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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사람들과 소환당했습니다-20화 (20/155)

20화

※ 본 소설에 등장하는 단체나 기관, 종교, 사건 등은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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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에 왔을 때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백작이 어지간히도 영지민 등골을 빼먹고 있는 것 같더군.”

먼지가 엉킨 지푸라기가 굴러다니는 삭막한 풍경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야닉이 혼잣말처럼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수도에서 고작 하루 거리인 마을이 이 정도로 방치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내 핏줄이 한심스러워지는 순간이지.”

“황자… 아니, 야닉 님은 계속 변방에 계셨잖아요. 그게 왜 야닉 님 탓이에요.”

한 주임은 바로 반박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달빛 아래 드리워진 옆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동시에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스칠 때마다 드러나는 긴 속눈썹과 높은 콧대가 명화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몸을 기울여서 강인한 턱과 도드라진 목울대까지 넋을 잃고 보는데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치료는?”

“……네?”

그가 턱짓으로 허리를 가리키자 그제야 아, 하고 알아들었다.

“저녁 먹기 전에 단장님이 오셔서 회복마법을 걸어 주셨어요. 조금 혼나긴 했지만…. 하하.”

포라킨은 마력을 아껴놔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마차 안에서 구르다 생긴 멍들엔 죄다 약초진액을 던져 주고는, 계속 옷이 닿는 한 주임의 상처엔 혀를 차면서 마법을 걸어 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그대들끼리 서로 부르는 호칭. 부장님, 차장님 뭐 그런 거. 그건 무슨 작위 같은 건가?”

조용히 걷던 야닉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한 주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으음. 제가 있던 나라는 왕권이 세습되던 역사를 지나 보내고 국민이 직접 5년 임기의 지도자를 뽑는데요.”

“그건 다른 이방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대통령’이라고 한다지? 흥미로운 제도야.”

“맞아요. 봉건제도가 없어진 나라들은 보통 기업들의 영향력이 강해지죠. 여기로 치면… 거대 상회? 상단? 들이요.”

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자유민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상단들이 활개를 치지.”

“저희가 바로 그 상단 중에 하나예요. 그 안에서 각자 맡은 직급들이 부장, 차장, 대리, 주임이고요. 같은 상단들끼리는 직급을 우대해 주지만 신분 제도인 작위랑은 달라요. 상단 밖에서는 그저 똑같은 자유민인 거죠.”

“그렇군……. 이해했어. 그대는 귀족들의 교육을 해도 잘하겠어. 모든 이방인이 그대처럼 똑똑하진 않거든.”

한 주임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평범해요. 전 비누 같은 건 못 만들어요.”

“내 연인은 욕심도 많지. 그 정도면 충분해.”

그녀는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야닉은 한 주임을 대하는 요령 한 가지를 또 하나 터득하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 뒤쪽에서 요란한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하랑이 오만상을 쓰면서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저를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딨습니까! 주인님은 그렇다 쳐도 한 주임님은 섭섭합니다. 제가 모시고 나왔는데 말이에요!”

“하랑이 너무 곤히 잠들어서 그냥 나왔어요. 죄송해요.”

사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당신은 툭 하면 사과를 하는군. 이곳에서 이방인들은 귀족과 마찬가지로 대우받고 있으니 좀 더 자각해 두는 게 좋겠어.”

태어날 때부터 황자로 살아온 야닉의 가치관에 부득불 반기를 들고 싶진 않아서 한 주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랑은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혼자 킥킥거렸다.

백작의 저택에 도착하니 거의 새벽이었다. 그녀는 졸린 눈으로 칫솔질만 겨우 하고는 쓰러지듯 곯아떨어져 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덧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캄캄한 방 안으로 한 줄기 빛이 드리워진다. 한 주임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뒤 머리맡에 있던 종을 울려 물을 부탁했다.

조금 뒤 얼음장 같은 물을 가져온 하녀에게 비몽사몽 꾸벅 인사를 하고 덧문을 반쯤 열었다.

