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 이 전자책은 대한민국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작품입니다. 저자와 발행처의 허락 없이 본 저작물로 무단전재, 복제, 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 시 민사 및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몰튼 백작은 딱히 무례를 지적하지 않는 야닉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통치를 안 해 보셔서 모르시겠지만 농노는 영주의 재산입니다. 어떤 머저리가 재산을 바깥에 풀어 둔답니까? 안 그래도 황실에 몇 번이나 병사나 장원을 늘려 주십사 요청했지만 무시당한 탓에 하루하루가 아주 죽을 맛입니다. 몇몇 영주들 사이에서는 대사원에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요.”
말을 마치고는 얼른 입에 고기 조각을 밀어 넣었다.
몇 번 저작 운동을 거치지 않은 음식물이 빠르게 식도로 넘어가고 백작이 재차 입을 놀렸다. 이번에는 비아냥이었다.
“막말로 지금 당장 폭동이 일어나서 반란 무리가 쳐들어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지금 하는 식사가 우리의 마지막 만찬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
한 주임은 죽겠다는 백작의 말과는 대조되는 식탁 위 풍경을 두루 살폈다.
온통 기름지고 자극적인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찔러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금팔찌 세 개가 끼워진 단단한 팔이 그녀의 앞을 지나가더니 눈앞에 접시 하나가 들이 밀어진 건 그때였다.
‘아, 이건 좀 괜찮다.’
야닉이 밀어 준 로스트 구이에 가까운 닭고기는 그나마 향이 덜해서 먹을 만했다.
그는 동요 없는 잠잠한 눈으로 백작을 보다가 근사한 웃음을 지으며 일축했다.
“대사원에서 황실을 견제하기 위해 백작 같은 제후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어. 충고를 하나 하자면, 그들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팔라딘 (신성기사)을 보내 주는 대가로 재산의 절반쯤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때는 어쩔 생각이지?”
백작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야닉은 놓치지 않았다.
“사원도 운영 자금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니까.”
그는 텁텁하기만 한 싸구려 포도주를 단번에 들이켜고는 손가락으로 입가를 쓸었다. 정말이지 형편없는 귀빈 대접이었다.
“아, 참고로 로기아 변경백이 지배하는 아크만도 대부분의 영지민들이 자유민이야. 아직 남아 있는 소수의 농노는 자네같이 뿌리 깊은 봉건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노인들뿐이고. 자네가 셈을 할 줄 안다면 장기적으로 어느 쪽이 이득일지 잘 헤아려 보길 바라네. 훌륭한 식사였어. 개인적으로 정향은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야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운영팀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으나, 몰튼 백작은 고민에 잠긴 듯 자리에 앉아 요지부동이었다.
앓는 소리를 주절대는 자의 식탁에 고급 향신료라니, 그저 웃음밖에 안 나왔다.
식당을 나오며 그는 운영팀을 향해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오는 길에 봤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으니 괜한 바깥출입은 삼가도록 해. 내일은 날이 밝는 대로 바로 출발하지.”
운영팀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지대가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센 바람이 덧문을 덜컹덜컹 두드려 대는 통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한번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소음이 못내 거슬려 한 주임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기왕 깬 김에 내일 입을 옷가지들을 챙기려다가 문득 의자에 걸어 둔 가죽 보호대가 눈에 들어왔다.
‘튜닉을 입어도 계속 쓸릴 것 같은데….’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영주의 기사들을 떠올리고는 보호대를 들고 문밖으로 나섰다.
이곳에서도 보호대는 사용할 테니 누가 입던 것과 바꾸면 그나마 부드러운 것으로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안이었다.
새것과 교환하자는 거니까 거절하진 않겠지.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저택 현관문 앞에서 하랑과 딱 마주쳤다. 밖으로 나가려던 하랑이 놀라 얼른 달려왔다.
“이 밤에 어디 가시게요?”
“아, 보호대를 좀 바꿀 수 있을까 해서요. 너무 빳빳해서….”
하랑이 그녀의 손에 들린 묵직한 가죽을 얼른 가져갔다.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허리춤을 맨손으로 빨래하듯 북북 문지른다. 키도 엇비슷하고 깡마른 손인데도 보호대는 그의 손에서 사정없이 뭉개졌다.
“황실 재산을 함부로 바꾸시거나 하면 안 돼요. 이런 것들이 다른 영내에 돌아다니면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그가 보호대 가슴 부근에 자그마하게 새겨져 있는 독수리 문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적하자 한 주임이 깜짝 놀랐다.
“몰랐어요.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럼 올라가서 쉬세요. 전 주인님에게 가 봐야 해서요.”
“황자님이 어디 가셨나요?”
그녀의 말에 하랑이 돌아다니는 저택 사용인들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귓속말했다.
“영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계실 거예요. 다른 지역을 자주 보실 수가 없으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꼭 나가시거든요.”
식사 자리에서 그가 보였던 정세에 민감한 모습에 한 주임은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다.
반짝이는 눈을 읽은 하랑이 좋은 수가 생각난 듯 팔을 조금 끌어당겼다.
“주임님 정도면 트라야누스에 입단도 가능하실 것 같은데 같이 가 보실래요? 미리 인사도 할 겸요!”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철책을 지키는 위병들에게 행군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간다고 거짓말을 한 뒤, 로브 속에 있는 각자의 검을 보여 주며 호위마저 거절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 주임이 말을 탈 줄 몰라 한참을 걸어서 언덕을 내려오던 중 마을 어귀에서 유난히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3층짜리 목조건물이 보였다.
문밖으로 남자들의 거친 웃음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욕지거리에 그녀는 긴장하며 하랑의 뒤를 따랐다.
