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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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임은 아까부터 따끔거리는 허리에 등 뒤로 연신 손을 집어넣었다.
길이 고르지 못할 거라던 야닉의 말대로 시가지를 지나 나무와 바위만 보이는 풍경이 이어지자 마차는 급격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박 차장은 반대쪽 창문에 팔을 걸치고 위에 머리를 기대어 억지로 눈을 붙이려고 노력 중이었고, 김유정은 맞은편 소파에 아예 드러누웠다가 몸이 튀어 올라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지자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저 온몸에 멍들 것 같아요.”
“나는 멍들어도 괜찮으니까 멀미만 좀 가셨으면 좋겠어….”
한 주임이 박 차장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남은 차라도 좀 드세요.”
“고마워……. 재인 씨는 괜찮아?”
“아직은 버틸 만해요.”
원래부터 멀미는 잘 안 하고 오래 앉아 있는 데는 이골이 난 터라 한 주임은 그나마 두 사람보단 나은 형편이었다.
다만 마차가 위아래로 흔들릴 때마다 바지 안으로 넣은 셔츠가 말려 올라가 허리 부근에 가죽 보호대가 닿았는데, 셔츠를 구겨 넣어도 자꾸만 빠져서 거친 가죽에 살이 쓸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주변 풍경이 점차 불그스름해지자 빽빽했던 나무들이 듬성듬성하더니 곧 마을을 둘러싼 낡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머지않아 잠깐 멈추었다가 천천히 성문을 통과했다.
예상보다 비싼 통행료를 요구하는 위병에게 적잖이 언짢았던 거스 경은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을 보고 기어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가지로 들어선 귀환대는 긴 행렬을 이루며 마을 광장을 지나고 있었는데,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흙과 돌을 쌓아 만든 집과 낡은 오두막들이 촘촘히 늘어선 마을은 척 보기에도 황량하고 척박했다.
화려한 황실 마차를 이끄는 기사단의 방문에도 그들을 보는 영지민들의 수척한 얼굴에는 오히려 적대감마저 서려 있었다.
드디어 쉴 수 있다는 해방감에 휩싸였던 운영팀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서로 눈을 굴리다가 슬그머니 커튼을 내렸다.
스산한 적막 속에서 흙길을 가로지르던 마차가 낮은 언덕을 올라 어느 순간 빙글 도는 듯이 움직이더니 완전히 멈추어 섰다.
바깥에서 문이 열리고 그 앞에 서 있던 야닉이 손을 내밀었다.
“고생들 많았어. 오늘은 영주의 집에서 쉬었다가 내일 아침 출발하지.”
지겨운 마차에서 김유정이 가장 먼저 야닉의 손을 잡아 뛰어내리다시피 몸을 던졌다.
비틀거리는 박 차장도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 주고 한 주임에게 손을 내밀려는데 그럼 그렇지, 벌써 혼자서 내려와 있다.
“여기는…….”
한 주임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펴고 눈앞의 호화 저택을 멍하니 바라봤다.
관공서 크기만 한 석조 저택 앞에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빵모자를 쓴 중년의 남자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귀부인, 저택의 하인들이 줄지어 서서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몰튼 백작. 환대에 감사하오.”
“다리오 몰튼이 제국의 3황자님을 뵙습니다. 황자님과 신의 사자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누추하지만 부디 편히 쉬다 가시지요.”
영주는 공손한 말투와는 상반되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시선이 귀환대 맨 끝에 있는 용병단을 힐끔거렸다.
“사전에 연락을 받았을 테니 기사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와 마구간을 내어 주고 이방인들에게 방을 안내해 주게. 저기 있는 야만족들은 알아서 여관을 잡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 뜻을 알아챈 야닉의 마지막 말에 백작의 표정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예, 물론입니다. 한데 황태자 전하께선 강녕하시지요? 제가 인사를 드린 지가 오래되어서.”