눈을 찌르는 빛보다는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먼저 폐부로 빨려 들어왔다.

말똥 냄새가 좀 섞이긴 했지만 무척이나 좋은 느낌이었다. 서울에서는 맡기 어려운 깨끗한 공기를 그녀는 양껏 들이마셨다.

시린 공기로 잠이 번쩍 깬 덕분에 서둘러 씻고 네글리제를 곱게 접어 가방에 넣은 뒤 셔츠와 튜닉, 가죽 보호대와 롱소드까지 착용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일행들은 벌써 출발 준비를 마친 듯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웬일로 제일 늦게 나오네, 한 주임이.”

공 대리가 입이 찢어지라 하품하며 김유정의 뭉친 어깨를 두들겼다.

“아, 세게 좀 때려 봐요. 오늘부터는 진짜 고생길 이랬단 말이에요.”

김유정의 말에 다른 사람들을 보니 어제 마차 안에서 꽤 고생했는지 제각각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한율도 예외 없이 목을 매만지며 다가왔다.

“주임님, 잘 주무셨어요? 전 오늘부터 말을 타고 가려고요. 어제 단장님에게 부탁드렸더니 한 마리 구해 주셨거든요. 산길에서 마차는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녀는 긴 팔다리를 가진 그가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고생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기회가 있을 때 저도 승마를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기사단까지 모두 말에 올라 출발 준비를 마치자 헤바투스에 올라탄 야닉이 빠짐없이 그들을 둘러보고 맨 앞으로 이동했다.

그는 하랑을 시켜 배웅을 나와 있는 백작에게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몰튼 백작은 사양하지도 않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침을 대접해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갈 길이 머시니 어서 가셔야지요. 어제 말씀해 주신 것은 제가 꼼꼼히 따져 보겠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또 보지.”

그가 무덤덤하게 대꾸하고 말 머리를 돌렸다.

길게 늘어진 행렬을 향해 선두에 선 거스 경의 출발한다는 외침과 함께 귀환대는 백작의 저택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열흘간의 기나긴 여정 가운데 둘째 날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다음 마을까진 사흘이나 걸린다더라. 중간에 노숙도 해야 하고.”

박 차장이 창문 커튼을 열어 이른 아침부터 농기구를 등에 이고 걸어가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김유정은 저택에서 챙긴 버석한 호밀빵을 뜯어 두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가는 길에 나오는 모든 마을을 거치려면 2주나 걸린다니까 어쩔 수 없죠, 뭐. 오늘부터는 위험구역을 지난다면서요? 저 벌써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요. 너무 기대돼.”

김유정은 판타지 속 마물 종류를 신나게 읊어 대며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한 주임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화 속 징그럽게 생긴 괴물들을 떠올리다가 마차가 숲길로 들어서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몇 시간 자지 못한 탓에 금방 정신이 아득해졌다.

「…실패작이야, 실패. 실패.」

「기아스가 오우거 같은 멍청이가 돼버린 거야?」

「기아스는 죽었어. 그의 핏줄이 한 짓이야!」

「금방 죽어 버릴 거야.」

「히힛! 죽는다! 죽는다!」

어린아이들의 새소리 같은 목소리가 귀를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아니… 귀가 아니라 머릿속인가…? 거의 동시에 재잘대는 탓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잘 안 들려. 너희는 누구야?’

「이방인. 너는 우리를 찾아와야 해.」

제각각 속삭이던 목소리들이 동시에 같은 말을 던졌다.

어깨를 강하게 흔들어 대는 반동에 놀란 한 주임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재인아, 일어나 봐! 밖에 무슨 일이 있나 봐!”

박 차장의 말과 동시에 기사들이 거칠게 검을 뽑아 드는 마찰음과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가 마차 앞뒤로 요란하게 울렸다.

