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17화 (17/155)

17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작품입니다. 저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아, 저기 그러니까, 검! 감사해요, 비싸 보이는데 나중에 꼭 돌려드릴게요.”

검을 들고 있던 손을 삐걱거리면서 말하자 야닉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포상이라니까.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야. 요새에 가면 고르곤의 뿔 가루를 발라서 더 튼튼하게 만들어 줄게.”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일단 주신 건 잘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공짜인 데다 포상이라니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아서 꾸벅 고개를 숙였더니 물끄러미 저를 응시하는 시선이 와 닿는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인 것 같아서 눈만 끔벅이는데, 금색 눈동자가 한 발거리로 가까워졌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야.”

“네?”

“이래서 다들 오해하겠어? 난 요새에 가서도 그대와 손을 잡고 다닐 예정이거든. 매일같이 사냥을 나가기도 귀찮아진 참이라.”

“아… 그럼 어떻게….”

“호칭부터 바꾸지. ‘황자님’ 말고 이름으로.”

한 주임은 난감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선생님, 선배님, 감독님, 누구 씨, 직급 말고 누군가의 이름을 친밀하게 불러 본 적이 없어서 식은땀마저 날 지경이었다.

한데 눈앞의 남자는 불러 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눈치다. 그녀는 눈을 꾹 감고 조그맣게 ‘야닉 님’이라는 타협점을 찾아냈다.

“…뭐, 좋아. 일단은 그 정도로.”

생각보다 쿨하게 물러나 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잡고 있던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아 한 주임은 얼른 손을 빼냈다.

“나는 그대를….”

“그냥 한 주임이라고 불러 주세요.”

‘한재인’보다 ‘한송이’로 불렸던 시간이 훨씬 긴 데다가 개명 후에 이름을 불린 적이 거의 없어서 그녀는 재인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낯설었다.

박 차장이 재인 씨! 하고 불렀을 때 한 번에 못 알아듣고 두세 번 부른 다음에야 대답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회사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리는 ‘주임님’이 더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한 주임?”

“네. 하하.”

야닉은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한 반응을 보이는 한 주임을 보며 다음부터는 3일 이상 떨어져 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다가가도 민망할 정도로 낯을 가리니까 본인이 죄를 짓는 것 같은 떨떠름함과 그럴수록 짓궂게 괴롭히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동시에 맞부딪혔다.

한 가지 예상이 가는 것은 이 여자는 남자를 모른다. 정신적인 것은 물론, 아마도 물리적으로도.

“같이 나갈까? 준비는 얼추 끝난 것 같은데.”

“네!”

한 주임은 소환될 때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담긴 에코백과 저녁에 미리 챙겨 둔 간단한 의류 몇 벌, 세면도구들을 담은 가죽 가방을 잽싸게 어깨에 둘러멨다.

방금 받은 롱소드도 벨트에 차고 마지막으로 두고 간 것이 없는지 빠르게 방을 둘러본 후 문 앞에 섰다.

그 광경을 우두커니 지켜보던 야닉이 웃음을 삼키며 그녀에게서 가방을 가져갔다.

“이런 쪽으로는 빈틈이 없단 말이지.”

* * *

떠나는 일행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황제의 알현실에는 황제는 온데간데없이 황태자 부부와 황자, 황녀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운영팀은 보름 전 소환되었던 같은 장소에서 당당하게 그들 앞에 서 있었고 갈록이 이를 만족스럽게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크만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마물이 들끓는 변방임과 동시에, 인접해 있는 소국 델피온과 로엘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영토이기도 하지요.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우리 레비탄의 땅을 수호하는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영웅이라는 거창한 표현에 들뜬 이는 김유정과 공 대리 단둘뿐이었다.

정말로 위험한 곳인가 싶어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박 차장의 표정을 읽은 갈록이 곧바로 덧붙였다.

“물론 평생은 아닙니다! 4년 뒤 다음 이방인들이 소환되면 여러분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제국 안이라면 어디서든 풍족하게 살아가실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말을 마치며 이한율을 노골적으로 응시했다.

현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실에 충성하게 만들라는 황명을 받은 터라 잠시 아크만에 보내 놓고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 밖의 이방인들은 아크만 영주인 로기아 변경백에게 맡겨 두면 충직한 그가 알아서 잘 처리해 놓을 예정이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한 주임을 관찰했다.

‘듣자 하니 반반한 얼굴로 3황자를 물어 제 살길을 찾았다지. 제법 머리를 굴렸다만 어차피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목숨일 터.’

마력이 없는 자가 오래 살아남을 리가 없다.

현자가 있다고는 하나 적당한 기회에 황실로 데려오면 변방에 남아 금방 죽어 버리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때 황녀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여인이 김유정을 향해 호감을 드러내며 말을 걸었다.

“소문에 유정 님이 찻잎 관리를 도와주셨다던데, 어쩐지 홍차가 아주 그럴싸해졌더군요. 궁에 남아 다과를 맡아 주시는 건 어떨까요?”

“어머, 그랬니? 역시 이계 출신은 다르구나.”

최근 차 맛이 좋아진 이유를 깨달은 듯 다른 황녀들이 동조하자 한 주임은 얼마 전 맛본 얼그레이가 김유정의 솜씨인 것을 알게 되었다.

김유정은 소환된 첫날부터 부지런히 이곳저곳 참견하고 다닌 본인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에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황태자비 모건 뤼시크가 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원한다면 본성에 남아도 좋아요. 황실 전용 재단사도 이방인이지요. 대륙의 모든 유행은 그에게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황태자도 잠자코 있는데 황태자비가 나서서 선심 쓰듯 허락하는 모양새에 박 차장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쩐지 황녀들 드레스가 어디서 많이 봤다 했다.’

