그레졌다.
3층짜리 석조건물로 지어진 기사단 무기고는 그들의 은색 갑옷과 똑같이 번쩍거리는 온갖 쇠붙이들이 박물관처럼 진열되어 빛나고 있었다.
견습 기사들이 쓰는 목검마저 폼멜이라고 부르는 손잡이 머리 부분에 독수리가 새겨져 있어서 무척이나 값비싸 보였다.
한 주임은 입구 근처에 있던 랜스 하나를 꺼내 관찰하고 있는 야닉을 지나쳐서 관광객처럼 바쁜 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한 곳에 갈색 눈동자를 고정했다.
그곳에는 손에 들어오는 작은 석궁부터 사람 키만 한 장궁까지 다양한 크기의 활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활도 무기였지.’
새삼 깨달은 듯 그녀는 애써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행히도 무기들을 둘러보고 있던 야닉이 주위를 환기하는 어투로 말을 걸어 주었다.
“우리 요새에 있는 규모에 비하면 수집 취미가 있는 대부호 수준이야. 거의 다 써 본 적도 없는 새것 같고.”
“저는 일단 어떤 걸 쓰면 될까요? 검은 다뤄 본 적이 없는데….”
문지기들에게 말했던 출입 목적도 있으니 한 주임은 철석같이 무기를 고르러 들어온 줄로만 알았다.
야닉은 작품처럼 전시된 병기들을 무시하고 그녀를 향해 어려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앞까지 가까이 온 그를 보느라 시선이 자연스레 올라간다. 한 주임은 자신이 이한율을 볼 때보다 조금 더 높은 시선으로 야닉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185? 6? 더 큰가?’
이 정도로 키 크고 몸매 좋은 남자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어서 가늠이 어려웠다. 그녀가 야닉의 키를 눈대중하는 사이 그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가 아직 누구의 편도 아닐 때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어. 아니, 내가 그대를 꼭 필요로 해.”
“네?”
영문을 몰라 올려본 시선에는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맞춰 오는 짙게 떨리는 황금색 눈동자가 있었다.
노을빛이 뿌려진 바다 같은 눈 속에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나를 도와줘, 한 주임.”
그녀는 직급을 단 이후 적어도 천 번은 넘게 불렸던 호칭이, 마치 오늘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은 생소한 기분에 휩싸였다.
낯설기도 하고 어딘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는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잠잠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한 주임은 그 속에 숨겨진 진솔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도움을 바라는 사람의 눈빛은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다. 예전에는 거울만 봐도 알 수 있던 것이었으니까.
* * *
“음, 그러니까… 제가 황자님의 마력을 흡수한다고요.”
“맞아. 무척이나 강력하게.”
“황자님은 주기적으로 마력을 분출하지 않으면 위험하고요?”
“극비사항이지.”
한 주임은 바람만 안 들 뿐이지 바깥과 다를 바 없는 썰렁한 무기고 안에서 팔을 끌어안으며 차분하게 야닉을 바라보았다.
이 황당하고도 만화 같은 이야기에 누군가는 깜짝 놀라거나 고취감으로 흥분할 수도 있겠지만, 한 주임은 감성보단 이성이 앞서는 유형인데다 스스로도 스물아홉이면 호들갑을 떨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10년이 넘는 자립 생활을 해 온 탓인지 아니면 선수 시절 연습하던 마인드 컨트롤 훈련의 영향인지, 그것도 아니면 원체 타고난 성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상외로 담담한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야닉의 마음에 쏙 드는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거든.”
실은 그로서도 이렇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은 아니었으나, 왠지 한 주임에게는 말해도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어제 하녀를 시켜 갖다준 간식이 접시 위에 찻잔과 함께 말끔하게 정리된 모습으로 문 앞에 놓여 있던 광경을 본 이후부터인 것 같다.
자기가 먹은 그릇을 정리해서 밖에 내놓은 사람을 야닉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첫날에는 우물쭈물하다가도 하인들의 손길을 받으면 금방 귀족처럼 행동하던 이전의 이방인들과 한 주임은 조금 달랐다.
호기심이 생겨 별궁 하녀장을 불러 취조하듯 들은 바로는, 그녀는 하인들이 떠다 주는 세숫물도 불편해하면서 우물가가 있으면 알려 달라 했단다. 당연하게도 목욕시중은 한사코 거부한다고도 했다.
어제저녁에 입었던 드레스도 하녀들이 그녀의 방에 갔을 때는 벌써 벗어서 옷걸이째로 건네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에선 저도 모르게 웃었다.
등에서 허리까지 달려 있던 그 자글자글한 리본들을 혼자 어떻게 풀었을까?
그것만 해도 신기한데, 여자는 날뛰는 자신의 마력까지 물에 빠진 솜뭉치처럼 흡수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야말로 진정 천하의 멍청한 놈이 아닐까.
야닉은 먹이를 앞둔 포식자의 발톱을 숨기고 부드럽게 꼬리를 흔들며 유혹하려 애썼지만 숨길 수 없는 절박함을 띤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한 주임은 본능적으로 그 눈빛을 읽었다.
내가 꼭 필요하니 자기 사람이 되어 달라는 말이 기분 나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토커나 불쾌한 시선을 던지는 게 아닌 한 사람의 오롯한 인격체로 인정해 주는 경우에 말이다.
그녀에겐 꼭 ‘이번 프로젝트는 한 주임밖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 책임지고 진행해 봐!’ 하는 기회처럼 와 닿았다.
한 주임은 부러 저자세를 취하지 않으려고 팔을 내리고 반듯하게 서서 야닉을 마주했다.
모름지기 아쉬운 사람이 ‘을’이어야 하는 게 직장생활의 가장 첫 번째 규칙이다.
“좋아요. 대신에…….”
“대신에?”
그녀가 어떤 요구를 하든 간에 웬만하면 들어줄 생각이었으나 의외로 속물적인 요구에 야닉은 팔짱을 끼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관찰했다.
“할 일은 제대로 할 테니 수당을 주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