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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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임은 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들 수 있는 보험은 돈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력이 없다고 쓰레기라고까지 불린 마당에 언제까지 무전취식 하며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에 대해 대비는 해 놔야 하지 않겠는가.
내쫓기더라도 무일푼인 것보단 낫겠지. 은퇴할 적에도 이사하랴 취업 준비하랴 돈이 부족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돈은 어딜 가든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기회가 있을 때 꼭 벌어 놔야 했다. 운 좋게 쫓겨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밥 주고 재워 주며 공짜로 부려지는 노예는 결단코 사절이었다.
“얼마나?”
그의 질문에 한 주임은 이곳 물가를 몰라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방에 와주시는 도우미분들이 받는 급여의 두 배 정도…?”
말끝을 흐리지 말고 분명하게 했어야지. 말하자마자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야닉이 도우미? 하다가 곧 깨닫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대의 일행들에게도 전부 지급하지. 그대는 내 개인적인 사정도 도와주어야 하니, 그것은 별도수당으로 추가하고.”
야닉은 이 똘똘한 아가씨가 자신의 요새에 있는 이방인들이 얼마를 받는지 알게 됐을 때, 오늘 발언을 떠올리며 지을 망연한 얼굴을 상상하며 은근한 기대감에 차올랐다.
한 주임은 제법 성공적인 협상을 이루어 낸 듯 뿌듯한 얼굴로 의욕을 드러냈다.
“그럼 전 뭘 하면 될까요?”
“내가 필요할 때마다 그대의 손을 빌려줘. 이게 그대의 일이야.”
부드럽게 웃으며 내민 손을 보자 당당했던 어깨가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한 주임은 티 나지 않도록 코로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왼손을 뻗어 그의 손바닥 위로 올렸다.
여자치곤 손이 큰 편이라 생각했는데 야닉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그것은 의외로 작고 가냘파 보였다. 그녀는 처음 느끼는 감상에 빠져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신기했다. 온몸의 세포가 닿은 부분으로 전부 쏠리는 기분.
“……또 따뜻해지네요.”
“내 마나가 그대에게 이동하는 거야. 흐름이 느껴져?”
어딘가 간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자르르하게 전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한 손에 감각을 집중했다.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기분은 비유하자면 마치, 어릴 적 장난 중에 전기를 느끼게 해 준다며 손목을 부여잡고 손가락을 뽑을 듯이 당겨 대다가 갑자기 손을 확 놓았을 때 막혀 있던 피가 퍼져나가는 자극의 확장선이랄까.
그게 아니면 뼛속까지 시린 추운 날에 밖에서 꽁꽁 얼어 있다가 갑자기 뜨끈한 실내로 들어갔을 때 느끼는 녹아내리는 기분?
팔을 지나 어깨를 넘어 전신으로 따뜻한 물줄기가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는, 어쨌든 무척 이상한 감각이었다.
싫은 느낌은 아닌데 하마터면 발가락 끝이 간질거린다는 민망한 말을 할 뻔했다. 야닉이 지그시 눈을 감고 편안한 숨을 내쉬는 걸 보는 게 괜히 더 부끄러웠다.
남자에게 면역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그런 거야. 한 주임은 차라리 저도 눈을 감았다.
다행히도 스며드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질 때쯤 그가 깔끔하게 손을 뗐다.
“어제 받아서 그런지 오늘은 어제만큼의 양은 안 들어가는군.”
한 주임은 목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욕조에 기분 좋게 몸을 담근 것처럼 열기에 오른 몸이 신기해서 양손을 쥐었다 폈다가 몰래 발가락도 꼼지락거렸다.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아?”
“아, 네. 전혀요. 오히려….”
“오히려?”
“…하나도 안 춥고 괜찮아요!”
오히려 황홀하기까지 했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지.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몸을 휙 돌려 가까이에 있던 무기를 냅다 집어 들었다.