“그럼. 안 그래도 어제 백작 이야기를 하시더군. 영지를 아주 잘 관리한다는 소문을 들으신 모양이지.”
“결혼 전에는 가끔 방문도 해 주셨는데, 그래도 저를 아예 잊으신 건 아닌가 봅니다. 어서,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당신은 뭐 하고 있어요, 어서 아가씨들을 모셔야지요.”
백작이 제 부인에게 닦달하자 멀뚱히 서 있던 백작 부인이 한 주임 일행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야닉은 잠시 그를 세워 놓고 야인에게 걸어가 가죽 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개를 꺼내 건넸다.
“스캄. 술은 적당히 마시고 이 돈은 다 쓰고 와.”
“간만에 맘에 드는 명령이네? 이따 봅시다, 대장.”
스캄이라는 이름의 야인이 금화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다른 손으로 초록색 수염을 쓰다듬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걸 보니 한바탕 시끄럽겠다 싶어 지그시 쳐다보자 그가 얼른 부하들을 데리고 내성을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외부와 비슷하게 번쩍거리는 저택 안으로 들어선 운영팀은 각자 안내받은 방에서 꿀 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한 주임은 무거웠던 가죽 보호대를 머리 위로 벗어 내리고 긴 숨을 토해 내듯 뿜어냈다.
희뿌연 거울 앞에 서서 슬쩍 셔츠를 걷어 후끈거리던 부위를 확인하니 예상대로 오른쪽 옆구리부터 등허리까지 빨갛게 쓸려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심한 곳은 중간중간 작은 핏방울까지 올라와 있었다.
안 봐도 옷에 묻었을 것이다. 한숨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그녀는 핏자국이 벤 셔츠를 벗고 가방에서 새 옷을 꺼냈다. 어디서 세탁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저택의 사용인들이 금방 목욕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쪼그려 앉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오크통 욕조와 뜨거운 물동이들이 줄지어 들어온 다음에는 담당 하녀가 세탁물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한 주임은 선뜻 셔츠를 건네주려다 어색한 손을 거두었다.
‘초면에 피 묻은 옷은 좀 그렇겠지.’
비누도 있으니 씻고 남은 물로 직접 빨래를 할 작정으로 그녀는 하녀를 내보냈다.
이윽고 다른 방에서 나온 이들이 세탁물을 들고 내려가다가 빈손으로 나오는 동료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는 예쁘신 기사님 방 아니야? 빨래할 게 없으시대?”
“주려고 하시다가 도로 가져가시던데? 분명히 옷에 피가 묻어 있었는데.”
우물쭈물 대꾸하던 하녀가 누군가를 마주치자 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눈에 띄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
야닉은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하녀가 나왔던 방 앞으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한 주임, 나야. 문 열어 봐.”
-네?
문 안쪽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급한 마음에 밀고 들어가려던 그가 한 박자 쉬고 물었다.
“괜찮아? 들어가도 돼?”
-아니, 아니 잠깐만요!
온종일 마차 안에만 얌전히 있었을 텐데 피라니, 산길을 달릴 때 어디 잘못 부딪힌 게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난 참이었다.
훈련할 때 넘어져서 팔꿈치를 바닥에 세게 찧었을 때도 악 소리 한번 내지 않던 여자가 아니던가.
갑자기 팔 쓰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억지로 소매를 끌어올렸다가 시커먼 멍을 봤을 땐 실소까지 나왔었다.
‘그 무표정한 헤르미네가 인상을 찌푸릴 정도면 말 다 했지.’
천천히 열리는 문이 답답했던 야닉은 직접 열어젖히고 들어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급하게 주워 입은 듯한 한 주임의 새 셔츠는 단추가 엇물려 있었다.
“보여 줘.”
“뭐, 뭐를요?”
“그대가 순순히 말할 리가 없지.”
그가 고개를 돌리다가 기어이 구석에 던져진 셔츠를 찾아내 들어 올렸다.