재단사로 있다는 이방인은 뻔뻔스럽게도 유명한 브랜드의 디자인들을 이세계에서 제 것인 양 카피해서 대륙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명예를 얻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황태자비를 비롯한 황녀들은 패션과 미용, 다과 쪽에 재능을 보이는 이방인들이 아크만에 버려지는 것을 아까워했다.

한둘쯤 수도에 남겨 두는 것 정도는 폐하가 허락해 왔으니 남아 줄 것을 권유했으나, 김유정은 잠시 고민하다가 사양했다.

지내긴 편할진 몰라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살기는 24살의 그녀에겐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김유정은 ‘일단 아크만에 갔다가 힘들면 돌아와야지’ 하는 천진한 생각을 했다.

의례적인 배웅이 끝난 뒤 그들은 본성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의 중간에 있는 화려한 사륜마차 두 대에 각각 올라탔다.

마차의 앞쪽에는 황실 정예기사 서른 명이 흉갑을 두른 군마 위에 올라타 삼열 종대로 자리 잡고 있었고, 후방에는 창과 방패를 든 기병 스물과 군장을 멘 수습 기사 열 명, 포라킨을 포함한 마탑의 상급마법사 다섯이 말에 탄 채 뒤를 따랐다.

귀환대의 수장을 맡은 고위기사 거스 경이 독수리가 새겨진 붉은색 서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힘차게 치고 나가자 기다란 행렬이 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거대한 군마들이 동시에 발을 구르니 마차 안에서도 땅의 울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행렬은 드넓은 황성을 가로질러 거대한 성문을 지나 정돈된 길을 빠르게 내달렸다.

“수도 구경을 시켜 주지 못해 미안하군. 저녁에 야영하지 않으려면 곧장 고개를 넘어야 해서.”

창문 밖으로 멀리 보이는 다채로운 도시 풍경에 여자들이 달라붙어 눈을 떼지 못하자 야닉이 달래 주듯 말을 건넸다.

“식사 후에 툴란 지구에서 대기 중인 내 사병들과 합류해서 시가지를 벗어날 거야. 그때부턴 길이 고르지 않을 테니 과식해서 전부 게워 내지 않도록 주의하고.”

여자들은 잠시 행군을 멈추고 가졌던 식사 시간에 기사들이 나눠 준 밀 빵과 수통에 든 식은 홍차를 조금씩 나눠 먹은 뒤 찌뿌둥한 몸을 열심히 풀었다.

짧은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지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귀환대 앞쪽에서 뿌우, 하는 경고의 올리판트(상아로 만든 관악기) 소리가 울렸다.

신호가 끝남과 동시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드는 날카로운 소음이 들리더니 멀리서 황소 떼가 돌진하는 듯한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전방을 주시하던 기사가 마차로 말을 가까이 몰아 창문을 두드리자 야닉이 유리를 위로 올렸다.

“도적단인 것 같습니다. 스무 명쯤 되어 보입니다. 처리할 테니 커튼을 내리십시오.”

“아, 그거 내 사병대야. 놔둬.”

야닉은 휘파람 소리와 늑대처럼 아우우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대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얌전히 좀 오라니까,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다.

고개를 돌려 도적단의 정체를 확인한 기사가 투구 안면부를 올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야만족이 아닙니까?”

“돈이면 무슨 일이든 하는 용병단이지.”

기사는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차 상관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3황자의 사병들이라는 보고에 기사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이윽고 마차 옆으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드리워지더니, 보통 사람보다 1.5배는 더 큰 거한의 남자가 문이 부서져라 주먹으로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박 차장을 한 주임이 본능적으로 감쌌다.

“왜 이리 늦었수!”

창문 밖에서 제 덩치만큼 거대한 말을 몰고 있던 야만인은 어두운 녹색의 곱슬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으로 얼굴의 절반이나 가려져 있었다.

그 커다란 얼굴을 보고 이번에는 김유정이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생각보다 일찍 왔는데?”

야닉이 창문 밖으로 소리치자 야만인이 귀가 울리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이런 비실비실한 놈들을 호위라고 달고 온 거요? 제국도 다 글러 먹었구만!”

“내 말은?”

“헤바투스 녀석이 단단히 삐졌수다!”

야만인이 마차 앞으로 속도를 올리자 뒤로 잡고 있던 고삐 끝에 안장을 올린 하얀 명마가 따라 달리는 것이 보였다.

야닉은 창문을 닫고 한 주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말을 타고 갈 테니 편히 있어. 용건이 있으면 마부에게 전달하고.”

그가 마부와 연결되는 작은 창을 가리키며 한 주임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가 떼고는 그대로 마차 문을 열었다.

설마 달리는 마차 안에서 말을 탄다고? 세 여자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야닉은 문밖으로 높이 뛰어올라 따라오던 말 등을 손으로 짚고는 가볍게 올라탔다.

갑자기 올라탄 주인에게 놀랐는지 명마가 푸르릉거리며 앞발을 들어 올리자 그가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곤 곧 안정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차 옆으로 와서 여유롭게 문까지 닫은 뒤 앞으로 달려 나가는 황자의 모습을 보며 김유정이 멍한 얼굴로 대박, 대박을 읊조렸다.

한 주임은 창문 밖으로 진회색의 털옷을 두른 늑대무리 같은 야인들을 보고 긴장된 숨을 들이마셨다. 그들은 야닉의 뒤로 바짝 붙어 달리며 타잔 같은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마차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박 차장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몸을 일으키더니 갸우뚱했다.

“황자님 말 이름이 헤바투스야? 그거 황제 이름 아니야?”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