“이건 차, 창인가?”
야닉이 피식 웃으며 입구에 있던 목검 두 자루를 꺼내오더니 하나를 건넸다.
“다른 이들에겐 검술을 익히는 거로 하자고.”
무기고 밖으로 나오자 아까보다 해가 높이 떠서 그런지 한층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왠지 모를 가벼운 걸음으로 운영팀이 있던 곳으로 목검을 들고 가는데, 멀리서 사람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한 주임은 놀란 눈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축 늘어져 있는 운영팀 앞에 낡은 양동이들이 제각각 놓여 있었다.
“어우, 밥을 괜히 먹었, 우욱…!”
공 대리가 가장 심하게 양동이에 토악질을 했다.
그나마 아직 버틸 만한 사람은 이한율 혼자인 듯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고, 염 부장은 아예 땅바닥 위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부장님! 괜찮으세요?”
한 주임이 달려가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운 뒤 그 앞에 감흥 없이 서 있던 포라킨에게 고개를 돌렸다.
포라킨은 익숙한 일인 듯 고저 없는 어투로 설명했다.
“처음 마나를 순환시킬 때 누구나 겪는 과정입니다. 게을렀던 사람이 갑자기 운동하면 안 쓰던 근육들이 놀라 근육통에 시달리는 것과 같은 이치죠. 반복할수록 금방 아무렇지도 않아집니다.”
“하, 한율 씨는 벌써 괜찮아…?”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 있는 이한율을 보며 박 차장이 힘겹게 중얼거렸다.
그는 후, 후, 호흡을 가다듬으며 진지한 태도로 마법사를 응시했다.
“단장님, 다시 해 주세요.”
이한율의 말에 포라킨이 주저앉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어 회복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물안개 같은 녹색 빛이 그들의 몸 위로 사르르 떨어져 내렸다.
신기한 광경에 한 주임은 손을 뻗어 공중에서 휘적거렸다. 살갗에 닿은 빛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마법 덕에 속이 금방 가라앉은 공 대리가 인상을 구기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토하기 전에 걸어 주면 안 되냐고…….”
“근육통을 겪어야 근육이 단련되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구토감을 느껴야 마나가 활성화됩니다. 집중하시고, 다시 눈을 감으세요.”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일인처럼 다들 구시렁거리며 흙을 털고 일어나 눈을 감는다.
한 주임은 이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다가 야닉과 눈이 마주치자 바닥에 떨어뜨린 목검을 주워 들고 그에게로 돌아갔다.
이내 운영팀의 구역질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저까지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돌아보지 않았다.
적당히 멀어져서 두 사람이 어린 기사들과 운영팀 중간 즈음까지 도달했을 때, 종기사 하나가 달려와 야닉에게 척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신 대로 준비가 끝났습니다.”
기사가 손끝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연무장 한가운데에 웬 호화 가제보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흡사 막사 같은 모양의 목재 가제보는 사면이 모두 뚫려 햇빛만 가리는 차양막 아래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길이의 커다란 소파와 티테이블까지 세팅되어 있었다.
삭막한 연무장과 어울리지 않는 자태의 가제보 안으로 포도주와 비스킷을 나르던 하녀들이 기사들의 시선을 느끼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야닉은 보란 듯이 한 주임의 어깨를 두르며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소곤거렸다.
“추가 수당 업무.”
* * *
한 주임은 검을 쥐는 방법이나 기본자세 등을 간단하게 알려 주고는 소파에 팔을 걸고 누워 있는 남자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야닉은 이 추운 날에도 단추를 몇 개나 풀어헤친 한 겹짜리 긴 옷에 탄탄한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흡사 바닷가에서 휴양을 즐기는 귀족처럼 누워 있었다.