허리 부근에 변색된 자국과 새로 묻은 듯한 붉은 자국이 함께 보이자 단전에서부터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이 정도면 낮부터 계속 피가 났다는 건데.
“아… 보호대가 빳빳해서 약간 긁힌 거예요.”
남 얘기처럼 덤덤하게도 말하고 있는 한 주임에게 다가가 셔츠를 휙 들어 올리자 옆구리에 넓게 긁힌 상처가 보였다. 왜 말을 안 하고 있던 거지?
야닉은 제가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썼다.
“이제부터 그대의 신변은 내 책임이니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치면 바로 얘기해야 해. 나는 내 사람이 무언갈 숨기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당황하던 것도 잠시, 한 주임은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에서 묘한 울렁임을 느꼈다.
‘……‘내’ 사람?’
옷깃을 쥐던 손이 툭 떨어지고 그가 뒤돌아서서 거칠게 눈썹을 문질렀다.
“헤르미네를 보낼 테니 바로 치료를 받도록 해. 알겠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밖으로 나간다. 한 주임은 퍼뜩 정신이 들어 새 옷에 피가 묻었는지 확인하고는 멈췄던 숨을 몰아쉬었다.
‘책임감이 무척 강한 사람인가 봐.’
그렇게 생각하면서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한없이 다정해 보이던 남자였는데 조금 전에는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겨우 이 정도 다친 거로 정색하다니, 그가 크게 화를 낸다면 심장이 쪼그라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겁이 많았구나.”
그녀는 아직도 가슴 언저리에서 둥둥거리는 박동을 느끼며 새롭게 깨달은 사실에 쓰라린 허리도 잊어버렸다.
* * *
늦은 저녁 시간, 백작가의 하인들이 분주하게 주방과 식당을 오가며 음식을 날랐다.
일행들이 전부 들어갈 만큼 식당이 크지는 않은지라 백작 내외와 황자, 이방인들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은 손님을 초대해서 베푸는 것을 꺼리는 저택 주인의 성질을 꼭 닮은 듯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작다고 해 봤자 족히 이십 평은 넘어 보였지만 휑할 정도로 큰 황궁의 그것과 비교하면 충분히 아기자기한 수준인 것이다.
높은 사람이 저택을 방문하는 것이 흔치 않은 기회라 여겼는지 몰튼 백작은 놓치지 않고 황자에게 쌓아 두었던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영지 사정이 좋지가 않습니다. 황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즘 도시 외곽에서 자유민이네 뭐네 이도교들이 선동질을 해 대는 탓에, 농노들이 야반도주하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일이 점점 잦습니다. 참으로 분개할 노릇이지요. 마물과 도적 떼로부터 보호받는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말입니다.”
백작은 칠면조 고기를 신경질적으로 자르며 거침없이 한탄했다.
보석이 알알이 박힌 은잔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야닉이 조용히 빈 잔을 내려놓았다. 까탈스러운 주인을 모시는 데 이골이 난 저택의 하인이 즉각적으로 포도주를 채운다.
가볍게 목을 축인 야닉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도교의 자유민 이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들에게 약간의 토지를 분배해서 세금을 걷거나 병사로 고용하는 것이 더 이득일 수도 있어. 처음엔 수입이 줄어들겠지만, 적어도 영지민들이 도망가는 일은 없어지겠지.”
그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백작이 챙! 소리가 나게 나이프를 접시에 부딪쳤다.
“황자님께서는 영지를 운영해 본 적이 없으시니 이도교의 뜬구름 잡는 소리가 솔깃하신 겁니다. 그게 다 이도교 놈들의 농간이란 말입니다. 사원과 황실의 갈등을 이용해서 이참에 황실을 제 편으로 만들어 영주들 씨를 말려 버리는 게 그들의 목적이겠지요!”
말을 하면서도 분통이 터지는 듯 터럭이 몇 가닥 붙어 있는 백작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정작 백작 부인이나 하인들은 하루 이틀 듣는 넋두리가 아닌 듯 심드렁할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