낡은 문이 끼이 소음을 내며 열리자 여관 로비에 마련된 식당에서 왁자지껄 술을 퍼마시고 있던 아까의 야인 무리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방인 아가씨 아니야?”
누군가가 외친 말에 구석에서 에일을 마시던 야닉이 그녀를 발견하고 천천히 오크 잔을 내려놨다.
“한 주임?”
그가 일어서서 다가오자 모두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져 한 주임은 저도 모르게 로브 속에 있던 롱소드를 꽉 움켜쥐었다.
하랑은 지레 겁먹고 그녀 뒤로 몸을 피하면서도 실실거렸다.
“주임님이 트라야누스에 입단하고 싶으시대요.”
“허.”
뻔뻔하게 책임을 전가하며 말을 맞춰 달라는 듯 과장된 윙크를 날리는 하랑을 보고 그녀는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제 주인이 어지간히 무섭기는 한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나와서 화가 났나 싶어 은근 눈치를 보는데, 그가 가까이 오더니 한 손으로 어깨를 끌어당겨 제 옆에 딱 붙여 세웠다.
한 주임은 그대로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듯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함부로 대하면 용서 안 할 줄 알아. 다들.”
“뭡니까, 대장? 애인이에요?”
“루가 알면 뒤집어지겠군!”
야인들이 입 안에 손가락을 넣고 신난 휘파람을 불어 대며 여관이 떠나가라 신명을 떨기 시작했다.
당황한 한 주임이 그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스캄이 관찰하듯 집요한 눈길로 훑었다.
“또 무슨 속셈이에요?”
시선을 여자에게 고정한 채로 묻던 그가 허리춤에 있는 단검에 소리 없이 손을 올렸다.
야닉이 곧바로 스캄의 팔을 가볍게 잡아 저지하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편이야.”
“여기 온 지 한 달도 안 된 이방인이요?”
“내가 보증해.”
“흐음.”
인간 불신의 초상인 대장이 보증까지 할 정도라고 하니 손을 떼긴 뗐으나 스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소환되고 쭉 황궁 안에만 있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아직까진 황제 편이 아닌가?
그가 못 미더운 얼굴로 에일을 꿀꺽꿀꺽 들이켜고는 영 마뜩잖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이런 꼬챙이 같은 계집이 우리 용병단에 들어온다굽쇼?”
“스캄, 좋은 말로 할 때 예의를 지켜 주겠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부탁을 가장한 을러댐에 스캄이 끙 소리를 내며 애꿎은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무식한 놈들이니 그대가 참아. 입단하고 싶다는 건 정말이야?”
야닉이 거품이 없는 누런 맥주를 한 주임에게 내밀며 물었다.
하나같이 짐승처럼 거칠고 털도 부숭부숭한 놈들을 보고 갑자기 입단이라니, 야닉은 조금 의아했다. 남성 취향이 그런 쪽인 건가?
한 주임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야인들과 잔을 부딪치고 있는 하랑을 보다가 대답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요.”
하랑이 대충 둘러대긴 했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병단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크만에 가서도 할 일이 있을 테고 소속감도 들 테니 그녀로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눈앞의 바야바 같은 야인은 좀 무섭지만…….’
그녀는 조심스레 잔을 들어 ‘에일’이라고 부르는 맥주를 마셨다.
탄산이 없어서 처음에는 응? 했는데 한국에서 먹던 맥주보다도 훨씬 더 묵직하고 복합적인 맛이 가득 풍기는 것이 제법 괜찮았다.
와인을 음미하듯 몇 번 입맛을 다시며 진한 홉 향을 느끼다가 꼴깍꼴깍 넘기고 잔을 내려놓으니 갑자기 주위에 네다섯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호감으로 가득 찬 얼굴로 열띤 호응을 던져댔다.
“이 아가씨 제법이잖아!”
* * *
그녀가 훈련 중간중간 장식용으로 올려둔 포도주를 음료수처럼 마실 때부터 눈치는 챘지만 이 정도로 말술일 줄은 몰랐다.
야닉은 테이블 위를 가득 메운 빈 잔들을 보다가 다시 한 주임을 보다가, 이번에는 거의 기절해 있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 멀쩡한 이는 야닉과 한 주임 단둘뿐이었다. 마침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던 스캄이 힘겹게 머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졌다. 합겨억.”
스캄은 흐릿하게 두 명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거나하게 트림을 하고는 머리를 쿵 박으며 쓰러졌다.
“……저 합격이래요.”
한 주임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야닉을 보자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팔짱을 끼고 신기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 봐. 마력을 가져가는 것도 그렇고, 검도 잘 쓰고, 술도 잘 마시고.”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에 열기가 훅 올라오는 것 같아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취한 게 분명했다.
“너,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전 이만 돌아갈게요.”
그녀의 반응을 즐겁게 받아들이던 야닉이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따라 일어섰다.
어쩐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명치 언저리 어딘가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함께 돌아가지. 늦어서 여기서 자면 좋겠는데 이 녀석들 덕에 빈방이 없어서 말이야.”
한 주임은 속으로 ‘술기운이야, 술.’ 하고 되뇌며 괜스레 죄 없는 양 볼을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야닉은 계산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인 앞에 금화 한 개를 올려놓고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여관 뒤에 있는 마구간에서 헤바투스를 끌고 와 안장 위에 올려 주는데, 그 많던 에일을 다 마신 사람 같지 않게 깃털같이 가벼웠다.
그가 고삐를 잡고 기꺼이 아래에서 걸으며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을 가로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
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
누비다 로맨스판타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