마탑에서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그는 제복 외에는 추위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
오늘은 날씨가 그나마 훈훈하다지만 무기고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방한복에 털모자까지 쓰고 있는데, 연무장 한가운데서 떡하니 피서 나온 사람처럼 포도주를 홀짝거리는 남자는 그걸로도 모자라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연해서 물었다.
“안 추우세요?”
“몸에 열이 많아서. 그대도 별로 안 추울 텐데?”
맞는 말이기는 했다. 무기고를 나온 다음부터는 살짝 후덥지근함마저 느껴져 두르고 있던 로브까지 벗었다.
이것도 마력을 받아서 그런 건가? 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가 눈치껏 대답했다.
“몸속에 있는 마나를 체외로 순환시키면 몸이 따뜻해져서 남들보다 추위를 덜 느낄 수 있어. 일반인들은 조절할 수 있는 마나 자체가 적기 때문에 순환까지는 어려울 뿐이지.”
“그래서 그게 없던 제가 유독 추워했나 봐요. 근데 이렇게 받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나?”
한 주임은 은근슬쩍 테이블 옆에 있는 작은 소파에 앉아서 비스킷을 입에 넣었다. 바삭하고 짭짤한 게 은근히 입에 맞았다.
야닉이 어느샌가 몸을 일으켜 포도주를 잔에 채워 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워낙 많이 가져갔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잔을 받아서 홀짝거리다가 궁금한 건 이 기회에 다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퍼부었다.
“그럼 다른 사람한테도 받을 수 있어요?”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면 죄다 아사하고 말걸. 그대가 흡수하는 양이 어마어마하거든.”
그가 비스킷 한 개를 건네주자 받아서 오물거렸다. 여기에 카망베르 치즈를 올려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
“황자님한테 받은 마력으로 제가 마법을 쓸 수는 없는 거예요?”
“그건 불가능하다고 봐. 본인 마력이 아니면 다룰 수 없을 테니. 동료들처럼 마법을 배우고 싶나?”
“으음.”
한 주임은 포도주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염 부장이 툭하면 말하는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돼.’ 하던 말이 마냥 쉰 소리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현대에서 온 자신에게 다른 이방인들이 했던 것처럼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이 있을까? 하다못해 칫솔과 치약 가루를 만들어 준 이방인도 있지 않은가.
그런 작은 것부터 찾아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 주임은 공으로 급여를 받기는 영 찜찜했다. 기왕 하기로 한 거 잘하면 더 좋을 테니까.
‘내가 뭘 할 수 있지.’
고민에 빠져 있다가 눈앞에 비스킷이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풉.”
“응…?”
한 주임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에 야닉이 손수 먹여 준 비스킷을 뿜어낼 뻔했다.
“아, 미안. 용서해.”
아직도 웃고 있으면서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는 저 얼굴에 순간 꿀밤을 먹이고 싶었다.
누가 봤을까 싶어서 화를 내는 것도 잊고 두리번거리는 데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서 운영팀 전원이 이쪽을 보고 있다.
언제부터 본 거지? 그냥 방향만 이쪽을 향해서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려 했지만 뒤 돌아 있던 포라킨마저 몸을 돌리고 쳐다보고 있었다.
한 주임은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벌써부터 김유정의 바른대로 고하라는 악다구니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미쳤나 봐, 진짜!”
목소리가 들릴 거리가 아닌데도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목검을 높이 들었다. 야닉은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어 항복 시늉을 하더니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확실하게 소문이 나 줘야 해서.”
“…….”
그가 일부러 이런 우스꽝스러운 가제보를 갖다 놓고 시시덕거린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래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무기고에서 자신의 사람이 되어 달라던 눈빛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저 속 빈 바람둥이라고 생각했을 테지.
결국엔 쭈뼛거리며 다시 앉았다.
“돈을 받기로 했으니까 웬만한 건 협조할 테지만, 이런 건….”
야닉이 ‘하지 말아야겠군.’ 하고 생각하는데 뜻밖에도 한 주임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미, 미리 말하고 해요.”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