한 주임은 그제야 찬물을 끼얹은 듯 퍼뜩 정신 차렸다. 마차는 속도를 높여 가며 매우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돌파한다! 튀어 오르는 놈들만 처리해!”

거스 경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기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자 동시에 마차가 크게 들썩거렸다.

여자들은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러질 때마다 의자 양 끝에 있는 작은 손잡이에 매달려 속수무책으로 버텨 내야 했다.

마차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탓에 묶어 두지 않았던 커튼이 한쪽으로 쏠리며 바깥을 환하게 드러냈다.

한 주임은 측면에서 지면을 까맣게 덮으며 무섭게 몰려들고 있는 쥐 떼를 보며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목을 길게 빼 한 곳에 초점을 맞췄다.

쥐라고 하기엔 그것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속싸개로 싸맨 갓난아기만 했다. 박 차장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저, 저게 뭐야?”

수백 마리쯤 되어 보이는 시커먼 쥐 떼들이 우글거리며 마치 들소무리처럼 달려들어 기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거침없이 위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동족의 등을 발판 삼아 말에 탄 기사의 눈높이만큼 오르던 쥐들은 대다수가 칼날에 두 동강이 되어 바닥으로 낙하했고, 그 위를 철 테를 두른 마차 바퀴가 짓뭉개며 내달렸다.

마물의 사체 더미를 밟으며 달리는 소름 끼치는 감촉이 엉덩이에 고스란히 전달되자 머리털이 절로 곤두섰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던 쥐 무리가 검은 파도처럼 해를 가리며 마차 내부에 그늘까지 드리웠을 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곧바로 뒤에서 커다란 화염이 날아들어 마물을 덮치자 마차 안이 온통 붉게 변했다가 잦아들며 다시 환해졌다.

한 주임은 마차 뒤쪽 커튼을 걷었다. 후방에 있던 포라킨과 상급마법사 네 명이 어느새 앞으로 달려 나와 화염방사기를 쏘듯 지팡이에서 불을 뿜으며 공중에서 마물을 태우고 있었다.

“불길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말들이 놀랍니다!”

포라킨이 큰 소리로 이한율에게 소리치자 들판에 남은 무리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던 그가 손을 거두고 이를 꽉 물었다.

그때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검은 등 쥐 한 마리가 남자들이 타고 있던 마차 창문에 철썩 달라붙어 발톱으로 유리에 빠득빠득 금을 내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슬이 달린 철퇴를 휘두르던 스캄이 그것을 보고 매섭게 달려들었다. 그는 맨손으로 우악스럽게 쥐를 잡아떼고는 그대로 손아귀 힘으로 터뜨려 버렸다.

붉은 선혈이 섞인 마물의 잔해가 창문 유리에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에 한 주임은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흡!”

같은 장면을 보고 있던 박 차장이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토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한 주임은 마차 바닥에 웅크린 채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김유정과 시트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참아 내고 있는 박 차장을 보다가 마차 커튼을 모두 쳐서 내부를 어둡게 만들었다.

한 손은 의자 손잡이를 잡아 중심을 잡고 다른 손으로 롱소드를 뺀 뒤 창문 유리가 깨지고 있는 곳이 없는지 연신 고개를 돌리며 경계했다.

커튼 밖으로 몇 번 더 화염 빛이 새어 들어오더니 점차 바닥이 고르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차가 다시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 확실해졌을 때 한 주임은 조심스럽게 뒤쪽 커튼을 열었다.

쥐 떼들은 전력으로 달리는 말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차 뒤에 바짝 붙어 달리고 있는 야닉을 보고 세차게 창문을 올렸다.

“야닉!”

“다들 괜찮아?”

그가 마차 구석에 구겨져 있는 김유정과 박 차장을 보고 인상을 쓰면서 물었다.

“저희는 괜찮아요. 야닉 님은 괜찮으세요?”

한 주임의 말에 그가 남은 쥐 한 마리를 바람같이 베어 내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스 경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니 곧장 기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잠시 전열을 정비하고 재출발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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